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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귀야행 음 ㅣ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교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고소데의 손
아이들이 무서워 교직을 그만둔 남자가 옆집 소녀를 알게 되면서 겪는 기괴한 이야기이다. 아무런 열정없이 지내는 교사의 심리가 많이 들어나 보였다. 파탄난 가정의 모습에서 무능력한 가장의 절망적인 상황을 느낄 수 있었다.
뭔가 구성원의 조합이 이상해서 가족으로 보이지 않는 옆집 사람들의 등장은 삭막한 이웃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부모라는 것의 의미를 모르고 태어난 소녀는 뒤틀린 가족상을 상징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쪽 집은 어떻게 보면 똑같았다. 다만, 소녀 쪽은 남들의 눈을 의도치 않게 숨긴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남자와 소녀는 파탄난 가정이라는 공통점으로 가까워지지만, 그것은 또 다른 공포의 시작점이 되었다. 가족이 떠나고 방치된 집에 남아있는 옷. 끼워질 팔이 없는 옷에 남의 팔이 끼워져도 문제될 일이 없을 것이다. 비록 살아 있지 않더라도.
후구루마요비
자신을 관찰하는 '작은 여자'를 환시하는 병약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서 병을 달고 사는 사람이 겪는 자괴감이나, 주위 시선에 대한 평가를 볼 수 있었다. 아픈 몸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것에 대한 선망과 질투, 한정된 공간에서 생활해야하는 답답함이 느껴졌다.
모두가 자신을 동정하는 것 뒤에 경멸이 숨어 있다고 의심하는 것을 보면서 장기투병 환자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점점 집안에서 짐만 되어가는 여자의 모습은 안쓰러워 보였다. 거기에 동생은 자신과 반대로 잘나가고 있으니, 얼마나 자신이 끔찍하게 보였을지.
점점 무너지고 있는 가족의 경계는 완전히 무너지고 남남이나 마찬가지인 상황까지 오게 된다.
몸이 아픈자는 마음도 아프다고 하듯이 병약한 여자도 마음의 병이 생겨서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녀는 무언가 기억하려면 두통이 오는데, 혹시 요괴의 짓이 아니었을까?
모쿠모쿠렌
방안에서 시선을 느끼고 두려워하는 장인의 이야기이다. 여기서는 특히 시선과 물체를 보는 것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었다. 흔히 우리는 눈으로 본다고 하지만, 작가는 우리는 의지로 보고 있는게 아니라서 본다는 게 아니라, 보이고 있다고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장인은 특이하게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시선을 느끼지 못하지만 혼자, 그것도 집안에 있을 때 시선을 느낀다. 많은 이들의 시선은 거북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있을 때 시선을 느낀다고 하니 누가 훔쳐본다고 두려워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라이버시 침해로 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남을 훔쳐본 사람이 더 시선에 민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가 남을 훔쳐봤으니, 분명 다른 사람도 나를 훔쳐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되면 자기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이 아닐까?
오니히토쿠치
도깨비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인쇄공이 겪은 기괴한 이야기이다. 주로 도깨비에 대한 여러 관점에 대해 많은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우리나라 도깨비에서도 논쟁이 되고 있는 뿔에 관한 것부터, 도깨비라는 존재의 근원과 정체성에 대한 고찰이 나와 있었다.
상당히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작가가 요괴나 괴담이 만들어지고, 어느 고장의 정착되는 순환 가설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명 괴담 순환론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종전이 선언된 이후의 군인들이 겪은 절망적인 상황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기도 했다. 타국 전선에서 사망한 군인들의 시체를 전부 방치할 수 밖에 없는 분위기나, 전투에서 지면 자결하라고 하던 고위층의 태도 변화를 보면서 최악의 상황에서 생존을 갈구 할 수 밖에 없는 분위기를 느꼈다. 전쟁이 수 많은 사람들을 아무렇지 않게 희생시키는 것을 여기서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사회적인 분위기에도 크게 영향이 끼쳤던 것으로 보였다. 작품 속에서는 한 가정이 파탄나는 것만 나왔지만, 당시 사회 전반적으로 이런 사례가 많았던 것 같다.
종전 후의 재앙으로 변해버린 사회를 도깨비의 출현에 비유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엔엔라
연기에 각별하게 집착하는 소방관의 이야기이다. 에도시대 부터 있던 일본 소방관에 대한 역사적인 부분도 흥미로웠지만,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기에 대해 색다른 관점을 보여주었다. 엔엔라라는 요괴가 연기와 관련되어 있다보니 작가가 자연스럽게 소방관과 연관지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체가 불타고나면 발생하는 연기는 단순히 찌거기에 불과하다지만, 여기서는 사물의 진실된 모습이라고 한다. 그래서 연기가 본연의 모습이고 육체가 찌거기라는 것이다. 어쩌면 형체있는 유령이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연기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신기한 구석이 있다고 본다. 단순히 기둥을 그리며 하늘로 올라가지만 때때로 특이한 형상을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을 옛날 사람들이 목격해서 엔엔라가 만들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집요한 집착이라는 것은 가질 수 없는 이상향의 환상을 끝 없이 뒤쫓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환상이 어떤 형체로 나타난다면, 그 사람의 집착이 만들어낸 환영일 것이다.
케라케라온나
웃음에 대한 고민이 많은 여교사의 이야기이다. 흔히 웃음은 즐거움에 상징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웃음이 가지는 다양한 관점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웃음은 기쁠 때도 나오지만, 남을 헐뜯거나 비하할 때도 나온다. 웃음의 이런 점을 보면 웃음이 반드시 즐거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유모를 웃음이 주위에서 들릴 때는 사람들이 경계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점으로 보아 웃음에도 빛과 어둠이 존재하는 것 같다.
웃음 말고도 여성문제에 관한 점도 나왔다. 여성 운동가들은 남성적인 권위를 차용했다는 작가의 주장이 있었다. 그래서 여성 운동가들이 주장하는 것은 현재 남성주의 사회틀에서 성별만 바꾸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작가는 여성운동의 방식이 전혀 여성적이지 않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주장과 행동이 일치하는 운동을 해야한다는 것 같다.
여기서 웃음은 태초에 공격하겠다는 신호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래서 인가? 화가 극도로 치솟은 사람을 보면 실소를 터트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게 그 증거라는 생각이 든다.
히마무시뉴도
귀찮음으로 인해 무너져가는 형사의 이야기이다. 끈적끈적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로 인해 상당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작가가 무기력함이나 나태, 우울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런 분위기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로 전후의 일본 경찰의 모습이 나타나 있었다. 민주경찰을 표방하고 있지만 남의 일을 가로채서라도 승진하려는 모습이 보였다. 계급이 엄격하는 것과는 별개로 상당히 성공에 대한 이기주의가 만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지도 않은 일을 주위의 시선과 질타로 인해 하고 있다 주장하는 사람을 주위에서 가끔씩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단순히 일하기 귀찮아서 만든 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작가는 무슨 일을 해도 남의 탓만 하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려고 하는 나태한 사람의 심리를 표현한 것 같다. 여기서 표현된 것 만큼 사람의 우울함이나 나태함은 한 번 붙으면 떨쳐내기 힘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에리타테고로모
교주인 아버지를 깊이 미워하는 승려의 이야기이다.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 불교계 전반적인 상황이 들어나 보였다. 일본 불교계가 상당히 복잡하고 서열화 되어 있다는 것을 보고 종교인들 사이의 차별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주는 신통한 능력으로 많은 이들에게 칭송받는다. 그런데 이 신통한 능력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교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곡예사와 종교인의 차이가 교만이라고 나타나 있다. 즉, 재주를 부리는데 만족하면 곡예사고, 거기에 교만이 있다면 종교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종교라는 것의 이면이 들어난다고 생각한다. 남들과 다르게 신에 가깝게 지낸다고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교만에 불과하면 특별할 것이 없어지고 그저 남을 무시하는 인간일 것이다. 이 교만이 무서운 것은 많은 이들에게 외면 받고 비난 받아도 꿋꿋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처참하게 무너진다.
인간의 교만, 그것이 '에리타테고로모'라는 실체일지도.
게로조
자살한 숙모의 기억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는 형사의 이야기이다. 주로 일본의 매춘에 관해 다루고 있었다. 전후의 피폐한 경제 상황에 많은 여자들이 매춘을 했을 것으로 보였다. 거기에 경찰들의 단속을 해서 쉽지는 않았을 듯하다. 흔히 일본하면 매춘을 당연시 여기는 사람이 많은데, 일본도 마찬가지로 매춘을 하면 인간 취급 못받고 비난 받는 것이 보였다.
무서움과 싫어함의 차이를 주로 말하고 있다. 작가는 사람들이 무서움과 싫어함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하는 것 같다. 벌레로 예를 들고 있다. 징그러운 벌레가 나타나서 비명을 지르는 것은 낯선 것의 등장으로 일시적으로 놀란 것일 뿐, 공포를 느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 벌레를 싫어한다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다른 예로는 폭력으로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겁쟁이라고 하는 경우이다. 하지만 싫어해서 무서워하는 경우는 없지만, 무서워서 싫어하는 경우가 있어서, 이 둘의 차이는 너무 복잡하게 느껴지기만 한다.
이 싫어함과 무서움은 다른 것이지만 실질적으로 다른 것이라 하기에는 어딘가 애매모호 하다고 생각한다.
가와아카고
무언가를 잊는 다는 불안감과 바다에 강한 혐오감을 갖는 작가의 이야기이다. 대부분의 작품이 어두운 분위기였지만, 주로 이 작품은 축축하고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주고 있었다.
현실에서 작가가 느끼는 마음의 부담이 나와 있었다. 뭐든지 써야 한다는 강박감, 써도 재미없는 것만 써져서 느끼는 허탈감, 자신이 세상에서 그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 같은 복잡한 심정이 한꺼번에 오다보니,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 같다. 아마도 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한 번쯤은 여기에 나온 부담감을 느꼈을 것 같다.
부담감으로 머릿속이 정신이 없으니까, 무슨 일이든 자연스럽게 잊어버리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잊는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사람을 정말 불안하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 중요한 일을 듣고 잊어버리거나, 말다툼한 원인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잊어버리면 자신 안에서 책임을 지지 못했다는 것에서 불안이 나온다고 본다. 그래서 무언가를 잊는 것이야 말로 불안의 원천일 것이다.
이런 혼란스러운 감정과 바다에 대한 혐오가 겹치면서 요괴라는 환영을 만들어 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듣자 하니 소설가는 정상적인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나는 애초에 정상적인 정신조차 가지고 있지 않으니, 정말로 그렇다면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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