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시대 - 공감 본능은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을 위해 진화하는가
프란스 드 발 지음, 최재천.안재하 옮김 / 김영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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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표지에는 저자 프란스 드 발을 '가장 영향력 있는 영장류학자' '과학계 위대한 지성'으로 표현한 타임과 디스커버의 평가가 작은 글씨로 적혀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아직 익숙한 이름이 아닌 것 같다. 나 역시 저자보다는 '통섭의 학자'으로 유명한 최재천 교수의 이름이 먼저 눈에 들어왔으니...
첫 장을 넘기면 이 책을 옮긴 최재천 교수가 쓴 '공감은 길러지는 게 아니라 무뎌지는 것이다.'라는 제목의 서문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이 책의 메시지를 단 한 줄로 정리하자면 바로 이 문장일 것이다. 

공감은 길러지는 게 아니라 무뎌지는 것이다.

한때 '공감'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유행이라니 우습지만, 사실이다. 힐링, 욜로, 휘게가 유행하듯 - 유전, 진화, IQ, EQ가 유행하듯 '공감 능력'이 주목받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공감 능력'을 키우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관련 실험들이 방송을 타고, '공감'을 키워드로 여러 실용서적들이 출판되던 때. 요즘 '공감'이라는 화두는 그 때만큼의 관심을 받지는 못하는 것 같지만, 최근 있었던 강력 범죄 사건이나 여러 사건 사고들을 접하며 사람들이 '공감 능력의 부재'가 얼마나 공포스러운 상황을 연출하는지 실감하게 된 것 같다.

이 책의 부제는 '공감 본능이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을 위해 진화하는가'이다. 문장만으로는 재미없는 생물학 이론서같은 느낌을 주지만 읽다보면 정말 흥미로워서 사진에 보이듯 인덱스를 마구 붙이게 된다.
참고로 나는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동물농장이나 애완동물 관련 프로그램을 자의로 시청한 경우가 거의 없는 것 같다. 한마디로 동물의 세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랄까.(부연하자면 인간애나 인간에 대한 감정은 충분히 갖고 있다.^^; 인간도 동물에 속하겠지만 그 경계가 나에겐 매우 뚜렷한 편이다.)
이런 사람들이 흔한지, 흔하지 않은지 모르겠으나 동물에게 어떤 애정을 느껴본 것은 극히 최근 들어서이기에, 침팬지의 예를 보며 신기해하며 그 자체에 흥미를 가질만한 부류의 독자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런 나에게 동물의 심리와 행동에 대해 깊이 탐구하는 이 책이 이렇게 흥미롭게 다가오다니... 누가 읽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닐까? ^^

인간 본성에 대한 모든 가정들을 전면적으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너무도 많은 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은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이 인간 사회의 모범이고 자연에 있는 그대로라고 믿고 있지만, 그러한 생각은 단지 선입견을 투영한 것일 뿐이다. 그들은 마술사의 토끼 마술처럼 먼저 자기네들의 선입견을 자연의 모자에 던져 넣은 다음, 자연 속에서 그것을 다시 꺼내 보이며 자신의 생각이 자연에 얼마나 들어맞는 것인지 증거인 양 제시한다. 이것은 우리가 너무도 오랫동안 속아 넘어갔던 속임수이다. 분명히 경쟁도 우리 모습의 일부이지만, 인간은 경쟁만으로는 살 수 없다. - P24

치열하고, 경쟁 지향적인 이 사회에 염증을 느끼면서도 사람들은 욕망과 경쟁이란 인간의 본성이며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가장 적합한 제도라고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자본주의의 종말에 대한 논문을 다룬 책에서 읽고 공감했던 부분인데, 겨우 몇백년 된 체제를 우리는 마치 공기처럼 인간의 존재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 요건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사회나 체제를 지탱하는 것은 개인의 욕망이 아닐 수도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경쟁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 동물의 본성이라는 것... 그 자체에 의문을 갖게 된다.   

사회적 다윈주의는 고든 게코가 말한 '진화 정신'과 다를 바 없다.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자가 그렇지 않는 자들에 의해 발목 잡히고 지체되지 말아야 하는 투쟁으로 삶이 묘사된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19세기에 자연의 법칙을 비즈니스 언어로 옮기며 '적자생종'(종종 다윈이 쓴 말로 오해받는 말)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영국의 정치철학자 허버트 스펜서에 의해 생겨났다 스펜서는 사회 경쟁의 장을 허물고 평등화를 시도하는 이들을 매도했다. 그에게는 '적자'가 '비적자'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 비생산적인 것이었다. 그는 수백만 권이 팔린 두꺼운 책에서 가난한 자들에 대해 "자연의 궁극적인 목적은 가난한 자들을 제거해 그들의 세상을 아예 없애버리고 부자들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국은 이를 경청했다. 비즈니스 세계는 사회적 다윈주의를 완벽하게 수용했다. 앤드루 카네기는 경쟁을 생물학의 법칙이라 부르며 사회적 다윈주의가 인간 종을 발전시켰다고 생각했다. 존 D.록펠러는 심지어 종교와 사회적 다윈주의를 연결해 대형 비즈니스의 성장은 "그저 자연의 법칙과 신의 법칙에서 나온 결과일 뿐이다."라고 결론지었다. 이른바 기독교 우파에서 여전히 볼 수 있는 이런 종교적인 시각으로 인해 두 번째의 중대한 모순이 형성된다. 미국 대부분의 가정집이 갖고 있고 모든 호텔 방에도 하나씩 비치되어 있는 책에서는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연민을 보이라고 우리를 촉구하고 있는데, 사회적 다윈주의자들은 그것을 자연의 흐름을 방해하는 감정일 뿐이라고 비웃는다. 가난은 게으름의 증거이며, 사회적 정의는 약함의 증거다. 가난한 사람들이 그냥 죽어 없어지도록 내버려두면 안 되나? 나는 어떻게 기독교인들이 심각한 인지적 충돌 없이 그토록 무자비한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 같다. - p52

사회적 다윈주의의 모순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하는 두번째 챕터 '다른 다윈주의'는 모든 부분에 밑줄을 긋고 싶을 정도로 인상적인 구절이 많았다. 저자는 자신의 정치관을 유럽과 미국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한다고 표현하며 '정당성을 찾는 모든 이데올로기가 그렇듯 생물학은 이 혼란의 중요한 일부'라고 말한다.

유감스럽게도 스펜서는 같은걸 읽고 전혀 다른 결론을 내렸다. 만약 강한 품종들이 하위 품종들을 희생시키고 진보한다면, 그것은 '사실'일 분만 아니라 '당위'라고 그는 생각했다. 경쟁은 좋은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며 사회 전체에게 이득을 주는 것이었다. 그는 아주 정확히 자연주의적 오류를 적용했다.
이런 스펜서의 생각이 왜 그렇게도 잘 수용되었을까? 내 생각에는 사람들이 겨우 익숙해졌을 뿐인 도덕적 딜레마에서 벗어날 길을 스펜서가 열어줬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부자가 가난한 자를 무시하는 데 정당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귀족 혈통이라는 것만으로 귀족은 아예 다른 '종족'으로 여겨졌다. 서방의 귀족들은 허리를 벌처럼 가느다랗게 조이고, 동방의 귀족들은 손톱을 길게 키워서 육체적 노동에 대한 멸시를 보였다. (중략)
이 모든 것이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바뀌었다. 곤경에 빠진 다른 사람들을 쉽게 묵인할 수 없는 새로운 상류층이 생겨난 것이다. 이 상류층의 많은 이들은 불과 몇 세대 전에 하급 계층에 속했었다. 즉 이들과 하급 계층은 분명히 같은 혈통이었다. 그러니 부를 공유해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그들은 밑에서 일하는 자들을 무시하는 건 당연하며, 뒤돌아보지 않고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는게 흠 잡을 데 없이 명예로운 일이라는 말에 전율했다. 스펜서는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며 그들을 안심시킴으로써 부자들이 느낄 만한 양심의 가책을 말끔히 없애버렸다. - p55

성공을 정당화하는 스펜서의 메시지는 미국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쉽게 수용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에는 다양한 학자, 정치가, 사상가들의 주장이 인용되어 있는데 인간도 동물의 범주에 속한다는 이유로 '성공에 도덕적 책임이 뒤따른다'는 발상에 코웃음을 치고 '자기중심주의는 미덕'이라는 메시지를 전파한 이들에게 저자는 동물의 세계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여러가지 예를 들어 증명한다.

그는 1902년에 출판된 <상호부조론>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이란 개인들이 서로에게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 무리가 험난한 환경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야생말이나 사향소가 늑대 떼의 공격에 맞서 어린 개체를 둘러싸고 보호하는 것처럼 협동은 흔한 것이다. - p57

저자인 프란스 드 발은 '심리학의 용어를 유전자의 진화에 관한 논의에 주입함으로써 생물학자들이 그렇게도 열심히 떼어놓으려고 노력한 한두 가지 단계를 다시 출돌시켜버렸다'며 이기적인 유전자의 비유가 교묘하다고 표현하는데, 그렇기에 책 속에서 저자와 리처드 도킨스와의 만남이 성사되는 부분을 읽으면서는 현장의 긴장감이 느껴지는 듯 했다. ^^;

공정성이란 것은 가진 자와 가진 게 없는 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당연한 말을 읊는 이유는 우리의 공정성은 자기 이익을 넘어서는 것이며, 우리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와 관련된 일이라는 흔한 주장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은 이 이상적인 말에 동의하며, 그에 따른 많은 제도들이 있다. 하지만 공정성이 처음에 이렇게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분명하다. 공정성에 숨어 있는 감정과 욕망은 그 이상적인 말의 반만큼도 고결하지 않다. (중략) 우리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한 공정한 것이 찬성한다. - p251

저자는 '인간은 양극성의 유인원'이라며 인간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유대감의 범위를 넓히자고 말한다
나는 인간의 선량함을 믿는 부류의 사람이고 그렇기에 동물로서의 인간의 기본적인 조건에 '공감'이 포함되어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이 책을 읽기 전이었어도 전적으로 동의했겠지만, '경쟁'이나 '공격'이 아니라 '공감'이라는 단정으로 책이 마무리되었다면 책을 읽고난 후 의구심이 남았을 것 같다.
그런데 '인간에게서 공격성을 없애는 일은 신중하게 다룰 문제'라고 말하며 양극성의 유인원인 우리가 행복하면서도 생산적이기 위해서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기보다 유대감의 범위를 넓힐 것'을 제안하는 저자의 주장에는 조금의 의구심도 없이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너무나 많은 집단들이 살고있는 이 지구에서 '우리'의 범위를 조금씩 넓힌다면 많은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되지 않을까? 

강렬한 인상을 준 책의 구절구절을 다 옮기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좋은 책이었다.
저자의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정독하기를 권해본다.        

만약 내가 신이라면 나는 공감의 범위를 손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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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공부지능 - 3세부터 13세 부모가 꼭 알아야 할 공부 잘하는 머리의 비밀
민성원 지음 / 다산지식하우스(다산북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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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인 두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의 잠재력을 끌어내는데에 도움이 될까 해서 읽어본 책이다.
저자는 '공부 지능'은 타고난 지능(IQ)와는 다른 의미라고 말한다. 공부 지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IQ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SQ=IQ+EQ+@ 라는 것이다. 어찌보면 뻔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할 수 있게 만드는 온갖 이론과 방법들이 등장하기에 어떻게든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게 된다.
교육학이나 교육심리학 등의 분야에 대해 전혀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관련 분야의 기본적인 이론들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법도 하다. 피아제나 매슬로우, 가드너의 다중 지능 등 교육학 관련 이론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어 관련 분야에 입문서로의 역할을 하기에도 좋은 책인 것 같다.  

이런 류의 책을 많이 읽어본 사람들은 제목에서 어떤 내용을 짐작, 기대하며 책장을 넘기게 된다. 나 역시도 그랬다. 그런데 실제 책의 내용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방대하게 넓은 범위를 다루고 있었다.
목차만 해도 벌써 여섯 페이지나 된다.

이 정도 분량과 꼭지를 실었다면 읽는 부모들 입장에서 아이를 키우며 평소 궁금했던 부분들이 몇 개쯤은 걸리기 마련이다. 나 역시 아이들 공부 시키며 궁금했던 질문들이 보여서 첫장부터 읽기 전에 목차의 페이지를 먼저 찾아 읽기도 했다. 그만큼 '집대성'의 느낌을 주는 책이다. 저자가 자신이 가진 지식들을 작정하고 정리해놓은 것 같달까? 적극적인 자세로 이 책을 읽는다면 이 책의 꼭지들 하나하나가 독자들의 호기심을 여러 분야로 확산시키기에 '공부'와 '지능'에 대해 다방면으로 탐구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이렇게 공부하면 아이의 성적이 오른다.'는 식의 간단하고 구체적인 해법을 기대하며 책장을 넘기는 독자라면 다소 실망을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교육에 대한 저자의 모든 관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의 학습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면 지능이 어떤 식으로 계달되고 성장기 아이들의 뇌 안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며, 관련 분야 비전공자가 읽기에는 교육 분야의 상식을 높이기에 유용한 교양서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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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남자 - 2017 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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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황정은 씨가 이슈가 되었을 때만 해도, 나는 국내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아서 김영하, 김중혁, 김연수 같이 불혹을 진작에 넘긴 분들을 여전히 '젊은 작가'로 인식하고 있었다. 불과 몇년 전까지도... 오래전(대체 언제적?ㅋ) 귀걸이와 염색의 파격을 보여준 김영하 작가의 이미지를 기억 속에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젊은 작가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에도 최근에서야 기억 속 김영하 씨의 시각 이미지를 교체한 것 같다. 재기발랄해 보였던 과거의 사진을 '알쓸신잡'에서의 적당히 점잖으면서 박식한 중년의 작가의 모습으로... ^^;

황정은 씨의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백의 그림자'였고, 이후 '파씨의 입문' '야만적인 앨리스 씨' 등을 찾아읽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주변에 황정은 씨 작품에 대한 추천이 많고 <빨간 책방>의 진행자 이동진 씨가 거의 찬양 수준으로 황정은 씨의 팬임을 드러내기에 순전히 호기심으로 책장을 넘겼는데, 어쩐지 좀처럼 몰입이 안되었다. 따옴표가 없는 대화, 현실적이지 못한 인물들의 말투같은 것이 적응이 안되어 그 세계에 푹 빠지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 조금씩 국내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찾아 읽으면서 다양한 시도와 실험들을 접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 번역본보다 고전보다 장편보다 젊은 작가들의 중단편과 소설집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문학상 수상작품집이다.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집>이야말로 도대체 요즘 젊은 작가는 누구?라는 의문을 가진 나에게 안내서 같은 책이었고, 요며칠 읽은 '웃는 남자'는 <제 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이다. 이러한 수상 작품집들은 한국 문학을 널리 알리자는 상의 취지에 따라 출간 후 1년 동안은 5,500원으로 판매된다.        

다시 황정은 씨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황정은 씨의 소설에 계속 몰입을 하지 못했더라면 아무리 저렴한 가격에 좋은 소설들을 읽을 수 있다고 해도 이 책을 읽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세번째 소설집인 <아무도 아닌>을 단숨에 읽으며 그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기에 이 수상집도 기대감을 갖고 읽게 되었다. <아무도 아닌>에도 '웃는 남자'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는데, 이 소설은 <파씨의 입문>에 실린 '디디의 우산'과 <아무도 아닌>에 실린 '웃는 남자'의 후속작이라고 한다. - 작품 말미에 표시되어 있음.

함께 살던 연인 dd를 사고로 잃고 방황하는 20대 청년인 d와 세운상가에서 40년 넘게 음향기기를 수리하는 일을 하고 있는 60대 남성 여소녀가 주인공인 이 소설에는, 배경이 된 세운상가 - 낡은 회색빛 건물의 스산함이 담겨있는 것 같다. d가 처음 살았던 반지하 집의 눅눅함이나 뚫린 작은 창으로 들려오는 이웃 아주머니들의 소음, 텅 비어가는 상가의 풍경과 그가 발견한(만나게 되는) 진공관... 인물들이 숨쉬는 공간의 빛깔과 웅웅거리는 소리가 촘촘한 언어로 묘사되어 그 공기를 함께 마시고 있는 것 같은 착각과 함께 조금씩 음울한 기운에 압도된다.

너무 쉽게 깨지거나 터질 수 있는 사물, 그 진공을 통과한 소리들에도 잡음이 섞여 있었다. d는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얇은 유리껍질 속 진공을 들여다보며 수일 전 박조배와 머물렀던 공간을 생각했다. 그 진공을, 그것은 넓고 어둡고 고요하게 정지해 있었으나 이 작고 사소한 진공은 흐르는 빛과 신호로 채워져 있었다. d는 다시,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느꼈던 진공을, 문득 흐름이 사라진 그 공간과 그 너머, 거기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과 d에게는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다른 장소, 다른 삶, 다른 죽음을 겪은 사람들. 그들은 연인을 잃었고 나도 연인을 잃었다. 그것이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d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나, 하찮음에 하찮음에. - p101

김숨 작가의 '이혼'이나 이기호 작가의 '최미진은 어디로', 처음부터 끝까지 줄바꿈 없이 한단락으로 이루어진 편혜영 작가의 '개의 밤'도 흥미로웠다.

다만 구성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작품을 읽기 전에 첫 장의 심사평을 먼저 만나게 된다는 것과 별도의 평론이 없다는 점이었다. 심사평을 뒷부분에 배치하는 것이 독자들이 소설을 자신의 관점으로 자유롭고 편안하게 읽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또한 평론을 즐겨읽지 않음에도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수상집>에 작품에 대한 평론이 각각 실려있는 것을 읽으며 작품을 읽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를 느꼈던 사람으로서, 각 작품에 대한 평론이 아니더라도 수상작품들에 대한 전체적인 평론이 적절한 분량으로 실렸다면 더욱 심도깊게 작품들을 이해하고 작가들의 세계에 다가서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다.
구성에 작은 아쉬움은 있었지만, 흥미롭게 읽었기에 내년에도 관심을 갖고 찾아읽게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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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과 사랑의 대화
김형석 지음 / 김영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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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을 좋아해 가장 좋아하는 책을 고르라면 소설보다는 읽고 읽고 또 읽으며 인생의 교과서로 삼고 있는 몇 권의 수필집을 떠올린다. 동세대를 살아가는 젊은 작가들의 수필에는 공감과 함께 그 재기발랄함과 섬세한 감수성에 감탄을 하고, 삶을 훨씬 먼저 살아낸 원로 작가들의 에세이에서는 인생의 혜안에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얻게된다. 이 책은 무려 1961년에 출판되어 기록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1세대 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에세이집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이기에 이번에 개정판이 출판되고 나서야 이런 책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는데, 제목만 보아서는 종교/영성 분야의 에세이일 것이라 짐작했다. 좀 고리타분한 책이 아닐까,하는 선입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서문을 읽으면서 바로 그런 선입견은 깨지고 글이 풍기는 향기에 자연스럽게 취하게되었다.

'영원과 사랑의 대화'라는 제목을 택한 것은 이 책의 전체적인 주제가 인생이라는 강의 저편인 영원과, 이편의 끝없는 애모심의 대화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을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고독하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이 책도 고독한 사람의 또 하나의 벗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 초판 서문 중

이 책의 표지와 본문에는 이숙자 님의 삽화가 실려있어 글의 분위기를 잘 살리면서도 글에 자연스럽게 몰입이 되게 한다.

1. 생활의 좌표
2. 행복의 조건
3. 존재의 의미는 사랑이다.
4. 어느 우인의 이야기들
5. 역사가 찾는 사람들
6. 영원의 그리움
7. 어느 구도자의 일기 - 고독과 사랑의 장

지인 S씨의 일기를 소개한 맨 마지막 챕터(지인의 사적인 기록의 공개인데 예상을 뒤엎고 정말 재미있다.ㅋ)를 제외하면 모두 6개 챕터로 각 챕터별로 예닐곱편의 글이 실려있다. 세네장 분량의 한 편 한 편의 글을 읽다보면 소박한 문장에 담긴 메시지들이 결코 가볍지 않아 여운이 오래 남는다. 책을 가까이 하지 않았던 사람들 누구라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문체로 독자로 하여금 조금씩 철학적인 문제들에 다가서게 한다. 무겁고 진지하고 어려운 글이 아니기에 오래 전에 출판되었던 책이라한들 요즘 사람들이 읽기에 조금도 불편함이 없을 것 같다.
원로 작가의 어떤 책을 읽으며 '꼰대'라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훌륭한 원로들이 우리 사회에 아직 이렇게 활동하고 계시며, 끝까지 젊은이들의 존경을 받고 돌아가신 분들도 많이 있지만... 나이가 들 수록 선험자로서 자신의 삶을 기준 삼아 아래 세대에게 강요에 가까운 조언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지라, 나역시 한살 한살 먹을 수록 조심하게 되는 부분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지않으면, 기성세대가 꼰대가되는 것은 순식간인 것 같다. ^^; 그에 비해 훌륭한 원로의 삶은 그 자체가 아래 세대에게 귀감이 되어, 보이지않게 많은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인간의 일생이란 자라는 순서와 더불어 그때그때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마치 초목이 자라 가지가 퍼지고, 잎이 성한 뒤에는 꽃과 열매를 맺는 것과도 같으며, 동물들이 자라 번식하고 늙으면 죽는 것과도 비슷한 과정일지 모른다.
소년기는 소년기다운 자람과 과정이 있어야 하며, 청년기에는 청년기로서의 할 바와 뜻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물론 특출하게 지능이 발달한 사람, 놀라울 정도로 통솔력이 있는 사람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건전하고 뜻있게 자라는 사람은 언제나 스스로의 일생을 때를 따라 꾸준히 보람 있는 일로 메꾸어가면서 그 장년기를 성공과 영광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한 정상적이며 건전한 발전 과정을 벗어난 특별한 사람들이 행복보다 불행을 초래하는 경우가 자주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인간이란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만도 아니며,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개인주의적인 생활을 한다해도 어디선가는 다른 사람을 도와가며 살게 되어 있으며, 아무리 열성적으로 사람에게 봉사한다 하더라도 자기를 부정하거나 무로 돌릴 수는 없는 법이다. 100퍼센트의 이기주의자가 있을 수 없으며, 그와 정반대되는 봉사주의자도 있을 수 없다. 확실히 이기주의는 종국에 이르러서는 사회적인 파멸을 초래하고야 만다. 그렇다고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타인을 위하여 자신들을 완전히 희생시키며 부정할 수도 없다. 누구든지 희생을 위한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또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사는 것일까? 자신을 위함인가, 타인을 위함인가? 실제로 인간의 삶은 자기를 위하는 것도 아니며, 타인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인간은 언제나 보다 높은 가치를 이루기 위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보다 고귀한 가치가 나에게 있다고 믿게 되면 천만인이 나를 반대할지라도 우리는 자신의 입장과 주장을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보다 영원한 가치가 상대방에게 있다고 인정되면 그 가치가 성취되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키게 된다.

진솔한 문장들에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 삶의 목적과 가치에 대한 통찰과 생에 대한 긍정이 담겨있어 책을 읽고나면 충만한 기분이 느껴진다. 요즘 우리는 '가치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물질만능, 배금주의, 경쟁과 속도, 성과, 권력... 드러나는 것들을 향해 질주하느라 보이지 않는 가치들은 무시되는 현실인 것이다. 그런 사회 분위기에 숨막혀하면서도 따라갈 수 밖에 없는 일상을 살면서 이 글을 읽고있자니 마음이 탁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양심이란 끝없는 가치를 사랑하는 것이며, 이성은 가치의 창조자인가 하면, 참다운 자유는 가치에 대한 신념과 용기가 없이는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들의 삶이란 꾸준한 가치의 충족을 통하여 발전하는 것이며, 인간들의 역사 그 자체가 무궁한 가치의 순례라고 보아야 하겠다.(중략) 우리의 생은 항상 오늘의 가치를 지양함으로써 내일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다. 지금의 가치를 지양시켜 영구한 가치를 탐구하는 과정을 끝없이 계속하는 도중에 문화는 향상되고 역사는 발전하며 삶의 의의는 커지는 것이다. 만일 이 수고와 노력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의 정신과 도덕은 어떻게 되었을까?

진리에 대한 거창한 담론이 아닌 노학자의 소소한 일상의 기록을 통해 삶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과 가치기준, 정신과 도덕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시대를 살아하는 피로한 독자들에게 뜻깊은 휴식이 될만한 책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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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엄마 무관심한 아빠 - 오은영 박사의 불안감 없는 육아 동지 솔루션
오은영 지음 / 김영사 / 201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2011년 출간된 책의 개정판인 이 책은 아이의 양육과정에서 부모들이 힘들어하는 원인으로 '불안'을 꼽는다.
서문에서 저자는 전문가인 자신도 양육에 불안과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밝히며 '왜 우리는 양육이 불안하고 두려울까?'라는 질문을 던지는데,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불안을 느끼는 이유와 상황별 해법을 찾아보고 생활 전반에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과 행복한 자녀로 키우는 방법에 대해 탐색해보는 과정을 통해 이 책을 읽는 많은 부모들은 잠시나마 불안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또래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대체로 '걱정이 많은 엄마와 무관심한 아빠'가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가정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집 역시 마찬가지이다. 임신과 출산, 육아에 이르기까지 엄마인 나는 항상 걱정을 안고 살았던 것 같고, 아빠인 남편에게 털어놓으면 '별 것 아닌 일'이 되어버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어째서 같은 문제를 저렇게 태평하게 받아들이는지, 야속하기도 하고 화도 나고 안달박달하는 스스로가 짜증나기도 했는데 이 책에서 저자는 아빠의 '무관심'도 일종의 불안이라고 말한다. '부정적인 면을 감당할 수 없어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문제를 덮어버리는 모습(p31)'이라는 것이다.

아빠들 역시 불안하다. 하지만 아빠들은 불안과 직면하려고 하지 않는다. 불안에 직면하면 '그래, 이걸 어떻게 할까?'가 아니라 '어떻게든 되겠지'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밖으로 말하는 것을 무책임하다고 믿어 "괜찮아, 아이들은 원래 그렇게 크는 거야."라고 말해버린다. 그런데 그 말은 편안함이나 자기 확신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불안을 상쇄해버리기 위한 무조건적인 낙관적 표현인 경우가 많다. 본인이 이 주제를 걱정하고, 그렇게 되면 더 불안해지기 때문에 대범한 척, 낙관적인 척하면서 덮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아빠의 '괜찮아, 잘 클거야'라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해석의 본질에는 불안이 숨어 있다. 하지만 오해하지는 말이 바란다. 이런 아빠들의 말이나 행동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다. 본인도 인식하지 못하는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육아의 과정이 필름처럼 눈앞을 스쳐가는 기분이 들었다. 별일 아닌 것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던 지난 날을 돌아보니 지금의 고민들도 조금은 가볍게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생각뿐이다. 마음처럼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나의 경우 해외에서 아이를 키운 기간도 상당한데, 한국을 벗어나면 그 불안이 확 줄어들어서 '돌아가도 절대 휩쓸리지 말아야지.' 마음 먹곤했다. 하지만 돌아오면 금세 도루묵...
오은영 박사는 한국 엄마들이 아이에 대한 불안이 유난하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엄마들은 아이를 위해 희생해야만 자신이 존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엄마들에게 자식은 하늘로부터 온, 잘 지켜내야 할 존귀한 존재이므로 자식에게 결함이 있으면 자신이 보양을 잘 못하고 헌신을 잘 못해서인 것 같아 죄책감을 느낀다.(p41)

정말 공감하게되는 대목이다. 지금 내 또래 여성들이 겪고 있는 이중고, 워킹맘으로 살면서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이유이다. 전업 주부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아도 찾아야 하고 아이도 잘 키워야한다는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녀들은 해답을 구하기 위해 인터넷 속에서 자신과 같은 고민을 가진 동지를 찾아 헤맨다. 그러니 옛날 엄마들보다 더 불안할 수 밖에. (p45) 요즘 엄마들이 방대한 정보에 노출되면서 더 많은 걱정과 불안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집에서 내 자식 하나만 바라보고 키우다보면 어제보다 발전한 아이의 모습에 만족하기가 쉽다. 첫째를 낳았을 때, 낳기 전날까지 출근을 했었는데 바쁘게 지내다보니 다른 임산부들이 출산 준비를 어떻게 했는지 등 타인과 비교할 일이 전혀 없었다. 예비 엄마라면 다들 가입한다는 **맘 사이트같은 곳도 몰랐고, 서점에서 임신 출산 관련 서적을 사 간단히 적힌 목록을 보고 출산 가방을 싸두었을 뿐이다. 그러니 출산 휴가 기간동안 내가 새롭게 경험한 세계는 그야말로 놀라운 지경이었다. 나보다 세달 먼저 출산한 친척의 집에 구비된 각종 교구들과 화려한 육아도구(?)들에 쓰나미처럼(달리 표현할 말이 없이 당시 내 심정이 그랬다.) 죄책감이 몰려웠다. 엄마가 직접 만든 모빌 하나에 좋다고 웃고있는 아이에게 어찌나 미안했던지... 모유 수유를 하면서, 수면 습관을 들이면서 아이는 그 모든 면에서 아주 잘 적응해갔고 충분히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었음에도 확신없이 불안해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옛날에는 틀린 방법을 적용하더라도 자신의 육아 방식에 대해 적어도 '확신'이 있었다. 예를 들어, 회초리로 아이를 때리면서도 '내가 이렇게 해서라도 이 아이를 잘 가르쳐야 된다'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엄마들은 옛날보다 훨씬 많이 배우고, 수많은 책과 정보를 통해 더 나은 육아 기술을 알고 또 사용하고 있지만 자신의 육아 방식에 대한 확신이 없다. 아이를 대하는 매 순간 걱정하고 불안해한다. 방법은 옳지만 확신이 없는 육아를 하는 요즘 엄마들과, 방법은 잘못됐지만 확신에 찬 육아를 했던 옛날 엄마들은 어떤 결과의 차이를 낳을까? 요즘 엄마들은 육아 스트레스나 우울증을 많이 겪고 있고, 요즘 아이들 또한 옛날 아이들보다 우울증이나 스트레스가 많아졌다.

다음은 아주 인상적이었던 대목이다. 저자는 자아의 기능을 깨우기 위해 자신을 자주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요즘 엄마들은 왜 그렇게 정체성의 통합을 힘들어하는 것일까? 이런 엄마들의 경우 대부분은 자아의 균형이 깨져 있는 경우가 많다. 쉽게 말해 뭔가 채워지지 않는 욕구와 현실이 충돌할 때 자아가 균형을 맞추는 기능을 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실적으로 나는 이렇고 상황은 이렇고 이것은 할 수 있고 이것은 할 수 없고를 인정할 수 있도록 자아가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 조율이 잘 되지 않는다. 본능적인 욕구와 현실의 조율 이것이 자아의 기능이다. 이것이 안 되면 정말 괴롭다. 보통 정체성 통합이 잘 안 되는 엄마들은 역할이 바뀌거나 추가되는 것에 굉장히 불안해한다. (중략) 사실 자아의 조절 기능이 좋을 경우, 역할이 바뀌거나 추가될 때 자연스럽게 자기 증력의 재배치가 일어난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나 노동력에 맞춰 어디에, 어느 정도의 에너지를 쏘당야 할지에 대한 배분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잘 안되는 것이 바로 정체성의 혼란이다.

불안, 양육 스트레스, 성인 애착 유형 등을 체크해보면서 스스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면서 문제를 인식하고 적절한 해법을 찾을 수 있도록 한 구성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어떤 문제에 대해 아빠의 입장과 엄마의 입장을 비교해 제시해 공감을 자아냈는데, 배우자를 좀 더 이해하고 육아 동반자로 서로 협력하는 데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만한 내용이 많아 유익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는 끊임없이 자신의 어린시절을 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육아란 자녀와 함께 부모들을 성장하게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아이를 키우며 내 부모를 이해하거나 내 어린시절의 결핍을 채워가고 상처를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내 상처를 치유해가고...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각'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정체성에 대한 자각, 무의식 속에 감춰져있는 깊숙한 내면에 대한 자각, 불안에 대한 자각... '불안을 자각하지 않으면 대물림된다.'는 저자의 말을 마음에 새겨두고 가치의 우선순위를 정해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식으로 생각을 정리한다면 좀 더 육아가 수월해지고 일상이 보다 행복하고 만족스러워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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