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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팩스 부인과 여덟 개의 여권 ㅣ 스토리콜렉터 55
도로시 길먼 지음, 송섬별 옮김 / 북로드 / 2017년 6월
평점 :
품절

풍성하고 복슬복슬한 흰 머리칼, 늘 착용하는 꽃 달린 커다란 모자, 온화하지만 때로는 단호한 말투와 행동을 겸비한 폴리팩스 부인. 무모하리만큼 계획을 변경하고 젊은 사람들보다 훨씬 용감하며 충동적으로 행동하지만 그 뒤엔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책임감과 사람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따뜻함, 친절하고 다정한 성품이 존재하는 폴리팩스 부인. 그녀는 ‘할머니’라는 인물을 소개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천방지축’, ‘충동적’, ‘직관적’이라는 단어들로 설명하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예기치 않게 스파이가 된 폴리팩스 부인이 이번엔 여덟 개의 여권을―잠자리에 들 때를 제외하곤 항상 모자를 쓰는 것 같은 부인인 만큼 특수 제작한 모자 속에 숨겨서―전해주는 임무를 안고 불가리아로 떠나게 된다. 폴리팩스 부인은 평소처럼 평범한 미국인 관광객 행세를 하며 여권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동시에 CIA의 예산 문제로 그녀 자신도 모르는 또 다른 임무가 있다. 하지만 주어진 비교적 간단한 임무와 달리, 언제나 그렇듯 그녀는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사정에 호기심을 품으며 그들의 일에 참견한다.
그러나 여행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우연한 만남들, 잠깐의 인연, 결코 설명할 수 없는 동기들, 알 수 없는 결말.
분별력 있는 일처리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피도 눈물도 없는 비밀요원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을 뼈저리게 느끼는 폴리팩스 부인은 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젊은 무리들의 일을―억울하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필립과 무리에서 대장처럼 구는 니키의 행동을 의심하며 필립을 두고 떠날 수 없는 데비―자신의 일로 만들고, 기적을 꿈꾸며 주어진 임무와는 전혀 상관없는 판체프스키 교도소 습격을 감행한다. 그리고 교도소 습격을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엔 목숨을 위협받는 순간, 관계에서 유대감을 느끼며 마음을 여는 순간, 두려움을 용기로 극복하는 순간, 우연과 필연적 순간들, 폴리팩스 부인의 재치와 지혜의 순간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부인은 생각했다. 이 나이야말로 인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편안한 삶에 안주하던 시간은 충분히 겪었고, 무사안일한 인생이라는 것은 헛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최소한 자기 자신은 바꿀 수 있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조그만 희망이 있고, 딱 필요한 시간에 하필이면 폴리팩스 부인이 딱 필요한 장소에 있는 이상, 시도라도 해보지 않는 게 말이 되지 않는 만큼 그녀는 이번에도 주어진 여행길을 벗어난 여행을 한다. 또한 이번 여행에서는 부인의 엷은 미소만큼이나 미묘한 로맨스의 순간도 존재하며 그녀의 여행에 여운을 남긴다.
폴리팩스 부인의 다음 여행이, 사랑스러운 참견이, 무모한 계획이, 그리고 그녀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무척이나 기다려지고 기대된다.
“그래, 여행이란 꼭 잃어버린 물품 보관소 같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