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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죽음들은 오래도록 지속된다 - 역사 속 인물들의 죽음에 관한 기록
파트릭 펠루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14년 7월
평점 :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삶을 사는 것만큼 죽음에 관한 것도 중요한 일이 되었다. 수많은 경쟁과 환경 오염. 그로 인해 생겨난 죽음에 이르는
스트레스부터 우울증, 신종 바이러스에 의한병균 등. 예전엔 질병에 의해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의 현대인들은 정신적인 병과 싸우는
일이 급선무가 되었고 결코 멀지 않은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지나친 일이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인명은 재천'이라는 옛말은 이미
무의미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그러던 찰나에 접하게 된 이 책은 특히나 역사속 인물들의 죽음을 엿볼 수 있을 듯 하여 흥미를 자극했다. 지금처럼
의술이 발달되지 않은 과거의 의술로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을까?
첫 장부터 역사속 인물의 죽음을 상세히 나열한 장면들은 충격적이었다. 글쓴이가 의사라서 그런지 그 상황과 정황을 고려해 그 인물의 상태가
어떤지를 꼼꼼히 나열하고 있다.
특히 프랑스의 암흑 절정기(?) 특히 혁명 때 인간에게 행해진 가혹행위들은 상상하는 것도 곤욕스럽고 인간이 얼만큼 잔인해 질 수 있는지
끔찍하기까지 했다.
18세기 프랑스 대혁명 때 정치적으로 혼란스럽던 시기, 죽음에 이르렀던 인물은 자연사와는 거리가 먼 정치적 희생이 훨씬 많았다. 궁핍과
핍박에 탈출구를 찾던 시민들의 아우성, 무차별적으로 가해진 단두대의 사용. 그런 정치적 희생이 오늘날에는 완전히 없어졌다고는 절대 생각치
않는다. 언제나 그 시대를 이끄는 인물들은 때와 맞게 반대파 인물들을 잘도 숙청하니까!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영화가 대히트를 친게 얼마되지 않았고 따라서 그 때 장면을 이 시대의 인물과 결부시켜 상상을
해보니 영화를 보는 듯 처철하고 파리 목숨처럼 사라진 인물들의 참담함과 비장함이 느껴져 읽기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이 당시 이들의 나이는 이른
30대들. 어찌됐든 역사는 그들을 기억한다.
전쟁에 대한 참혹함은 '워털루 전쟁'과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그 이전의 역사를 보면 영국과 프랑스가 맞닿아 있어서 그런지
앙숙처럼 물고 뜯기는 형상이 많았다. 이 두 전쟁은 두 나라의 관계를 떠나서 전쟁의 참혹함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아닐까. 저자도 서술하듯이
전쟁을 치뤄보지 않은 우리 세대는 전쟁에 대해 막연할 수 밖에 없다. 전쟁으로 상처받고 고생하는 분들이 겪는 고통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얘기하는
젊은 세대를 진정성있게 볼 수 있을까. 고통을 감내하며 나를 버린 무수히 많은 청년들. 노르망디 해변은 아직도 폭탄과의 전쟁 중이라고 한다.
나와 너가 사회를 구성하고 가족이 모여 마을' 사회를 이루고 집단을 만들고 나라가 되고 세계가 된다. 자신, 혹은 자국의 이익 추구란 개념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몰라도 종교하는 이름으로 우리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이 순간에도 치워지고 있는 전쟁 옹호자들은 과거에서 살아 돌아온
나폴레옹이나 히틀러, 스탈린임에 틀림없고 그들의 모방자이며 추종자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누가 누구를 벌하고 평화를 준단 말인가. 이해하지
못했던 평화론자들이며 전쟁에 결사 반대하는 이들의 기본 정신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불순한 의도 없이 욕심으로 치달아 인간이 스스로 멸하는 단계까지는 가지 않기를 역사를 통해 배우고 지켜야 할 가치는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깊이 반성해 본다.
시대를 역행했던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현대를 미래로 이끈 '마담 퀴리'같은 분도 있다. 자신의 몸이 방사능에 노출돼 죽어가면서도 연구를
계속했던 집념의 여인. 시대의 희생자 "까미유 끌로델'. 로뎅에 가려 작품에 대한 평가도 후대에 알려지고 죽음앞에서도 평탄하지 못했던
예술가. 생전에 박완서님이 말씀하셨듯 살아 생전에 궁핍한 생활의 끝을 보지 못했던 '김수근'화백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아이러니니 하게 사후에
칭송받고 작품의 가치가 수십배에 달하는 걸 보면 현시대의 모멸감이랄까. 인간의 가치는 없고 가치의 기준이 변질되어 간다.
책을 통해 본 역사속의 인물들은 너무나 유명해 죽음앞에서도 당당했을 것이고 모든 이들의
축복속에 죽음을 맞이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에서 시작했다. 그 기대감은 산산히 부서지고 죽음은 누군가를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나를 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그 직전이 되면 어떤 권력도 명예도 부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살아온 발자취를 되돌아 볼 시간이나 있을까. 한 치 앞도
모르는게 세상사고 내 개인사이기도 하다. 두려움 가득한 죽음이 아닌 삶을 논하듯 죽음도 맞이하는 방법을 머릿속에 세뇌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