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이벌 리포트 - 인생 제2막을 위한 융 심리상담
대릴 샤프 지음, 정여울 옮김 / CRETA(크레타)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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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바이벌 리포트】 인생 제2 막을 위한 융 심리 상담





대릴 샤프 지음 & 정여울 옮김 & 크레타 펴냄











나의 1월 작가는 헤르만 헤세였다. 헤세에 대한 나의 감정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동서양의 색채를 두루 느낄 수 있는 헤세의 문학은 내가 좋아할 만한 요소가 너무 많은데도 불구하고 늘 가닿을 수 없는 깊은 거리감이 있었다.

《데미안》의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싸운다"라는 문장, 《황야의 이리》에서 해리 할러가 겪는 분열과 자기혐오, 《싯다르타》에서 반복되는 떠남과 귀환의 리듬. 헤세의 소설은 언제나 자아가 무너지는 순간에 시작된다. 그리고 균열의 언어를 가장 정밀하게 해석해 준 사람이 바로 칼 구스타프 융 아닐까? 융 없이 헤세를 읽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이 책은 그냥 ‘융 심리학 입문서’라고 부르기엔 너무 깊고, 너무나 인간적인 흐름이다.










무너지지 않는 법이 아니라, 무너진 다음에 어떻게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것인가에 대한 기록.

버스에 타기 시작하자마자 울었다는 노먼의 이야기, 그 첫 문장을 읽자마자 참 이상하게도, 눈물이 났다. 타오르는 불꽃 속에 홀로 서 있는 사람, 그의 모습에 비친 내 모습이기도 했다. 가상의 인물 ‘노먼’은 헌신적인 가장이라는 페르소나로 평생을 살아왔지만, 중년에 이르러 설명할 수 없는 불안과 충동, 우울 속으로 추락한다. 억압된 그림자, 살지 못한 삶, 발산되지 못한 에너지들이 무의식에서 끓어오르며 증상으로 폭발하는 순간—융은 이것을 병이 아니라 자기 치유의 시도라고 불렀다.






상담의 핵심은 고백이 아니라 정직함이다. 상담사 앞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일. 보기 싫은 욕망, 부끄러운 충동, 미화되지 않은 감정들까지 마주하는 용기. 그러나 쉽지 않다. 잠시 상담을 공부할 때, 전문가 앞에서 나는 결국 솔직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당신은 누구의 인생을 살아왔는가?”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헤세의 문장들과 겹쳐진다. 헤세의 인물들이 겪는 방황은 결코 미성숙의 증거가 아니다는 것을 읽어본 독자라면 알 것이다. 오히려 자기 개성화를 향한 필연적인 통과의례였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이 책이 그림자를 ‘어두운 것’으로만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림자는 우리가 억눌러온 충동이자 동시에 살지 못한 가능성이다. 재능일 수도 있고, 용기일 수도 있으며, 한 번도 허락받지 못한 욕망일 수도 기에...















우울의 바닥에서 그림자를 회피하지 말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보라는 제안은, 헤세의 문학과 정확히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고 본다. 밑으로 내려가야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


지금 우리에게는 왜 융이 필요한가.

수많은 상담심리학을 지나왔지만, 융 앞에 설 때만큼 가슴이 뛰는 순간은 드물다. 융은 우리를 ‘고쳐야 할 존재’가 아니라, 아직 살아보지 못한 삶을 품은 존재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서바이벌 리포트》를 읽으며 자연스럽게 이부영 교수의 『분석심리학』 3부작이 떠올랐다. 두 책은 방향이 다르지만, 도착지는 같다. 하나는 상담실의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가고, 다른 하나는 개념의 지도 위에 우리를 세운다. 전자는 살아 있는 사례이고, 후자는 사유의 뼈대다. 그리고 이 둘이 만나는 지점에서 융 심리학은 비로소 ‘이해되는 학문’이 아니라 살아지는 언어가 된다.



이부영의 『분석심리학』은 융의 개념들을 성급히 위로 끌어올리지 않는다. 자아, 페르소나,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개성화 과정—이 모든 개념은 이론이기 전에 삶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질문 속에 놓인다. 개념은 설명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인간이 자기 자신을 덜 오해하며 살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로 제시된다.



《서바이벌 리포트》의 노먼은 바로 그 도구들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부영 교수가 말해온 중년의 위기, 자아와 무의식의 불균형, 억압된 그림자의 반격은 노먼의 삶 안에서 구체적인 장면이 된다. 이론으로 읽을 때는 추상적이었던 개성화 과정이, 노먼의 불안과 꿈, 관계의 파탄 속에서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온다.



특히 두 책은 공통적으로 ‘증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만난다. 이부영은 신경증을 병리로 단정하지 않고, 정신이 균형을 회복하려는 시도로 이해한다. 《서바이벌 리포트》 역시 노먼의 불안과 우울을 제거해야 할 결함이 아니라, 무의식이 보내는 구조 신호로 읽어낸다. 고장 난 것이 아니라, 과잉으로 오래 참아온 것이라는 해석. 이 지점에서 융 심리학의 윤리가 선명해진다.

또 하나의 연결점은 ‘말보다 상징’이다. 이부영 교수는 꿈과 상징을 설명하면서도, 그것을 함부로 해석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상징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할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서바이벌 리포트》에서 노먼이 그려내는 그림과 꿈의 장면들—불타는 집, 야생마—는 바로 그 태도를 실천하는 예다. 해석보다 경험이 먼저이고, 이해보다 접촉이 앞선다.



결국 두 책은 같은 질문을 다른 언어로 던진다.

나는 누구로 살아왔고, 무엇을 너무 오래 억눌러 왔는가.

그리고 지금 이 균열은 실패인가, 아니면 호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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