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와이프
어설라 패럿 지음, 정해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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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협찬 도서를 읽고 쓴 주관적인 리뷰









어설라 패럿 / 위즈덤하우스 (펴냄)








1929년 작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밀도가 높은 이 소설, 첫 페이지부터 흥미진진하다. 헤어지자는 남편에게 매달리는 심리는 뭘까?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사랑은 한 쪽이 끝났다고 선언하는 순간 끝인데, 그렇다면 한 쪽이 일방적으로 끝났다고 말하는 사랑은 뭔지. 또 사랑은 왜 끝났다고 선언되는지 궁금하다.

소설은 심리를 연약함이나 집착으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매달림은 사랑의 미련이 아니라 자기 서사의 붕괴를 붙잡는 행위에 가깝다. 그래서 안타깝다. 두 사람의 만남과 사랑은 이십 대 초반의 일이다. 너무 어려 보인다.






사랑이 끝났다는 선언은 관계의 종료가 아니라, 한 사람이 자신을 이해해왔던 방식 전체를 무너뜨린다. 제3자의 시선에서 사랑은 선언과 함께 끝나지만, 당사자의 삶에서는 그 선언이 시간차로 도착한다. 소설은 냉혹한 묘사력으로 그 시차를 견디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 소설의 인물들은 술에 취해 떠난 남편을 이야기하고, 모험적인 연애를 꿈꾸며, 다시 결혼할 거라는 예언을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는다. 그것은 타락도 성장도 아니다. 어쩌면 버티는 방식이다.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는 지구 반바퀴를 돌다 와도 쓰지 못할 이야기다. 절대 순결의 시대에.... ( 불과 몇십 년 전까지도 절대 순결은 마찬가지였다. 살짝 결이 다른 이야기지만, 2004년 밀양 여중생 관련 가해자 놈들이 처벌받은 방식을 보 당대 성인지 감수성은 2000년대에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ㅠㅠ)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오래 남는 감정은 분노도 슬픔도 아닌, 묘한 피로감이다. 패트리샤가 겪는 것은 비극이라기보다 소진에 가깝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애썼고, 현대적인 아내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질투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돌아온 것은 “전처”라는 단 하나의 명사다. 인간이 아니라 상태, 삶이 아니라 결과로 불리는 이름. 이 소설은 여성이 무너지는 장면보다 여성이 하나의 단어로 요약되는 순간을 더 잔인하게 포착한다.






패트리샤가 피터에게 매달리는 장면들은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읽다 보면 그 매달림이 사랑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그것은 나 자신이 잘못 살았다는 판결을 혼자서 받아들이지 않기 위한 몸부림 같았다. 결혼이 실패했다는 사실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그 실패가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이자 책임처럼 남겨지는 상황이 아닐까? 사랑이 끝났다는 선언은 언제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지만, 그 이후의 삶은 한 사람에게만 남겨지니까. 내 주의 사람들을 봐도 그렇다.


전처라는 단어가 한 여자를 얼마나 간단하게 축소하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한때 누구의 아내였는지”가 그 사람에 대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정보가 되는 순간, 직업도 취향도 현재의 감정도 모두 주변부로 밀려난다. 전처는 관계의 잔여물처럼 취급되던 시대. 이미 끝난 사랑의 부록, 실패한 약속의 증거물 취급하는 단어다. 이혼 이후의 여성에게 주어진 자유는, 선택의 확장이 아니라 책임의 전면화에 가깝다. 집세를 내고, 옷을 사고, 수많은 상사의 기분을 관리해야 하는 현실. 남편 하나의 비위를 맞추던 시대에서 여러 권력의 기이함을 견뎌야 하는 우리 시대로 이동했을 뿐이다.






작가는 여기서 진보나 해방이라는 말을 쉽게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라는 단어가 얼마나 손쉽게 불평등을 가리는지를 냉소적으로 드러낸다.

과거의 억압이 사라졌다는 믿음과, 현재의 무책임한 관계가 만들어내는 공백 사이에서 이 소설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대신 질문을 남긴다.






지금의 우리는 정말 더 나은 선택지를 갖고 있는가, 아니면 실패를 개인의 몫으로 더 깔끔하게 돌려받고 있을 뿐인가라고


#장편소설 #엑스와이프 #이혼녀 #어설라패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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