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을 좋아해 가장 좋아하는 책을 고르라면 소설보다는 읽고 읽고 또 읽으며 인생의 교과서로 삼고 있는 몇 권의 수필집을 떠올린다. 동세대를 살아가는 젊은 작가들의 수필에는 공감과 함께 그 재기발랄함과 섬세한 감수성에 감탄을 하고, 삶을 훨씬 먼저 살아낸 원로 작가들의 에세이에서는 인생의 혜안에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얻게된다. 이 책은 무려 1961년에 출판되어 기록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1세대 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에세이집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이기에 이번에 개정판이 출판되고 나서야 이런 책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는데, 제목만 보아서는 종교/영성 분야의 에세이일 것이라 짐작했다. 좀 고리타분한 책이 아닐까,하는 선입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서문을 읽으면서 바로 그런 선입견은 깨지고 글이 풍기는 향기에 자연스럽게 취하게되었다.
'영원과 사랑의 대화'라는 제목을 택한 것은 이 책의 전체적인 주제가 인생이라는 강의 저편인 영원과, 이편의 끝없는 애모심의 대화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을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고독하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이 책도 고독한 사람의 또 하나의 벗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 초판 서문 중
이 책의 표지와 본문에는 이숙자 님의 삽화가 실려있어 글의 분위기를 잘 살리면서도 글에 자연스럽게 몰입이 되게 한다. 1. 생활의 좌표2. 행복의 조건3. 존재의 의미는 사랑이다.4. 어느 우인의 이야기들5. 역사가 찾는 사람들6. 영원의 그리움7. 어느 구도자의 일기 - 고독과 사랑의 장지인 S씨의 일기를 소개한 맨 마지막 챕터(지인의 사적인 기록의 공개인데 예상을 뒤엎고 정말 재미있다.ㅋ)를 제외하면 모두 6개 챕터로 각 챕터별로 예닐곱편의 글이 실려있다. 세네장 분량의 한 편 한 편의 글을 읽다보면 소박한 문장에 담긴 메시지들이 결코 가볍지 않아 여운이 오래 남는다. 책을 가까이 하지 않았던 사람들 누구라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문체로 독자로 하여금 조금씩 철학적인 문제들에 다가서게 한다. 무겁고 진지하고 어려운 글이 아니기에 오래 전에 출판되었던 책이라한들 요즘 사람들이 읽기에 조금도 불편함이 없을 것 같다. 원로 작가의 어떤 책을 읽으며 '꼰대'라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훌륭한 원로들이 우리 사회에 아직 이렇게 활동하고 계시며, 끝까지 젊은이들의 존경을 받고 돌아가신 분들도 많이 있지만... 나이가 들 수록 선험자로서 자신의 삶을 기준 삼아 아래 세대에게 강요에 가까운 조언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지라, 나역시 한살 한살 먹을 수록 조심하게 되는 부분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지않으면, 기성세대가 꼰대가되는 것은 순식간인 것 같다. ^^; 그에 비해 훌륭한 원로의 삶은 그 자체가 아래 세대에게 귀감이 되어, 보이지않게 많은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인간의 일생이란 자라는 순서와 더불어 그때그때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마치 초목이 자라 가지가 퍼지고, 잎이 성한 뒤에는 꽃과 열매를 맺는 것과도 같으며, 동물들이 자라 번식하고 늙으면 죽는 것과도 비슷한 과정일지 모른다. 소년기는 소년기다운 자람과 과정이 있어야 하며, 청년기에는 청년기로서의 할 바와 뜻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물론 특출하게 지능이 발달한 사람, 놀라울 정도로 통솔력이 있는 사람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건전하고 뜻있게 자라는 사람은 언제나 스스로의 일생을 때를 따라 꾸준히 보람 있는 일로 메꾸어가면서 그 장년기를 성공과 영광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한 정상적이며 건전한 발전 과정을 벗어난 특별한 사람들이 행복보다 불행을 초래하는 경우가 자주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인간이란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만도 아니며,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개인주의적인 생활을 한다해도 어디선가는 다른 사람을 도와가며 살게 되어 있으며, 아무리 열성적으로 사람에게 봉사한다 하더라도 자기를 부정하거나 무로 돌릴 수는 없는 법이다. 100퍼센트의 이기주의자가 있을 수 없으며, 그와 정반대되는 봉사주의자도 있을 수 없다. 확실히 이기주의는 종국에 이르러서는 사회적인 파멸을 초래하고야 만다. 그렇다고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타인을 위하여 자신들을 완전히 희생시키며 부정할 수도 없다. 누구든지 희생을 위한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또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사는 것일까? 자신을 위함인가, 타인을 위함인가? 실제로 인간의 삶은 자기를 위하는 것도 아니며, 타인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인간은 언제나 보다 높은 가치를 이루기 위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보다 고귀한 가치가 나에게 있다고 믿게 되면 천만인이 나를 반대할지라도 우리는 자신의 입장과 주장을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보다 영원한 가치가 상대방에게 있다고 인정되면 그 가치가 성취되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키게 된다.
진솔한 문장들에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 삶의 목적과 가치에 대한 통찰과 생에 대한 긍정이 담겨있어 책을 읽고나면 충만한 기분이 느껴진다. 요즘 우리는 '가치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물질만능, 배금주의, 경쟁과 속도, 성과, 권력... 드러나는 것들을 향해 질주하느라 보이지 않는 가치들은 무시되는 현실인 것이다. 그런 사회 분위기에 숨막혀하면서도 따라갈 수 밖에 없는 일상을 살면서 이 글을 읽고있자니 마음이 탁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양심이란 끝없는 가치를 사랑하는 것이며, 이성은 가치의 창조자인가 하면, 참다운 자유는 가치에 대한 신념과 용기가 없이는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들의 삶이란 꾸준한 가치의 충족을 통하여 발전하는 것이며, 인간들의 역사 그 자체가 무궁한 가치의 순례라고 보아야 하겠다.(중략) 우리의 생은 항상 오늘의 가치를 지양함으로써 내일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다. 지금의 가치를 지양시켜 영구한 가치를 탐구하는 과정을 끝없이 계속하는 도중에 문화는 향상되고 역사는 발전하며 삶의 의의는 커지는 것이다. 만일 이 수고와 노력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의 정신과 도덕은 어떻게 되었을까?
진리에 대한 거창한 담론이 아닌 노학자의 소소한 일상의 기록을 통해 삶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과 가치기준, 정신과 도덕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시대를 살아하는 피로한 독자들에게 뜻깊은 휴식이 될만한 책이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