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양귀자 지음 / 살림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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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랬는지 어릴 적부터 나에게 '책'이란 물건은 '소설책'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사회과학 책이라든지, 인문사회, 철학 책, 하다못해 수필집도 읽기 시작한 것이 몇 년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에게 책이란 여전히 소설과 비소설로 나뉜다. 그만큼 소설이라는 책은 나에게 있어 어떤 절대적인 개념과 같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양귀자의 <모순>은 내 안에서 소설이라는 것이 갖는 의미나 정의 같은 것들이 만들어지는데 아주 많은 역할을 한 작품이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는데,  '소설을 이래서 읽는 거구나'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안진진은 스무 살 중반의 여자다. 만나는 남자가 둘 있다. 그녀는 결혼을 하고 싶다. 그래서 두 남자 중 남편이 될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이 선택을 하기까지, 당연히 그녀가 지나온 인생이 아주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녀의 어머니는 쌍둥이다. 날 때부터 생김새가 너무 똑같아 외할머니조차 구분하기 힘들었다던 두 사람은 결혼과 함께 달라진 인생만큼이나 외모도 너무 달라졌다. 못해도 10살 차이는 나 보인다. 10살 차 나는 언니로 보이는 쪽은 당연히 우리 엄마다.

이모는 능력 있고 자상하기까지 한 이모부를 만나 평생 고생이라고는 할 일없는 평탄한 삶을 산다. 엄마는 방랑벽 있는 아빠를 만나 평생 마음 편할 날이 없다. 나도 어릴 적 몇 번의 가출을 통해 엄마의 속을 썩인 적이 있고, 남동생은 말할 것도 없이 툭하면 사고를 친다.

이모는 작은 일 하나도 '나 이거 죽을 때까지 간직할 거야' 하는 사람이다. 엄마는 자신에게 다가온 일을 과장해 그 일에 굴복하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해결하러 다니며 살아온 분이다. 어쩐지 엄마는 아무 일 없을 때보다 사고를 수습하러 다닐 때 생기가 돈다. 나는 어릴 적 엄마와 똑같이 생긴 이모를 보며 혼동하기도 하지만 이모의 자식은 그럴 일이 없다. 하긴 그렇다. 내가 이모의 자식이었어도, 시장에서 싸구려 양말을 파는 엄마와 헷갈려 했을까.

그 사람의 인생이 어때 보이건,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다. 이모의 인생도 그렇다. 평탄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죽은 것 같은 삶이 힘들었던 이모의 선택과, 남 뒤치다꺼리 하느라 생각할 겨를조차 없으나 그래서 생동감 있는 엄마의 인생. 두 사람의 삶은 주인공이 남편을 고르는데 엄청난 영향을 준다.

누군가의 말처럼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선택 후에는 반드시 따라오는 것들이 있다. 내가 선택했기에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들. 나는 이것들이 꼭 장단점이라기보다는 양면성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그 많은 양면성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들어줬던 책. 삼십 중반의 나이에 다시 읽으니 느낌이 또 새롭다.

13
사람들이 때때로 어떤 거래나 협상의 자리에서 아주 진지한 얼굴로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절대 믿지 않는다. 그런 말은 기교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결국 돈이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25
장미꽃을 주고받는 식의, 삶의 화려한 포즈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가난한 삶이란 말하자면 우리들 생활에 절박한 포즈 외엔 어떠한 것도 허락하지 않는 삶이란 뜻이었다.

167
나는 결단코 ‘나‘를 장악하며 한 생애를 살아야 할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못 했지만, 나는 해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204
이모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이모에게도 무슨 일이 있을까‘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 같다.

230
좋은 밤을 보내려면 확실한 예약 없이는 곤란해요,라는 그 말, 그것 혹시 내가 놓치고 있는 인생의 진리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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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an Called Ove (Paperback, Reprint)
Backman, Fredrik / Atria Books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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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이 책이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나는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유명한 작품은 꼭 본다. 요즘 나의 상태가 영 정상이 아니라 읽다 쉬고 읽다 쉬고 집중도 안 되고 이야기 자체에 흥미가 없는 것도 아닌데 자꾸 지루하게 느껴져 다 보는데 오래 걸렸다. 다 읽고 난 지금은 좋아하는 책이 되었다.


오베라는 남자는 올해 59세다. 그리고 사브 자동차를 몬다. 그는 늘 원칙을 소중히 생각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어기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요즘 세상은 그게 없다. 그는 그런 것이 불만이다.


꼬장꼬장한 사람들, 절대로 작은 것 하나 그냥 넘기지 않는 사람들은 다들 이유가 있다. (작은 것에만 집착하는 형식주의자들 빼고) 다른 소설의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오베 또한 평탄하다고 말하기는 힘든 삶을 산다. 그의 경험이 자신의 성격과 세계를 형성한다. 그는 상냥한 사람은 아니다. 그저 원칙에 충실한 사람일 뿐이다. 책에서 나온 대로 오베가 늘 웃고 다니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해도 되는 것일까?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주었던 아내 손자가 떠나고 난 후 오베가 원하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조용히 그리고 자신의 계획대로 실행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뿐이다 이웃들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다들 각각의 이유로 오베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굳이 오베에게 와서 같이 있어준 이웃들이 고마운 존재이긴 하지만, 오베 또한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였다. 오베가 반드시 그들에게 고마워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원치 않는 간섭이었기 때문이다.

가볍지 않은 주제이나 전개는 어렵지 않아서 누구나 힘들지 않게 읽을 법한 책이다. 이야기가 전개되는가 싶으면 원점으로 돌아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느껴져 좀 지루하기도 했으나 (하긴 내 상태가 워낙  안 좋기도 했다) 다 읽고 처음부터 다시 훑어보니 이야기의 배열에 이유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후반으로 갈수록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좋았고  결말도 오베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을 단면으로 판단하지 말 것. 오베가 가르쳐주는 건 그런 부분인 듯하다.

37
He was a man of balck and white.
And she was color. All the color he had.

오베는 말하자면 흑백같은 남자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 손자는 색깔이 있는 세상이었다. 오베가 가진 모든 색이 있는.

69
He sits there for what must be an hour, just starting at that photo of all the imaginable things he most misses about her, the thing he really wishes he could do again is hold her hands in his. She had a way of folding her index finger into his palm, hiding it inside. And he always felt that nothing in the world was impossible when she did that. Of all thing he could miss, that‘s what he misses most.

오베는 그대로 앉아 한 시간은 족히 있었다. 그녀의 사진을 보면서. 그녀를 그리워하면서. 그 중에서도 가장 그리운 건 아내의 손이었다. 오베가 손을 잡으면 아내는 검지손가락을 접어 그의 손바닥에 대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오베는 뭐든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고는 했다. 그리운 것은 너무도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그리운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136
But if anyone had asked, he would have told them that he never lived there before he met her. And not after either.

하지만 오베의 경우,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의 삶은 사실상 살아있는 삶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가 죽은 후에도 그렇고.

235
The two men have tatoos all over their throats, he notes. As if the SUV is not a clear enough advertisement for their stupidity.

두 남자 모두 목에 온통 문신으로 가득하구만, 오베는 생각했다. 자기들이 몰고 다니는 SUV로는 자기가 얼마나 바보인지 다 보여주지 못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337
"Shit. Ove would have hated this, wouldn‘t he?"

"이런. 오베라면 이런 거 싫다고 했을거야.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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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드너 씨 부부가 나타나자마자, 모두 집 안으로 들어가 시원한 것이라도 들자는 간곡한 권유를 받았으나, 굳이 사양하고, 서로 정중하게 인사하고서 헤어졌다. 다아시 씨는 여자들이 마차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었으며, 마차가 떠나자 그가 집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이 엘리자베스에게 보였다.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민음사)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의 한 장면이다. 두 주인공이 만난다. 여자는 몰랐지만 남자는 여자를 처음부터 사랑하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차저차 오해가 조금 풀린다. 이후 남자는 본래 살던 곳으로 떠나고 여자는 그 근방으로 여행을 가게 된다. 주인 없는 집이라 해서 남자의 집을 구경하러 갔다가 우연찮게 남자와 딱 마주친다.


남녀는 서로의 마음을 모를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자신의 마음도 모른다. 생각 외로 신사다운 남자의 태도를 본 여자는 마음이 변하기 시작한다. 


그에 대한 편견이 깨어지기 시작하는 바로 그때, 그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집에서 딱 마주친 두 사람. 분위기가 묘하다. 그는 나를 아직 사랑할까? 이제 아무렇지 않아서 저렇게 예의 바를 수 있는 걸까? 아니야,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어. 엘리자베스는 마음만 급하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에 멀리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의 모습이 잡힌다. 작가는 그녀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 어떤 때는 백 마디 말보다 잠깐의 정적이 더 많은 것을 전달해주기도 한다.


예전에는 작가가 분명히 명시해놓은 부분에 집중을 했다면 요즘은 자꾸 그렇지 않은 부분에서 멈추어 생각해보게 된다. 풀어놓은 이야기를 따라 열심히 읽다가 제동이 한 번 걸리는 것이다. 상상력을 발휘해 이 공간을 채워 넣기도 하고, 반대로 단어 몇 개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스러운 감정을 실뭉치처럼 남겨두기도 한다. 작가와 함께 작품을 완성한 기분이라 뭔가 뿌듯한 느낌도 든다. 나는 요즘 수동적으로 읽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읽고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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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내 돈을 어떻게 쓰는가 - 누구나 알아야 할 재정 이야기
김태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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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인가 재작년인가 문재인 님이 SNS에서 '국가의 재정에 대해 이렇게 쉽게 풀어서 쓸 수 있다니 놀랍다'라는 말과 함께 추천을 남기셨다. 이런 쪽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서 한 번쯤 읽어봐야겠다 생각만 하다가 드디어 읽었다.

 

 

우선은 정말 쉽다. '국가 재정'이 무엇인지부터 시작해 돈의 쓰임에 따라 국가의 역할을 알아보고, 그 역할, 즉 제도를 정비하는데 뒷받침이 되었던 각종 경제학 개념을 시장 중심과 정부 중심의 입장에서 소개하고, 실제 제도를 정비해 적용한 다른 OECD 국가의 사례는 어땠는지,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어떻게 하였고 현재 어떠한지, 그래서 앞으로는 어때야 하는지 제시한다. 그리고 재미도 있다. 사람 나름이겠지만 나는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아주 재미있게 봤다.


 

책을 읽기 전에는 제목만 보고 우리나라의 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서만 이야기하는 책인 줄 알았는데, 읽다 보니 '돈'을 매개로 하여 국가의 역할이 무엇인지, 우리는 어디쯤 와 있는지 문제를 지적하고,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는 책이었다. 중요한 이야기가 많아서 꼼꼼히 읽고 또 읽고, 다 읽고 나서는 대강이나마 공책에 정리해 놓았다. 언제라도 궁금해질 때 들여다볼 수 있도록.



 

우리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앞으로 국가의 역할은 지금보다 커질 것이다. 우리나라는 국가가 개인의 삶에 그다지 큰 관여를 하지 않는 나라이니까.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당연히 내 돈이 들어간다. 버는 것도 시원찮은 판에 금쪽같은 나의 세금을 어떻게 쓰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아무래도 이 나라가 내 돈을 허투루 쓰는 것 같은데 어떻게 허투루 쓰는지 아는 바가 없어서 욕하는데 한계를 느낀 분께 강추. 이 한 권 읽었다고 뉴스에서 나랏빚이 어쩌고 내년 예산이 어쩌고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 알겠다. 그리고 그것은 감시하는 눈이 많을수록 나라의 재정은 투명해진다고 말한 저자의 의도이기도 하다.  

언젠가 SNS에서 읽었던 한 누리꾼의 말이 기억난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정부 욕하지 마십시오. 알면 더 잘 욕할 수 있습니다.' 이제 나는 조금 알았으니 조금 더 잘 욕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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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공제로 인해 소득세를 전혀 내지 않는 면세점 이하 근로자도 많고, 많은 근로자는 쥐꼬리만큼만 소득세를 내고 있다. 그러나 고소득자 역시 소득공제 덕에 담세력에 비하면 매우 작은 금액만을 소득세로 내고 있다.

182
꼭 필요한 의료 서비스 제공은 공적 의료보험에서 담당해야 한다. 그리고 민간 의료보험은 의료적 필요보다는 좀 더 다양한 욕구를 충족하는, 이를테면 고가의 치과진료나 특실 이용 등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63
재정은 우리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재정이 제 역할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우리 삶이 편해지거나 고단해진다. 앞으로 재정의 영향은 더욱 커진다. 반면에 재정여건은 좀 더 어려워진다. 따라서 재정이 제 역할을 다 하기는 훨씬 힘들어지고 좋은 재정의 중요성은 한층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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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옥중서간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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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신영복 교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봤다. 난 누구인지 잘 몰랐지만 이름은 뭔가 익숙했다. 그리고 책이 불티나게 팔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뭔지 몰라도 독재 시절 부당한 옥살이를 20년이나 하셨다길래 나도 읽어보고 싶었다.



 

책은 옥살이 동안 가족들에게 쓴 편지를 엮은 것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쓴 것이니, 그리고 모든 행동을 제약받는 환경인 감옥에서 쓴 글이니 본인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낸 글이 아닐까.

 

 

가장 좋은 때라고 하는 젊은 시절에 무려 20년간을 부당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니 억울할 만도 하건만 그런 감정은 찾을 수가 없다.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그저 가족의 안부를 묻고 안녕을 빈다. 그리고 감옥에서나마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신다.


 

편지글 내내 '배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천하며 사는 것만이 진짜 아는 것'임을 강조하듯 주위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허투루 넘기지 않고 깨달음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면서 자신의 정진을 '감옥에 갇혀있는 것'으로 핑계 삼지 않는다. 이런 분에게는 긴 겨울 지나 봄이 오기 시작하는 감옥 창살에 녹아 흘러내리는 물조차도 생각의 대상이 된다.


 

책을 다 읽고 어떤 분일까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한 인터뷰에서 '어떻게 억울한 수감 생활을 견뎠느냐'라고 묻자 '나보다 더 한 상황에 있는 수감자들도 많았다'라고 대답하신다. 당시 광우병 소 수입으로 인한 촛불집회에 대해 묻자 '지금 당장 성공하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불씨가 되어 우리에게 남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지금의 상황을 미리 보기라도 한듯하다.


 

결국 진리란 구하려고만 한다면 어디에나 있는 것을. 그곳이 감옥이든 천국이든 간에. 그래도 나라면 20년이라는 긴 시간의 억울한 옥살이를 그렇게 의연하게 견디지는 못 할 것 같다.

중간중간 한자도 많이 나오고 약간 옛날 말투라 딱딱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고. 평소에 굉장히 속독하는 편인데 자꾸 쉬면서 음미하게 만드는 단정한 필체가 좋았다. 난생처음 천천히 읽는 법을 배운 것만 같다. 자극적이고 빵빵한 이야기가 지겹다면. 이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조용한 흐름을 발견하고 싶다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한 번쯤 읽어보시길.

59
이처럼 빗소리에 새삼스레 무거운 마음이 되는 까닭은 아직도 내게 숱한 미련이 남아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88
제가 맡은 일이란 하루 10여 족(足)의 갑피(甲皮)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별 뼛심이 드는 일은 아니지만, 그동안 바른손 중지의 펜에 눌려 생긴 굳은살이 사라지고 이제는 구두칼을 쓰느라 엄지 끝에 제법 단단한 못자리가 잡혀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견 손가락 끝의 작은 변화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고 흐뭇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117
역마살은 떠돌이 광대 넋이 들린 거라고도 하고 길신(道神)이 씌운 거라고도 하지만, 아직도 꿈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 꿈 찾아 나서는 방랑이란 풀이를 나는 좋아합니다. (...) 그 안거(安居)란 기실 꿈의 상실이기 쉬우며 도리어 방황의 인고 속에 상당한 분량의 꿈이 추구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53
그러나 가장 뜻깊은 사실은, 이처럼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는 동안 이제는 사랑도 미움도 시들해져버린 악대부원들의 관심 밖으로 서서히 그리고 완전히 걸어나와 ‘고양이의 길‘을 갔다는 사실입니다. (...) 이쪽의 미련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꽃순이‘라는 옛날의 이름으로 부르는 쪽이 잘못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꽃순이의 실패‘도 ‘중동의 영자‘나 이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실패와 마찬가지로 그가 겪었을 모진 시련과 편력을 알지 못하는 ‘남‘들로서는 함부로 단언할 수 없는 것은 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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