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 25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 개정판
이덕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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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덮으면서 먹먹한 기분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후대에 끈질기게 등장하는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거리였고 그 죽음이 비참하긴 했지만 그저 막연하게 느낄 뿐이었다. 언젠가 수원 행궁을 찾았을 때 봤던 뒤주가 생각났고 그 앞에서 웃으며 사진찍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것이 웃으며 사진찍을 만한 것인가?' 그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당파 싸움을 들어 국민성을 이야기하는 일제의 식민사관적 논리는 더이상 우리나라 국민에게 먹히지 않는 이야기고 서양의 역사를 봐도 평화와 구원를 갈망하는 종교는 피를 부르는 전쟁의 시작이었다. 십자군 원정이니 하는 굵직한 서양의 전쟁사는 종교라는 이름하에 자행된 피의 역사였다. 이 모든 것이 누군가를 지배하고 독점하려는 권력에서 비롯된 무차별적 공격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처음엔 이 책이 소설인 줄 알았다. 왜 였을까? 역사적 인물들의 대화가 첨가되어 있고 감정의 대사들이 있어서 그런 느낌을 받았을까? 작가도 이야기 하듯이 여러 고서를 고증하면서 중간중간 생략된 부분을 끼워 맞추는 일이 큰 작업이었다고 한다.

들어가는 글에서는 서울대학교 교수를 들어내고 비판을 하고 있어서 뭔가 싶기도 했다.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거나 학계에 새로운 논문을 제시 할때도 기존의 기득권에 속한 사람들의 반발은 언제나 거센 법이다.

 

  조선을 통틀어 태평성대를 이룬 몇 안되는 왕으로 잘 알려진 영.정조 시대! 학교때 국사시간에도 영.정조를 묶어 공부했고 지금 생각해 보면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해서는 심각하게 얘기해 준 선생님은 한명도 없었다. 사도세자를 옆에서 13년간 모신 대신들도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세자를 살려달라고 말 한마디 안한 것처럼, 후대에도 그렇게 침묵했다.

영조와 뗄 수 없는 노론파 대신들! 권력에 눈이 어두워지는 노론의 거친 세력과 영조의 지나친 과거에의 집착. 더욱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부인 혜경궁 홍씨와 장인 홍봉한이 저지른 만행! 장인이라는 사람이 사위의 뒤주에 갇히게 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든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도 남편을 잃은 여인이 쓴 애끓는 사부곡이라는 것보다는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를 옹호하는 입장을 연신 토로했으며 사도세자를 정신이상자로 몰고 간 것은 자신을 대변하기 위해 꾸며낸 글이라고 작가가 폄하한 것이 아마도 이 역사서가 기존의 기득권 역사학자들에게 배척당하는 이유가 될른지도 모르겠다.

 

 어릴때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을 대리청정까지 시키며 왕의 자리를 물려주려던 성군의 모습이 어떻게 한순간에 변할 수 있었을까?

군을 멸시하던 당대와는 다르게 세자는 군을 중요시했고 북방으로 나아갈 것을 희망했다.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 생겼을 것이고 탁상공론만 일삼고 자신들의 권력으로 왕을 좌지우지하려하니 새로운 세력의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아버지 영조가 탕평책을 썼으므로 그에 합당한 정치적 신념을 키운 것인데 영조는 노론에 의해 왕위에 오른 사람이고 노력은 했으나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 청년이 된 세자는 왕의 기세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한 나라에 태양이 둘 일순 없다. 아무리 아버지와 아들사이라 하더라도! 대리청정을 하고 있는 세자였으나 세력이 미약했고, 영조 입장에서 아직은 왕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아들은 더이상 아들이 아닌 신념이 다른 정치적, 군사적으로 도전하는 역적으로 간주했다. 성격적으로 기복이 심했던 영조는 함정에 빠진 세자를 구해 줄 생각은 않고 죽음으로 몰아갔다. 낳아준 생모에게까지 버림받은 세자!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의지할 곳 없는 그 마음은 어떠했을까? 죽음을 앞두고 미친사람인양 행세라도 하려고 하나 부인마저 받아주질 않는 대목이 <한중록>기록에 남아있으나 그녀는 그런의도가 아니었다고 변명하고 있다.

 

'자네가 참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자네는 세손 데리고 오래 살려 하기에 오늘 내가 나가서 죽겠기로 그것을 꺼려 세손 휘향을 내게 안 씌우려는 그 심술을 알겠네'

 

 뒤주에 8일동안 갇혀 죽음을 맞이한 사도세자! 그에 대해 다시 재평가하는 시도들이 활발한 이유는 그 억울한 혼령이 떠나지 못하고 후손들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황당한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그렇게라도 자신의 억울함과 궁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한 사실을 알리고 싶었던 건 아닐까. 살아 생전 종기로 인해 온양 온천과 수원을 찾았던 세자는 그곳 농민들에게 성군으로서의 면모를 보였고 그것을 잊지 못한 농민들은 정조때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옮기는 행차때 발벗고 나와 울었다고 한다.

비운의 왕세자! 그를 기억하고 재조명하는 작업은 계속 이루어줘야 하고 그것을 교훈삼아 권력의 참상을 다시 깨우칠 필요가 있다.

이 서평을 쓴 오늘은 김정일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날이기도 하다. 철통 독재를 폈지만 권력을 가지고 가는 것도 아니고 죽을 때는 그 몸뚱아리 하나뿐이다. 정치를 하고 그 권력의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인간의 기본 도리와 의무를 결코 잊지 말기를, 한 순간에 사라지는 모래성임과 같음을 명심하고 또 명심하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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