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국에서의 일 년
이창래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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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래 장편소설/ RHK (펴냄)










문장 하나를 쓰고 그 문장에 만족할 때까지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못한다는 작가가 있다. 전작《만조의 바다 위에서》을 내고 무려 9년 만에 돌아왔다. 작가 생활 30년간 단 다섯 편의 작품을 발표한 작가.... 번역이라는 중간 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문장 하나하나가 농밀해서 왜 한 작품을 쓰는데 이렇게 오래 걸리는지 독자는 단번에 알아차린다. 나는 이런 사람만을 작가라 부른다.



마구 타이핑 된 소설이 난무하는 시대, 돌아서면 또 같은 작가의 신간이 나오고 또 나오는 시대, 소설마저 일회용이 된 이 시대에도 한 문장을 긴 호흡으로 꾹꾹 눌러쓰는 이런 사람만이 나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넘쳐나는 '작가 시대'에 '진짜 작가'가 그리운 요즘이다^^ㅎㅎㅎㅎ



우수한 성적으로 예일대 영문학과 졸업, 스텐퍼드 대학교 문창과 교수로 백인 중심 미국 주류 사회에서 아시아인의 외모로 살아온 작가.... 이창래 작가의 아버지는 토마스 만을 좋아하신다고 한다. 이 문장에서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만의 소설을 좋아하는 아버지에게서 자란 아들이라......


노벨상 후보로 자주 언급되는 재미 거주 한인 작가. 미국 내 유수 문학상을 6회나 수상, 상 이름을 다 적지 않겠다.


위안부의 현실을 알게 되었고 그 충격으로 쓴 소설《척하는 삶》, 세 살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한국말을 할 줄 모르는 작가인데 한국의 현실을 더 잘 아는 것 같다.

이번 소설에서 이십 대 청년의 삶을 그린 부분은 어쩌면 미국 사회를 동양인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저자 자신의 삶이 투영된 것은 아닌지....


틸러 바먼드의 삶, 혼혈이지만 백인의 외모를 가진 청년... 그가 느끼는 결핍감은 동양인 혹은 비주류가 아닌 어머니에 대한 결핍이었다. 다소 하드보일드 한 작가의 문체는 상당히 함축적이어서 그저 술술 넘기며 읽히지 않고 어느 부분에서는 독자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주인공 틸러가 겪은 삶이 다소 환상적인 문체로 쓰이면서 이것이 사실인지? 상상인지 고민되는 부분도 있었다.


주인공 이름 틸러(tiller: 키의 손잡이)가 주는 의미...


그가 연상이자 싱글맘 밸을 사랑하고 그의 아들 빅터 주니어에게 적당한 거리를 두며 살아가는 모습과

중국계 미국인 사업가인 퐁 로우를 따라 하와이에서 마카오를 거치는 1년간의 디스아포라, 소설은 두 축으로 서술된다......


틸러에게 밸은 어머니이자 누나 연인 친구 반려자 그리고 절대적인 존재였다. 몇 차례 밸의 자살시도.... 틸러에게는 밸을 더 갈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퐁 로우에 대한 마음도 비슷한 갈망인 것 같다. 틸러는 과연 스스로 설 수 있을까.....


소설은 주인공인 틸러의 시점에서 서술되지만 틸러는 또 하나의 관찰자이기도 하다. 부드럽고 함축적이면서 한없이 하드보일드 한 작가 이창래의 문장은 국내 소설과 사뭇 달랐고 그 다른 점이 매력이었다.


책을 덮으며 소설에 대한 유수의 평론가, 지식인, 작가들이 쓴 찬사와 격려를 읽어봤다. 그 누구도 작가 이창래를 온전히 표현해 내지는 못한 것 같다. 가장 '이창래 다운 방식'으로 그가 가진 '유일한' 무기이자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인 펜!! (그렇다면 그는 매번 다른 펜을 드는 작가다..)


독자는 중독되고 만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차기작을 마냥 기다리는 마음은 연락 없는 연인의 소식을 기다리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밑줄 그은 문장이 하도 많아 어찌 다 쓸 수 있을지........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 길을 찾아도 도달하지 못하는 그곳... 그런 곳은 어딜까?



나의 유사 백인성에 대해 한마디 하겠다. 내게 흑인 혈통이 아주 조금 섞여 있었다면야 문제가 완전히 달라지겠지만 12.5% 아시아인이라는 혈통은 누군가 문제로 삼고 싶어 하지 않는 한 별문제가 아니다. 굳이 문제 삼겠다면 나를 저함량 노랑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진실은 단순하다. p51


벨과 나는 비교적 복잡한 삶의 문제에 관해서는 묻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최초의 맹세를 깼다. 우리는 뭐랄까. 혈연관계에 대한 배경 정보라든지, 어린 시절의 핵심적인 순간이라든지, 인간관계에서 겪은 문제 등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보통은 세 번이나 네 번쯤같이 자고 나면, 건조기에서 꺼낸 서로의 양말 짝을 맞추고 나면, 화장실 두루마리 휴지를 새로 사서 채워 넣고 나면 이런 정보에 파고들게 마련이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p99


그건 엄마의 포옹이었다. 엄가가 시간을 벗어난 곳에 존재한다면 그리고 영원하다면 그리고 우주만큼 품이 넓고 비판적이지 않다면 말이다.

우리의 좌표를 드러냈다는 이유로 그녀를 나무라지 않았던 것 같다. 충분히 뿌리를 내렸다는 기분이 들면 무엇도 나의 뿌리를 뽑을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밸은 어떤 선언을 해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체로 자기 자신에게 하는 선언이라도 말이다. 이게 나의 유일한 삶이고, 난 이 삶을 살아 낼 거야 p120


뭐랄까 무엇에도 동요하지 않는 얼굴 같았다. 침착함 이전의 침착함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할까. 그 모습을 보자 나는 문득 퐁의 불운한 어린 시절 연대기 속 어떤 사실이 떠올랐고 황소의 이마와 주둥이를 그리기 시작했다. p314



덧. 기다리는 거 잘 하시나요? 잘 기다리시는 편??

소식 없는 연락을 기다릴 때의 마음이란.... 이 소설을 읽을 때 저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너무 기다리다 보면 마침내 내가 무엇을 기다리는지조차 잊게 됩니다^^


(게시물 '저장'과 '공유'는 사랑이지만 가장 저장되고 싶은 것은 마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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