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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남자 - 2017 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7월
평점 :
품절
작가 황정은 씨가 이슈가 되었을 때만 해도, 나는 국내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아서 김영하, 김중혁, 김연수 같이 불혹을 진작에 넘긴 분들을 여전히 '젊은 작가'로 인식하고 있었다. 불과 몇년 전까지도... 오래전(대체 언제적?ㅋ) 귀걸이와 염색의 파격을 보여준 김영하 작가의 이미지를 기억 속에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젊은 작가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에도 최근에서야 기억 속 김영하 씨의 시각 이미지를 교체한 것 같다. 재기발랄해 보였던 과거의 사진을 '알쓸신잡'에서의 적당히 점잖으면서 박식한 중년의 작가의 모습으로... ^^;
황정은 씨의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백의 그림자'였고, 이후 '파씨의 입문' '야만적인 앨리스 씨' 등을 찾아읽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주변에 황정은 씨 작품에 대한 추천이 많고 <빨간 책방>의 진행자 이동진 씨가 거의 찬양 수준으로 황정은 씨의 팬임을 드러내기에 순전히 호기심으로 책장을 넘겼는데, 어쩐지 좀처럼 몰입이 안되었다. 따옴표가 없는 대화, 현실적이지 못한 인물들의 말투같은 것이 적응이 안되어 그 세계에 푹 빠지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 조금씩 국내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찾아 읽으면서 다양한 시도와 실험들을 접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 번역본보다 고전보다 장편보다 젊은 작가들의 중단편과 소설집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문학상 수상작품집이다.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집>이야말로 도대체 요즘 젊은 작가는 누구?라는 의문을 가진 나에게 안내서 같은 책이었고, 요며칠 읽은 '웃는 남자'는 <제 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이다. 이러한 수상 작품집들은 한국 문학을 널리 알리자는 상의 취지에 따라 출간 후 1년 동안은 5,500원으로 판매된다.
다시 황정은 씨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황정은 씨의 소설에 계속 몰입을 하지 못했더라면 아무리 저렴한 가격에 좋은 소설들을 읽을 수 있다고 해도 이 책을 읽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세번째 소설집인 <아무도 아닌>을 단숨에 읽으며 그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기에 이 수상집도 기대감을 갖고 읽게 되었다. <아무도 아닌>에도 '웃는 남자'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는데, 이 소설은 <파씨의 입문>에 실린 '디디의 우산'과 <아무도 아닌>에 실린 '웃는 남자'의 후속작이라고 한다. - 작품 말미에 표시되어 있음.
함께 살던 연인 dd를 사고로 잃고 방황하는 20대 청년인 d와 세운상가에서 40년 넘게 음향기기를 수리하는 일을 하고 있는 60대 남성 여소녀가 주인공인 이 소설에는, 배경이 된 세운상가 - 낡은 회색빛 건물의 스산함이 담겨있는 것 같다. d가 처음 살았던 반지하 집의 눅눅함이나 뚫린 작은 창으로 들려오는 이웃 아주머니들의 소음, 텅 비어가는 상가의 풍경과 그가 발견한(만나게 되는) 진공관... 인물들이 숨쉬는 공간의 빛깔과 웅웅거리는 소리가 촘촘한 언어로 묘사되어 그 공기를 함께 마시고 있는 것 같은 착각과 함께 조금씩 음울한 기운에 압도된다.
너무 쉽게 깨지거나 터질 수 있는 사물, 그 진공을 통과한 소리들에도 잡음이 섞여 있었다. d는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얇은 유리껍질 속 진공을 들여다보며 수일 전 박조배와 머물렀던 공간을 생각했다. 그 진공을, 그것은 넓고 어둡고 고요하게 정지해 있었으나 이 작고 사소한 진공은 흐르는 빛과 신호로 채워져 있었다. d는 다시,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느꼈던 진공을, 문득 흐름이 사라진 그 공간과 그 너머, 거기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과 d에게는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다른 장소, 다른 삶, 다른 죽음을 겪은 사람들. 그들은 연인을 잃었고 나도 연인을 잃었다. 그것이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d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나, 하찮음에 하찮음에. - p101
김숨 작가의 '이혼'이나 이기호 작가의 '최미진은 어디로', 처음부터 끝까지 줄바꿈 없이 한단락으로 이루어진 편혜영 작가의 '개의 밤'도 흥미로웠다.
다만 구성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작품을 읽기 전에 첫 장의 심사평을 먼저 만나게 된다는 것과 별도의 평론이 없다는 점이었다. 심사평을 뒷부분에 배치하는 것이 독자들이 소설을 자신의 관점으로 자유롭고 편안하게 읽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또한 평론을 즐겨읽지 않음에도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수상집>에 작품에 대한 평론이 각각 실려있는 것을 읽으며 작품을 읽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를 느꼈던 사람으로서, 각 작품에 대한 평론이 아니더라도 수상작품들에 대한 전체적인 평론이 적절한 분량으로 실렸다면 더욱 심도깊게 작품들을 이해하고 작가들의 세계에 다가서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다.
구성에 작은 아쉬움은 있었지만, 흥미롭게 읽었기에 내년에도 관심을 갖고 찾아읽게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