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성 을유사상고전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이정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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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주체'와 '타자'의 관계, 여성 스스로 해방하려는 노력을 하라! 『제2의 성』 을유 사상 고전 p1024





시몬 드 보부아르(지음)/ 을유문화사(펴냄)







책을 펴기 전에 먼저, 오늘날의 페미니즘이 더 큰 설득력과 포용력을 가지려면 그 자체의 존재론적 실존, 철학의 바탕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한다.

실존주의를 기반으로 한 보부아르의 철학!!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결국 이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보부아르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수식어 사르트르의 연인, 계약 결혼이라는 문장과 좀 떼어놓고 읽고 싶었다.




보부아르가 어렸을 때 프랑스 분위기는 여성에게 선거권이 없었으며, 기혼 여성이 일을 가지려면 남편의 허락을 얻어야 했다.






원서 제목은 두 번째 성이다. 왜 두 번째인가? 왜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인가 우리 여성들은??!!!!!!!!!!!!!!!!!!!!! 

여성을 '타자'로 주장. 여성이 왜 타자인가? 동일자와 반대되는 개념, 예를 들면 백인 vs 유색인종, 식민지 경영자 vs 원주민 그래서 타자성을 벗어나냐 한다. 여성 해방운동. 여성은 절대적 타자였다. 절대적 주체는 남성이었다. 실존주의 타자는 갈등적 맞서는 맞대응, 대립각 관계를 말하지만, 보부아르가 말하는 타자는 여성은 타자는 항상 주체의 억압에 맞서왔다. but 여성들은 여성이 타자이면서도 타자인 줄도 몰랐다. 저항해 본 역사가 없다. 종속적 지위로부터 벗어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남성은 인간 자체를 대표하는 대표성을 가진다, 인류를 대표한다. 여성은 일종의 부족함, 결함으로 규정된다. 불완전한 남성을 여성으로 지칭. 여성이 늘 그래왔다는 보부아르의 분석. 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젠더의 역할 속에서 여성운동이 있다. 생물학적 성을 넘어 사회적 규정 속에서 자리를 찾고자 한다. 여성이 기본적으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어떤 필연성도 없다. 여성을 본질적인 속성으로 규정하지 마라. ( 우리 어렸을 때 많이 들어본 말, 요즘도 듣는 여성은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여성은 감성적이다. 여성은 눈물이 많다. 여자다워야 한다. 보부아르가 생물학적 특성 자체를 비판하거나 반박하는 것은 아니다. 생식 기능에 종속된 부분이 많다. 월경, 임신, 출산, 수유.... 반대로 신체적인 특성에서 매달 피를 흘리는 여성에 비해 남성이 생리학적으로 엄청 불편한 점은 없다.






인간 자체가 사회문화적으로 자연적 조건을 재구성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면 여성도 자연적 특성 대로만 살아야 한다? 한 단계 넘어서서 사는 세상에서 여성도 자연적 특성을 넘어설 수 있다. 여기서 정신분석 언급!


정신분석학에서 여성은 결함 자체다. 어린아이 상태에서 무의식 차이에서 '결함'을 경험, 남자는 '우월'을 경험한다. 남자아이는 이 시기에 생물학적 외부 페니스를 인식하는 동시에, 어머니는 페니스가 없다는 것을 깨달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거세 공포, 조만간 좌절(받아들이는 과정) 된다. 아버지와 동일시한다. but 여자아이는 엘렉트라 콤플렉스, 여자아이가 자신에게는 페니스가 없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과정. 정작 페니스가 있는 아빠는 선망의 대상(남근 선망), 이 과정이 이미 남성은 여자아이에게 절대적 권위자로 태어나게 되는 과정이다.............. ( 정신분석의 주장은 모든 남성, 여성은 이런 과정을 거친다고 보는 관점이므로.)


반면 보부아르는 프로이트의 분석을 비판. 주객전도, 인과관계가 잘못되었다고 봄. 남성을 우월하게 보는 사회적 질서가 남성 우월 주위로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 남근이란 그저 있고 없음이다. 그 차이를 결핍인 것 마냥 가르쳐온 우리 인간의 문화가 문제다!!!







또 한 축의 주장! 기술문명 때문도 아니다. 엥겔스 '기술론 적인 여성의 위치'에 대한 비판. 유년기부터 이미 여자아이는 여전히 엄마의 치마폭에 허용. 반면 남자아이는 어떤가? 꼬마 어른으로 독립하기를 사회적으로 요구받음. 독립의 대가로 대우받음에 대해 남자아이 스스로 의젓해진다. but 여자아이는 자란 후에도 엄마 근처에 머물며 수동적, 나약해짐이 허용됨. 남성은 이미 어릴 때 사회적 우월성을 경험함. 이러한 사회적인 인식적 과정이 직접적으로 여성에게 영향을 미친다.

사춘기가 되면서 여성으로써의 교육. 여성성의 강화, 전통 교육의 강화, 가정 안에서 어머니의 위치를 통해 계급을 발견함. 아빠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이 보임. 이 상황에서 2차 성징은 숨겨야 할 분위기, 사회문화적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 사실.






보부아르는 처녀가 되는 것을 열등감과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봄. 이때 일부 여성은 남자 자체가 싫어지면서 동성애적 관점을 보이기도 함. 예비적 수동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따라서 이들에게 결혼은 마지막 족쇄다. 요즘도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로 불린다. 성적 관계에서 남성은 권리만, 여성은 의무만 갖는다. 과거 많은 문화권에서 여성에게 정절이 강요됨. 조선 시대를 떠올리면 여성 재가 금지, 여성의 성적 발언을 음탕한 여자 취급!!! 여성이 어머니가 되는 것을 모성본능으로 설명해서는 안 됨!!! 임신하고 산전 우울증, 산후 우울증 감정적으로 복잡해진다. 여성은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을 가진다. 임신하고 수유 중인 여성에게 단지 모성애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침내 노녀에서 맞이하는 자유는 아무 쓸모가 없다. 오히려 쓸모 없어졌기 때문에 주는 자유라고 선을 그어버림. 그래서 젊었을 때 자유를 찾아야 함. 맞벌이가 바람직하다. 피임과 낙태의 결정권은 여자에게! 가정이라는 내적성의 공간에 여성을 가두지 마라. 몸이라는 내재성의 영역에 가둔다. 유교적인 교육을 해체하라! 동등하게 키우라! 여성은 경제적 활동을 해야 한다.


일부 남성들은 혹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에는 발끈하면서 보부아르의 책 내용에는 끄덕끄덕 동의한다.








♣보부아르에 대한 비판 두 가지 관점


  1. 여성성의 인정을 주장하는 입장

보부아르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너무 폄하한다. 보부아르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이 결국은 남성의 모습 아닌가? 여성적인 글쓰기, 감각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 감성적 리더십을 기존 남성의 역할보다 오히려 더 좋게 보는 시대다. 여성성을 숨기지 말고 자랑하자. ( 보부아르의 반론: 실존적 인간, 여성과 남성을 넘어서자는 주장. 여성의 본질 개념을 인정하지 않음. 실존주의 기투와 초월의 개념이기에 보부아르 자체가 실존주의 철학자니깐)

보부아르를 위한 변론: 차이를 발견하고 재조명하자라는 견해임.







2. 여성성의 해체를 주장하는 입장


정반대 쪽에서의 비판, 여전히 이원론적 구조에서 이분법 안에 매여있다. 우리처럼 해체하라! 섹스와 젠더는 구분되는 게 아니다. (보부아르는 섹스와 젠더를 구분) 그것조차도 없애라. 이성애를 정상 대라는 관계, 동성애는 틀렸다는 주장을 치워라! 섹스도 사회 문화의 가공물일 뿐이다. 여성과 남성 자체를 해체하자 주디스 버틀러의 주장.

보부아르를 위한 변론: 보부아르는 이성애를 절대 시 하지 않음, 동성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두 가지 중 무엇이 정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선택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주어진 특수상황, 이 주어진 상황에서 나는 의미 부여의 주체이자 객체일 뿐. 

'여성 해방이란 실존적 인간이 됨'을 의미한다.






주체가 되기 위해 같은 상황에서의 여성끼리 연대해야 한다. 탈성차사회, 성을 통해 인간을 구별하지 말라. 한 개인의 삶은 남성 여성이 아니라 실존적 인간의 삶이다.


책을 읽으며 나의 고민은 계속된다. 보부아르의 주장이 충분히 이해된다. 나의 자유의 확장, 나의 상황을 초월하는 자유로 남녀 모두가 바로 서야 한다. 무엇이 우월하고 아님이 아닌 모두가 스스로 바로서자는 의견이다.


실존적 인간으로서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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