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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 - 공감 본능은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을 위해 진화하는가
프란스 드 발 지음, 최재천.안재하 옮김 / 김영사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표지에는 저자 프란스 드 발을 '가장 영향력 있는 영장류학자' '과학계 위대한 지성'으로 표현한 타임과 디스커버의 평가가 작은 글씨로 적혀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아직 익숙한 이름이 아닌 것 같다. 나 역시 저자보다는 '통섭의 학자'으로 유명한 최재천 교수의 이름이 먼저 눈에 들어왔으니...
첫 장을 넘기면 이 책을 옮긴 최재천 교수가 쓴 '공감은 길러지는 게 아니라 무뎌지는 것이다.'라는 제목의 서문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이 책의 메시지를 단 한 줄로 정리하자면 바로 이 문장일 것이다.
한때 '공감'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유행이라니 우습지만, 사실이다. 힐링, 욜로, 휘게가 유행하듯 - 유전, 진화, IQ, EQ가 유행하듯 '공감 능력'이 주목받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공감 능력'을 키우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관련 실험들이 방송을 타고, '공감'을 키워드로 여러 실용서적들이 출판되던 때. 요즘 '공감'이라는 화두는 그 때만큼의 관심을 받지는 못하는 것 같지만, 최근 있었던 강력 범죄 사건이나 여러 사건 사고들을 접하며 사람들이 '공감 능력의 부재'가 얼마나 공포스러운 상황을 연출하는지 실감하게 된 것 같다.
이 책의 부제는 '공감 본능이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을 위해 진화하는가'이다. 문장만으로는 재미없는 생물학 이론서같은 느낌을 주지만 읽다보면 정말 흥미로워서 사진에 보이듯 인덱스를 마구 붙이게 된다.
참고로 나는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동물농장이나 애완동물 관련 프로그램을 자의로 시청한 경우가 거의 없는 것 같다. 한마디로 동물의 세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랄까.(부연하자면 인간애나 인간에 대한 감정은 충분히 갖고 있다.^^; 인간도 동물에 속하겠지만 그 경계가 나에겐 매우 뚜렷한 편이다.)
이런 사람들이 흔한지, 흔하지 않은지 모르겠으나 동물에게 어떤 애정을 느껴본 것은 극히 최근 들어서이기에, 침팬지의 예를 보며 신기해하며 그 자체에 흥미를 가질만한 부류의 독자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런 나에게 동물의 심리와 행동에 대해 깊이 탐구하는 이 책이 이렇게 흥미롭게 다가오다니... 누가 읽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닐까? ^^
인간 본성에 대한 모든 가정들을 전면적으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너무도 많은 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은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이 인간 사회의 모범이고 자연에 있는 그대로라고 믿고 있지만, 그러한 생각은 단지 선입견을 투영한 것일 뿐이다. 그들은 마술사의 토끼 마술처럼 먼저 자기네들의 선입견을 자연의 모자에 던져 넣은 다음, 자연 속에서 그것을 다시 꺼내 보이며 자신의 생각이 자연에 얼마나 들어맞는 것인지 증거인 양 제시한다. 이것은 우리가 너무도 오랫동안 속아 넘어갔던 속임수이다. 분명히 경쟁도 우리 모습의 일부이지만, 인간은 경쟁만으로는 살 수 없다. - P24
치열하고, 경쟁 지향적인 이 사회에 염증을 느끼면서도 사람들은 욕망과 경쟁이란 인간의 본성이며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가장 적합한 제도라고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자본주의의 종말에 대한 논문을 다룬 책에서 읽고 공감했던 부분인데, 겨우 몇백년 된 체제를 우리는 마치 공기처럼 인간의 존재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 요건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사회나 체제를 지탱하는 것은 개인의 욕망이 아닐 수도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경쟁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 동물의 본성이라는 것... 그 자체에 의문을 갖게 된다.
사회적 다윈주의는 고든 게코가 말한 '진화 정신'과 다를 바 없다.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자가 그렇지 않는 자들에 의해 발목 잡히고 지체되지 말아야 하는 투쟁으로 삶이 묘사된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19세기에 자연의 법칙을 비즈니스 언어로 옮기며 '적자생종'(종종 다윈이 쓴 말로 오해받는 말)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영국의 정치철학자 허버트 스펜서에 의해 생겨났다 스펜서는 사회 경쟁의 장을 허물고 평등화를 시도하는 이들을 매도했다. 그에게는 '적자'가 '비적자'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 비생산적인 것이었다. 그는 수백만 권이 팔린 두꺼운 책에서 가난한 자들에 대해 "자연의 궁극적인 목적은 가난한 자들을 제거해 그들의 세상을 아예 없애버리고 부자들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국은 이를 경청했다. 비즈니스 세계는 사회적 다윈주의를 완벽하게 수용했다. 앤드루 카네기는 경쟁을 생물학의 법칙이라 부르며 사회적 다윈주의가 인간 종을 발전시켰다고 생각했다. 존 D.록펠러는 심지어 종교와 사회적 다윈주의를 연결해 대형 비즈니스의 성장은 "그저 자연의 법칙과 신의 법칙에서 나온 결과일 뿐이다."라고 결론지었다. 이른바 기독교 우파에서 여전히 볼 수 있는 이런 종교적인 시각으로 인해 두 번째의 중대한 모순이 형성된다. 미국 대부분의 가정집이 갖고 있고 모든 호텔 방에도 하나씩 비치되어 있는 책에서는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연민을 보이라고 우리를 촉구하고 있는데, 사회적 다윈주의자들은 그것을 자연의 흐름을 방해하는 감정일 뿐이라고 비웃는다. 가난은 게으름의 증거이며, 사회적 정의는 약함의 증거다. 가난한 사람들이 그냥 죽어 없어지도록 내버려두면 안 되나? 나는 어떻게 기독교인들이 심각한 인지적 충돌 없이 그토록 무자비한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 같다. - p52
사회적 다윈주의의 모순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하는 두번째 챕터 '다른 다윈주의'는 모든 부분에 밑줄을 긋고 싶을 정도로 인상적인 구절이 많았다. 저자는 자신의 정치관을 유럽과 미국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한다고 표현하며 '정당성을 찾는 모든 이데올로기가 그렇듯 생물학은 이 혼란의 중요한 일부'라고 말한다.
유감스럽게도 스펜서는 같은걸 읽고 전혀 다른 결론을 내렸다. 만약 강한 품종들이 하위 품종들을 희생시키고 진보한다면, 그것은 '사실'일 분만 아니라 '당위'라고 그는 생각했다. 경쟁은 좋은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며 사회 전체에게 이득을 주는 것이었다. 그는 아주 정확히 자연주의적 오류를 적용했다.
이런 스펜서의 생각이 왜 그렇게도 잘 수용되었을까? 내 생각에는 사람들이 겨우 익숙해졌을 뿐인 도덕적 딜레마에서 벗어날 길을 스펜서가 열어줬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부자가 가난한 자를 무시하는 데 정당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귀족 혈통이라는 것만으로 귀족은 아예 다른 '종족'으로 여겨졌다. 서방의 귀족들은 허리를 벌처럼 가느다랗게 조이고, 동방의 귀족들은 손톱을 길게 키워서 육체적 노동에 대한 멸시를 보였다. (중략)
이 모든 것이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바뀌었다. 곤경에 빠진 다른 사람들을 쉽게 묵인할 수 없는 새로운 상류층이 생겨난 것이다. 이 상류층의 많은 이들은 불과 몇 세대 전에 하급 계층에 속했었다. 즉 이들과 하급 계층은 분명히 같은 혈통이었다. 그러니 부를 공유해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그들은 밑에서 일하는 자들을 무시하는 건 당연하며, 뒤돌아보지 않고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는게 흠 잡을 데 없이 명예로운 일이라는 말에 전율했다. 스펜서는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며 그들을 안심시킴으로써 부자들이 느낄 만한 양심의 가책을 말끔히 없애버렸다. - p55
성공을 정당화하는 스펜서의 메시지는 미국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쉽게 수용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에는 다양한 학자, 정치가, 사상가들의 주장이 인용되어 있는데 인간도 동물의 범주에 속한다는 이유로 '성공에 도덕적 책임이 뒤따른다'는 발상에 코웃음을 치고 '자기중심주의는 미덕'이라는 메시지를 전파한 이들에게 저자는 동물의 세계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여러가지 예를 들어 증명한다.
그는 1902년에 출판된 <상호부조론>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이란 개인들이 서로에게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 무리가 험난한 환경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야생말이나 사향소가 늑대 떼의 공격에 맞서 어린 개체를 둘러싸고 보호하는 것처럼 협동은 흔한 것이다. - p57
저자인 프란스 드 발은 '심리학의 용어를 유전자의 진화에 관한 논의에 주입함으로써 생물학자들이 그렇게도 열심히 떼어놓으려고 노력한 한두 가지 단계를 다시 출돌시켜버렸다'며 이기적인 유전자의 비유가 교묘하다고 표현하는데, 그렇기에 책 속에서 저자와 리처드 도킨스와의 만남이 성사되는 부분을 읽으면서는 현장의 긴장감이 느껴지는 듯 했다. ^^;
공정성이란 것은 가진 자와 가진 게 없는 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당연한 말을 읊는 이유는 우리의 공정성은 자기 이익을 넘어서는 것이며, 우리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와 관련된 일이라는 흔한 주장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은 이 이상적인 말에 동의하며, 그에 따른 많은 제도들이 있다. 하지만 공정성이 처음에 이렇게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분명하다. 공정성에 숨어 있는 감정과 욕망은 그 이상적인 말의 반만큼도 고결하지 않다. (중략) 우리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한 공정한 것이 찬성한다. - p251
저자는 '인간은 양극성의 유인원'이라며 인간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유대감의 범위를 넓히자고 말한다.
나는 인간의 선량함을 믿는 부류의 사람이고 그렇기에 동물로서의 인간의 기본적인 조건에 '공감'이 포함되어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이 책을 읽기 전이었어도 전적으로 동의했겠지만, '경쟁'이나 '공격'이 아니라 '공감'이라는 단정으로 책이 마무리되었다면 책을 읽고난 후 의구심이 남았을 것 같다.
그런데 '인간에게서 공격성을 없애는 일은 신중하게 다룰 문제'라고 말하며 양극성의 유인원인 우리가 행복하면서도 생산적이기 위해서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기보다 유대감의 범위를 넓힐 것'을 제안하는 저자의 주장에는 조금의 의구심도 없이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너무나 많은 집단들이 살고있는 이 지구에서 '우리'의 범위를 조금씩 넓힌다면 많은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되지 않을까?
강렬한 인상을 준 책의 구절구절을 다 옮기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좋은 책이었다.
저자의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정독하기를 권해본다.
만약 내가 신이라면 나는 공감의 범위를 손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