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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은 계절보다 늦게
오윤희 지음 / 리프 / 2026년 10월
평점 :
출판사 협찬 도서를 읽고 쓴 주관적인 리뷰
『작별은 계절보다 늦게」
가슴속에 겨울을 품은 사람들, 서로의 고향이 되어가는 시간
오윤희 저 | 리프
어떻게 생겼어? 당신이 본 유령은....
과거처럼 생겼어
유령이 어떻게 생겼느냐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이 과거처럼 생겼다는 말이라니. 짧은 문장이지만 이 소설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짐작하게 한다. 떠나온 고향, 잊지 못한 사람, 끝내 건네지 못한 작별 인사. 과거는 사라진 시간이 아니라 때로는 지금의 우리 곁에 유령처럼 머물곤 하니까
소설은 서로 다른 역사의 무게를 짊어진 두 사람의 이야기다. 고려인 4세 소냐에게는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가족의 역사가 있고, 탈북 벌목공 영호에게는 가난과 굶주림을 피해 시베리아까지 흘러온 시간이 있다. 한 사람은 국적이 있어도 온전히 속할 곳을 찾지 못하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을 증명할 신분조차 없이 낯선 땅을 떠도는데...
두 사람은 처음 마주한 순간 서로에게서 낯익은 눈빛을 발견한다. 세상 밖으로 밀려난 사람, 오랫동안 마음속에 누군가를 들이지 못한 사람의 눈빛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고향이라는 단어의 의미였다. 우리는 흔히 고향을 태어나고 자란 장소라고 생각하지만, 이 작품 속 인물들에게 고향은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간다고 해도 예전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없는 곳. 떠나온 시간만큼 고향도 달라졌을 것이고, 그곳을 기억하는 사람 역시 변했을 것이다.
소냐와 영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고향을 잃는다는 것이 단순히 지리적인 장소를 잃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의 언어와 문화, 익숙한 풍경과 사람들,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존재할 수 있었던 감각까지 잃어버리는 일이다. 그래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서 발견한 것은 사랑의 설렘 이전에 자신과 같은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소냐는 내 마음의 고향이니까.”
이 고백은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 가운데 하나다. 돌아갈 땅을 잃은 사람에게 한 사람이 고향이 될 수 있다는 것. 고향이 반드시 지도 위에 표시된 장소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조용히 보여준다. 자신을 알아봐 주고, 낯선 존재로 밀어내지 않는 사람. 그 사람 곁에서 비로소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곳이야말로 고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설이 흥미로운 지점은 사랑을 두 사람의 아름다운 재회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소냐와 영호 사이에는 오랜 세월이 놓여 있고, 그 시간 동안 소냐 곁에는 파샤가 있었다. 25년을 함께한 남편 파샤 역시 소냐와는 다른 방식으로 외로움을 견뎌온 사람이다. 소냐가 첫사랑의 기억을 품고 살아왔다면, 파샤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늘 다른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당해야 했다.
죽은 사람의 빈자리는 엄청 힘이 세다는 거.
파샤의 이 말은 오래도록 마음에 걸린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곁에 없지만, 그 빈자리는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기억 속에 남은 사람과 경쟁해야 하는 이의 외로움은 어떤 모습일까. 함께 살아온 시간이 길다고 해서 서로의 마음을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낯선 존재가 되기도 한다. 시베리아가 생각나고 긴 여운을 주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