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얼굴의 여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5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비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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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저 무섭다고 느낄 수도 있고, 나름대로 행동력이 있다면 잘못된 걸 바로 잡고자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한 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고,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한 채로 의미 없이 사라져간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허무함 속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잘못된 것이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시 나타날지 모를 일이다.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달라졌더라도 그 본질은 변함 없이 말이다. 이처럼 시대를 초월해 계속 돌아다니는 망령을 두고 이런 질문이 계속 나올 것이다. 이걸 보고도 계속 모른 채하고 방치할 생각이냐. 여기에 과연 어떤 답을 내고, 무엇을 해야 할까.

만주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엘리트 청년인 모토로이 하야타는 무작정 기차에 올랐다가 어느 마을에 내린다. 그곳에서 그나마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탄광 일을 시작하게 된다. 다양한 인간군상이 모인 탄광에서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경험하던 중, 탄광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하고 하야타의 지인이 빠져 나오지 못하고 갇히게 된다. 게다가 탄부 숙소에서는 밀실 살인사건까지 발생하고 이건 곧 연쇄 살인으로 이어지는데...

패전 이후의 일본 사회, 그것도 탄광 관련된 내용을 아주 깊숙이 다루는 내용이다. 일본의 탄광 개발 방식에서 시작해 노동자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회사 측, 안전사고 관리가 부실한 현장, 이익을 우선시하며 발생하는 인명 경시 같은 노사 문제가 주로 부각된다. 여기에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조선인 강제 징용 문제가 아주 깊은 관련성을 가지다 보니 여러모로 복잡한 감정이 든다. 편파성 없이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다루어서 과감하다고 해야 될 정도라 그렇다. 이렇다 보니 평소 작가의 공포 미스터리면서, 어떻게 보면 사회파 미스터리 같다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다소 현실적인 면이 강하다고 해야겠다. 이런 점 때문에 주인공의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이 다소 길다 보니 메인 사건만 기다리는 경우라면 살짝 지루할지도 모른다.

미신을 잘 믿는 탄광 사회에서만 존재한 민속학적 요소를 보며 여러모로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하는 인상을 받았다. 단순히 안전을 염원하는 바람에서 나온 미신이 아니다. 지하의 짙은 어둠에서 느끼는 원초적인 공포와 사방이 꽉 막힌 땅 속이라는 환경이 조성하는 심리적인 압박이 쌓여 있다는 인상이다. 한 번 내려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을 것 같다. 아무리 탄광에서 일을 오래한 베테랑이라도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어 보였다. 작중에서 언급되는 갱내에서 겪은 괴담 같은 사건 역시 그렇다. 그냥 사고가 나서 갇히는 것만으로도 무서울텐데, 정체 모를 존재에게 이끌려 지하 깊은 곳으로 끌려갈 수도 있다니. 그야말로 죽음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환경이나 다름없다. 현실적으로도, 비현실적으로도 말이다. 한편으로는 도조 겐야 시리즈에 나온 괴이에 비해 사건과의 연결성이 부족하다 보니 공포 면에서 약하게 보일 만하다.

여러모로 탄광 사회에 존재하는 건축물의 특징과 자연적, 문화적 환경을 이용한 밀실트릭이라 나름대로 흥미롭게 봤다. 트릭 자체의 기발함 보다는 이런 식의 속임수가 가능하게 만든 환경이라는 부분에 주목했다. 물리적 트릭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심리적 트릭이 많이 작용한 것이다. 별거 아닌 간단한 조작이나 의도치 않게 만들어진 상황이 점점 사건을 복잡하게 만드는 점에서 상당히 놀랍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흔히 아는 탐정소설 같이 자유롭고 협력이 많은 조사 환경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상당히 제한적인 환경에서 추리가 진행되고. 주인공 역시 탐정 역할이라는 자각이 확고하지 않은 상태로 스토리가 진행되다 보니 보기에따라 답답할 수도 있다고 본다.

도조 겐야와 또 다른 분위기의 호러미스터리를 보여준 모토리야 하야타 시리즈 역시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결말 부에 후속작에서 겪을 사건을 미리 예고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다만 도조 겐야 시리즈의 번역이 끊긴 거나 다름 없는 상황에서 이 시리즈의 후속이 나올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어쨌든 기회가 된다면 모토로이 하야타의 다음 사건을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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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매켄 단편선 1 아서 매켄 단편선 1
아서 매켄 지음, 이미경 옮김, 정보라 해설 / 와이드마우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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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신, 판

레이먼드 박사의 집에 초대를 받은 클라크. 용건은 회백질을 건드는 시술을 통해 세상의 이면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한 실험을 같이 지켜 봐달라는 것. 실험 대상자인 메리는 시술 직후 백치가 되어버리지만, 레이먼드 박사는 그녀가 세상의 이면에서 나타난 자연의 신, 판을 봤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클라크는 레이먼드 박사의 실험이 터무니 없다 생각하면서도, 판의 흔적을 찾다가 헬렌이라는 여자와 뭔가 관련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데...

세상의 다른 이면이라는 점만 보면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인 <저 너머에서>와 유사하게 보인다. 초자연적인 영역을 과학을 통해 증명하려는 면에서는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차이점이라면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은 눈으로 보이는 현상 그 자체를 다루고, 이 소설은 그 세계가 있다는 증거인 어떠한 존재에 대한 증명이 강조된다. 이 중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이 나중에 나왔기 때문에 아서 매켄의 소설이 어느 정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나타나는 자연에 대한 묘사는 뭔가 기묘한 느낌이다. 분명 묘사 자체는 아름다운데 어딘가 불길하고 음침한 인상을 준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넘어서서, 아주 오래전부터 지구 상에 존재해온 자연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공포. 그나마 현실에서 비교해 볼 수 있는 거라면 숲 속에서 조난 당한 상황에서 느껴지는 주변 모습 정도라고 본다. 이게 인적이 드문 외진 곳에서만 느껴지는 것이라면 모를까, 아무도 모르게 도심을 활보하면서 야생의 공포를 뿌리고 다니니 파급력이 엄청나게 나타난다.

왜 하필이면 작중에서 다루는 공포의 존재가 판인지 처음 봤을 때 살짝 이해하기 어렵기도 했다. 단순히 그리스 신화에서 나온 자연의 신이라 자연의 공포를 반영하기 그럴싸 했을 것이라는 정도 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판에 대해 여기저기 찾아보니 공포로 나타내기 꽤 적절할 만했다. 일단 판의 외형부터가 인간의 상반신과 얼굴을 가진 산양 혹은 염소인데, 흔히 악마의 이미지 하면 떠올리는 것에는 염소와 산양이 있다. 악마의 이미지에 염소와 산양이 있는 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티로스라는 정령에서 유래된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사티로스의 외형이 염소가 된 건 판과 엮이면서 생긴 것이라 한다. 또한 판은 사람을 갑작스러운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행동을 즐기는 특성이 있고, 이런 점 때문에 영어 단어인 패닉(Panic)의 어원이 판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이렇게 정리해 보니 작중의 판이 어떤 이미지였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사람이 인식해서는 안 될 자연의 공포 그 자체. 신인지 악마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는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존재. 돌아다닌 곳마다 죽음과 혼란을 일으키는 공포의 화신. 여기에 판의 기원과 실체에 대한 반전까지. 제목에 붙은 그대로 위대한 신, 판이 맞다. 다만 이런 부분을 작중에서 친절하게 나타내지 않고 오로지 독자의 해석에 맡기듯이 애매모호한 서술이라 쉽게 읽을 만한 내용은 아니긴 하다. 책 마지막에 작품 해설이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이라고 본다.

내면의 빛

런던의 유명 레스토랑에 방문했다가 오랜 친구인 다이슨을 만나게 된 찰스 솔즈베리. 다이슨은 궁핍하게 살다가 돌아가신 삼촌의 유산을 물려 받으며 생활이 편해졌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원하던 연구를 할 수 있게 됐다면서 최근 런던의 교외 지역인 할레즈던에 살았던 어떤 의사에게 발생한 사건을 들려주는데...

스토리 구조만 보면 <위대한 신, 판>과 유사한 점이 있는 편이다. 세상의 이면에 대한 미지의 실험을 했다가 재앙과 마주해버린 연구자라던가. 합리성을 추구하면서도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궁금증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깊숙이 빠져드는 주연 인물이라던가. 다만 세상에 유해한 영향력을 끼치고 주연 인물들이 어떤 식으로든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던 <위대한 신, 판>에 비해, 이 소설은 제목처럼 개인의 내면에만 영향을 끼치는 정도로 작게 나타나고 사건과 주연 인물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부분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다. 사소하게 보이지만 제법 큰 차이점이다.

이 작품에서도 작중에서 벌어진 사건의 진실과 원인에 대해 애매모로 하게 나타내다 보니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위대한 신, 판>과 비교해 보면 작가가 어떤 의도로 나타낸 것인지는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위대한 신, 판>의 판이 실존의 문제라면, 여기서 나오는 미지의 무언가는 관념적인 문제로 보인다. 더 쉽게 설명하자면 눈앞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공포와 심리적인 공포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 말하는 심리적인 공포란 단순한 미지의 공포가 아니다. 종교와 오컬트 같은 신비의 영역이 아니라 의학과 과학에 해당되는 현실적인 부분이다. 작중 묘사만 보면 오컬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게 주술이나 종교적인 것이라고 확실한 언급은 없다. 그저 하나의 발견, 즉 과학적인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발견으로 인해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두려움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이 새로운 물질이나 균의 발견으로 인해 신체에 발생할 영향, 대표적인 것으로 각종 질병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이런 걸 보면 미지의 공포란 무조건 비현실적인 것이라 할 수는 없어 보인다. 또한 이게 작가가 살았던 19세기는 물론이고 지금 현재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공포라는 점에서 과학적 발견의 공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붉은 손

선사시대 낚시 바늘로 추정되는 유물에 대해 논쟁을 벌이던 다이슨과 필립스. 필립스는 분명히 진품이라 하고, 다이슨은 위조품이라 주장하는 상황에서 둘은 가벼운 산책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점차 빈민가로 들어간 그들은 우연히 살인사건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거기서 붉은 손 형태의 상징물이 그려진 걸 발견한 다이슨은 범인이 현대에 남아 있는 원시인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데...

얼핏 보면 추리소설처럼 보이는 구성이지만(사실 앞의 <위대한 신, 판>과 <내면의 빛> 역시 추리 소설 같은 분위기가 있긴 있다.), 신비로운 분위기와 오컬트가 강조된다는 점에서 고딕소설에 가깝다.

암호문에 대한 해석 같이 그럴싸한 부분이 있어서 하나의 미스터리라 할 수는 있겠지만, 아무래도 결론만 보면 근간은 다르기에 추리소설이라 하기 어렵다. 특히 작중에서 나온 불가능성의 원칙이라는 조사 방식은 이름만 거창할 뿐, 그저 우연에 모든 것을 맡기는 식이라는 것만 봐도 추리와 고딕이 얼마나 다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단순한 고딕소설이 아니라 추리소설처럼 보이게 진행되다 보니 뭔가 현실성을 부여해서 결말에서 나타날 공포가 더욱 부각된다고 본다.

원시적인 것에 대해 다루는 부분이 많은데, 이게 사람의 퇴행적인 면을 비유한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한다. 제 아무리 많이 배운 사람이나 현대적인 생활에 익숙한 보통 사람이라 할지라도 원시인처럼 야만적인 행동을 보일지 모른다고 말이다. 이 야만적인 부분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여러 사유로 눈이 멀어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하지 않는 무뢰배를 말한다. 재미있는 건 이런 퇴행적인 면이 나타나게 된 원인이 원시적인 오컬트와 관련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이 원시적인 것은 단순 비유와 현실 사건으로서의 완결성에서 끝나지 않고 실존하는 공포까지 연결성을 가지게 된다. 이게 바로 앞에서 언급한 현실성을 부여해서 공포를 부각 시키는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의 마지막에 있는 작품 해설은 반드시 읽어보기를 바란다. 아서 매켄의 작품에서 대체로 어떤 면이 강조됐고 어떠한 특징이 보이는지 상세히 알려줘서 어렵게 느껴졌던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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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메 - 1893년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소와다리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오스카 와일드 지음, 오브리 비어즐리 그림, 이한이 옮김 / 소와다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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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폐라고 한다면 언제나 거부감이 먼저다. 도저히 사람 같지 않은 모습과 그걸 즐기는 행위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니 당연할 것이다. 문학적으로 이런 주제를 다루면 이래저래 박한 평가가 따라오게 되는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퇴폐적인 요소가 있다는 점 만으로 무작정 저평가 받는 건 아무래도 좀 그렇긴 하다. 하나의 표현 방식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나타내고자 시도한 걸 퇴폐라는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놓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소설은 꽤 많이 읽어 봤고, 시는 조금씩 가까워지려고 하고 있는 편이지만, 희곡은 여전히 거리가 먼 편이다. 소설은 문장을 너무 어렵게 쓰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체로 내용만 따라가며 읽기 쉬운 편이고. 시는 느낌 가는 대로 읽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희곡은 뭔가 그냥 읽으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느낌이다. 오직 대사로만 진행되는 형식이라 어떤 의도로 나오는 말인지, 이게 과연 그 인물의 진의가 담긴 말인지 판단하며 읽어야 해서 그렇다. 그럼에도 희곡을 읽게 되는 건 아무래도 대사에서 느껴지는 힘 때문이라고 본다. 모든 걸 말과 행동으로 보여줘야 되는 만큼, 작은 행동이나 대사에 나타나는 표현의 깊이가 남다르다. 대체로 소설책 한 권에 비하면 희곡 하나의 분량은 꽤 작은 편임에도 이 깊이에서 여러모로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희곡이 가진 힘을 알 수 있다. 이런 부분을 실감하게 되면 아무리 희곡이 어렵다는 인상이라도 보게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어딘가 음울한 분위기에서 시작해 점차 파국으로 치닫는 비극이다. 단막이라는 짧은 분량 안에서 다소 반복되는 구도가 많음에도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준다. 대부분 팜 파탈로 묘사 되어 주목을 많이 받는 살로메로 인한 것이지만, 간접적으로 나타나는 주변 묘사나 웅장한 대사들이 분위기를 살려준다고 본다.

모티브가 된 원전과 희곡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얼마나 파격적으로 각색 됐는지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단순히 수동적인 모습에서 스스로의 의지로 행동하게 바뀐 살로메의 변화 뿐만 아니라, 여러 인물들의 추한 모습이 부각된다고 생각한다. 허세가 더해진 겁쟁이 같은 모습. 눈치 없는 모습. 웃기는 건 이게 스스로 파멸로 빠져드는 살로메의 행동과 함께 따라오는 모양새다. 반복되는 대사들도 가만 보면 단조롭게 보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살로메의 파멸 행보와 매우 유사한 방향이라는 점에서 웃기게 보이기도 한다. 이렇다 보니 사실상 극의 흐름을 살로메 혼자서 끌고 가는 것처럼 보인다. 살로메로 시작해서 살로메로 끝나는 스토리니 딱히 틀린 말이 아니긴 하겠다.

한편으로는 굉장히 아름답고 유려한 문장으로 된 대사가 많은 편이다 보니 이 비극적인 내용을 묘하게 만든다. 어떤 것은 아름답다 보니 더욱 불길하게 보이고, 어떤 것은 급하게 꾸며낸 듯이 허울처럼 보이고. 어떤 것은 아무리 아름다움을 길고 자세히 강조해도 덧없다는 듯이 보이고. 아름다운 표현으로 가장 큰 충격을 주는 부분이라면 거의 마지막에 나온 살로메의 대사다. 극 중에서 가장 끔찍한 장면 임에도 진심을 다 끌어낸 듯한 아름다운 묘사를 해서 그야말로 퇴폐의 끝을 보여준다. 그저 징그러운 장면이라 할 수도 있지만 이떻게 이런 표현으로 나타낼 수 있는지 대단하기도 하다.

이렇듯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극과 극으로 갈릴 만한 작품이다. 다만 개인적인 감상에서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작품성 면에서는 확실하게 해둘 필요는 있다고 본다. 퇴폐적인 면이 별로라고 할 수는 있다. 그래도 그것만 강조된 극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발표 당시에도 의견이 여럿으로 갈렸지만, 지금까지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남은 걸 보면 감상과 작품성은 별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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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1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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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지 못하는 물은 썩기 마련이다. 어딘가에 수원이 연결되어 있거나 자연스럽게 흐르게 두지 않는 이상 새로운 물이 공급되지 않기에 그대로 부패하는 것이다.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한 것이면 어떻게든 해결이 가능하다. 하지만 인위적인 힘이 작용한 것이라면 굉장히 복잡해지고 만다. 여러 이해관계와 입장 차이로 인한 대립으로 근본적인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의미 없는 싸움만 물고 늘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엇이 문제였는지 잊어버린 채로 모든 것이 썩은 물 아래로 가라앉아 버린다. 그 썩은 물 아래에 쌓이고 쌓인 것들은 사라지는 게 아니다. 어느 순간 눈에 보이는 실체로 구현되어 모든 것을 집어 삼키게 될 것이다. 온건하건, 극단적이건 가리지 않고 말이다.


구로 선배로부터 나라의 하미 지방에서 행해지는 기이한 기우제에 대해 듣게 된 도조 겐야. 13년 전 기우제에서 발생한 신남 사망 사건 이후로 오랜만에 다시 열린다는 점과 미즈치라는 물의 신이 연관되어 있다는 부분에서 관심을 끈다. 그렇게 하미 지방에 도착한 도조 겐야는 기우제와 관련된 신사 네 곳의 관계를 통해 뭔가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있다는 걸 느끼던 중에, 예정대로 진행된 기우제에서 13년 전과 마찬가지로 신남이 사망하는 사건을 목격하게 되는데...


그 동안 시대적 배경이 종전 이후라고는 했지만 간접적으로 묘사되는 정도였다. 당시의 분위기가 어땠느니, 전쟁으로 누가 죽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는 꽤 직접적으로 다루는 느낌이 강하다. 만주국에 거주하던 이들이 일본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겪은 일을 다루고, 자살 특공대 출신의 인물이 나온다는 점에서 그렇다. 작중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까지는 아니고 배경을 설명하는 요소로 나오는 것이 전부이긴 하다. 그럼에도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비정상적인 집단문화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 부분에서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배경 설명이 중요하다보니 본 사건에 들어가기까지 꽤 장황하게 보일만하다. 대체로 초반이 그런 편이고 후반으로 갈수록 메인 사건에 집중하는 편인데, 사건 파트에서도 민속학 관련 내용이 많아서 역시 쉽지만은 않다.

상당히 폐쇄적인 하미 지방의 분위기는 여러 방면으로 압박감을 준다. 다소 상식 밖의 상황에서 진행되는 사건 수사는 기초적인 조사 이상으로 진전이 불가능하게 제한을 만들어 버리고. 여기에 정체불명의 괴이까지 느껴지니 현실과 비현실 양쪽에서 공격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쪽은 현실에 실체를 가지고 존재하며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는 과거의 망령. 다른 한쪽은 실체와 존재가 불분명하면서 간접적으로 위협을 가하는 관념적인 존재. 마치 다른 세상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지만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이런 경우가 존재할 수도 있다. 영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존재감의 무게가 다르겠지만.

미즈치라는 존재는 단순한 괴이가 아니라 신성하게 모셔지는 것이라 그런지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이미지나 대략적인 인상이 나타나지 않는 편이다. 그냥 불가사의한 존재 같은 것이 아니라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도 될 정도다. 꽤 소름끼치는 괴이 여럿이 묘사되긴 하지만 물이라는 연관성을 가지는 정도지 미즈치 그 자체로 보기는 힘들다. 그래서 잔잔한 수면마냥 미즈치는 그 어떤 움직임도 반응도 없이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냥 신성한 존재라면 그 만큼 보기 힘든 것이라고 이해되겠지만 점차 밝혀지는 하미 지방의 기우제에 숨겨진 진실을 생각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마치 수면 아래에 숨어서 엿보는 악어처럼 덮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조용하던 물속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기우제를 더럽힌 진짜 원흉과 이유가 뭐가 됐든 결론적으로 방관한 이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애초에 물의 신이라고 불리는 점에서 구체적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현상 그 자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미즈치는 조용하면서도 천천히 움직이다가 순식간에 모든 것을 덮쳐버린 것일 테다.

추리 요소에 대해서는 자연 환경에서 발생하는 꽤 그럴싸한 밀실 트릭을 사용해서 흥미롭다. 다소 우연이 많고 정황 증거에 의존하다보니 보기에 따라 별로라고 생각될 수도 있으나 앞서 언급된 상식 밖의 상황이라는 점을 기억해둬야 한다. 보통 외부와 고립된 상태에서 진행되는 경우를 클로즈드 서클이라고 하는데, 이 작품의 경우는 환경적 고립이 아닌 문화적 고립에 가깝다. 즉 외부와의 왕래는 자유롭지만, 내부적으로만 통하는 규칙과 이해관계로 인한 제한과 불이익이 발생하기에 문화적 클로즈드 서클이라 해도 되겠다. 이런 상황에서 시행착오를 거듭해나가며 정황 증거로만 추리한다는 건 꽤 힘든 일이다. 그렇기에 다른 작품 같으면 지적받을 증거 부족으로 인한 비판에 대해서는 나름 자유로운 편이라 할 수 있다. 그 부족한 증거에 대한 부분도 다른 방식으로 보충해주거나 해석이 뒤따르는 편이라 아예 방치하는 것이 아니기도 하고.

사실상 사건의 배경부터 발생 원인까지 따져보면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이 왜 위험한 일인지 보여주는 예시나 다름없다. 단순히 오랜 인습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폐해를 일으키는 정도가 아니다. 이미 사라진 악습이 되살아나 무고한 희생자들을 발생시키고, 그 업보가 쌓이고 쌓여 결국에는 엄청난 참극으로 이어진다. 제 아무리 희생을 요구하는 형식으로 당장 큰 효과를 보더라도 결국에는 책임이 돌아오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대대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느 개인의 잘못도 책임도 아니다. 뭔가 이상한 낌새가 있는데도 미리 막지 못하고 방치해버린 모두의 책임이다. 그 책임을 통감하고 기억하는 자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풍요와 발전을 기원하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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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 케이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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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락


전신에 깁스를 하고 얼굴마저 붕대에 감긴 채로 입원 중인 음습. 그의 병실에 원래 오던 간병인이 아닌 새로운 사람이 오게 된다. 말 수가 적다는 점이 살짝 불만으로 여겨지던 새로운 간병인은 음습에 대해 알고 싶다는 질문을 하게 된다. 마침 그 날은 별다른 일정이 없었기에 음습은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있었던 일을 들려준다. 다름 아니라 자신의 주가를 올리기 위해 노력하다가 비참하게 추락한 과정인데...


처음에는 주가라는 말이 자주 언급돼서 경제와 금융과 관련된 내용인줄 알았다. 그런데 이 주가라는 것이 하나의 비유이자, 소설 속 세계관에서 통용되는 특수한 개념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꽤 무겁게 느껴졌다. 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을 경제적 논리로 통용해버린 현실. 사소한 일이나 아는 사람의 평판 같은 것으로 인해 자기 자신의 가치가 수시로 요동친다. 하루아침에 좋은 대접을 받는 사람이 될 수도, 살아 있는 것마저 사회에 폐를 끼친다고 손가락질 당하는 수상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부당하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공포 그 자체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돈으로, 즉 자산으로 본다는 뜻이니까.


한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과정 속에서 가치에 따른 인간의 잔혹함을 볼 수 있다. 자신보다 못한 사람으로 판단되면 아무렇지 않게 얕잡아 보고, 친절을 가장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해 먹을 생각만 한다. 최소한의 사람 취급이라는 것도 그저 헐값에 써먹기 좋은 호구를 잡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니, 그 쯤 되면 사람 취급마저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회에서 사람 취급을 해주는 최후의 한계점인 것이다.


다만 이 작품의 주인공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 건 아니라서 그에 따른 업보가 돌아온 것이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다. 확실히 부당한 일을 당한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스스로의 행동으로 인해 불러온 결과라면 그건 이미 예정된 추락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운이 안 좋았다, 불행의 연속이었다, 다른 사람의 훈수 때문이라고 합리화하려 해도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누구인가. 분수에 맞지 않게 참지 못하고 일을 저지른 건 결국 누구인가. 이유 없는 하락은 없다. 모든 것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수난

철문으로 막힌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공간에 한 쪽 손이 쇠파이프와 연결된 수갑으로 묶인 채 고립된 상태인 나. 누군가 금방 올 것이라는 기대를 한 것도 잠깐뿐. 주말이 지나고 평일이 되도 이 곳에 오는 사람은 전혀 없다. 굶주림과 탈수로 한계에 다다랐을 무렵, 회사원으로 보이는 어떤 여자가 철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마침내 누군가에게 발견된다. 그런데 그 여자는 나의 도움요청을 듣고도 경찰에 연락해주지 않고 편의점에서 음식과 물을 사서 가져다주기만 하는데...


시작부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연속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당황스럽기만 하다. 이 세계관에서만 통용되는 특수한 설정이나, 대놓고 비현실적인 괴물이나 판타지 요소 같은 건 없다. 그냥 현실과 크게 다를 것 없다. 그럼에도 실내도 아닌 실외에 해당되는 도시 한복판에서 감금이라니. 이게 말이 되나 싶겠지만 놀랍게도 이 소설에서는 가능하다. 그것도 현실적이라 해도 될 정도로.


억수로 운이 나쁜 구렁텅이에 빠졌다고 할 수 있다. 하필이면 도움을 청한 사람들이 하나 같이 그 모양이니 말이다. 한편으로는 건물과 건물 사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하면 그런 사람들 밖에 없겠다고 본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외지고 어둑어둑한 잊혀진 공간. 알게 모르게 사회에서 버려진 것들이 굴러 들어와 박히기 적당한 곳이다. 이런 곳에 감금된 주인공에게 나타난 사람들의 공통점을 보면 하나 같이 자기 의지가 없는 사람들이다. 잘못된 것에 의지해서 기본적인 상식조차 망각해버린 눈 먼 자.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불만을 그저 더 약한 사람에게 분풀이 하는 것이 전부인 겁쟁이. 삶의 목적을 잃고 절망하다 못해 절망에 먹힌 것이나 다름 없는 실패자. 애초에 멀쩡한 사람이 올만한 곳이 절대 아니었기에 이런 사람들 밖에 만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저 주인공에게 닥친 수난만 봐도 공포인데, 더 소름 돋게 만드는 건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주인공이 만난 인물들이 확실한 동기를 가지고 나타났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모두 암울한 사회의 징그러운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이해가 가능한 현실적인 범주와,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비현실적인 범주로 구분되는 정도다.


코가 높은 텐구와 코가 낮은 돼지라는 종족으로 나누어진 세상. 대대적인 차별 정책 속에서 텐구들은 점차 사회의 구석으로 몰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인 나는 죽은 아내와 딸을 닮은 텐구 모녀를 보고 도움을 주려 한다. 코 수술을 부탁받지만 국가에서 단속하는 불법시술이라 거절하고 대신 최소한의 사람다운 삶을 위한 돈을 쥐어 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에서 벌어지는 텐구 단속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큰 결심을 하게 되는데...


특수한 세계관을 통해 차별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흡사 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가 떠오르는 그런 잔혹한 면을 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상당한 반전을 숨기고 있다. 단순히 일부 요소에 대한 비밀이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뒤집어질 정도로 규모가 크기 때문에 엄청난 충격 그 자체다. 사실 이 작품에서 쓰인 반전은 다른 작품에서도 볼 수 있는 구조긴 하다. 그럼에도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거나 서로 관련 없어 보이던 요소들이 결말에 가서 명확한 연결고리를 가지며 진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냥 단순한 반전하고는 궤가 다르다.


코로 시작해서 코로 끝나는 내용이라 너무나 적절한 제목이라 할 수 있다. 모든 비극은 코에서 시작됐다. 코만 아니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상황이고, 겨우 코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하기에 너무나 끔찍하다. 코가 엄청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요소 같지만 결국은 그냥 코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를 탓하기도 어렵다. 가해자는 가해자대로 질이 나쁜 쓰레기고. 피해자는 피해자대로 괴물이 되어버린 상황이라 그렇다. 인과응보도 뭐도 아니다. 그저 코 때문에 미쳐버린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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