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라는 이름아래 힘없는 사람, 세상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스님이나 성직자들은 자랑스럽도 그 어떤 신보다 위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지에서 사랑을 실천하다 가신 고 이태석 신부님을 본 터라 종교적인 이념을 떠나서 파란 눈의 외국인이 한국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처음엔 프랑스에서 선교사 자격으로 온 신부는 프랑스를 떠난 지 46만에 한국에 도착한다. 외아들이었던 신부는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천주교의 불모지라 할 수 있는 한국으로 발길을 옮긴다. 처음 도착해서 부터 여러가지 일을 도모하고 가장 낮은 곳에서 사랑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허나 몸이 좋질 않아 10년만에 프랑스로 요양을 가게 되는데 그때 어머니와의 재회 장면은 긴 설명이 없어도 절로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버지는 이미 신부가 한국으로 떠날 당시 몸이 좋질 않아 돌아가신 뒤고 어머니마저 건강이 여의치 않은 실정이었다. 종교인이기 이전에 한 어머니의 사랑하는 아들 ! 10년만의 재회. 어느 외국인 신부의 일생에는 한 나라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겨 있다. 일제 강점기 말기의 상황과 한국 전쟁. 일제 강점기 말기에 행해지는 일본인들의 잔혹한 행위들. 신부의 입장에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파란 눈의 신부. 한 예를 보면 독립 운동가를 적극 도와주지는 못했어도 은신처를 구하고자 할때는 기꺼이 성당을 내 주었다는 것. 한 독립투사를 머물게 했다는 이유로 잠시 감옥에 가게 되는데 그때 만났던 독립투사가 '이육사'다. 훗날 신부는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그렇게 그 나라는 해방을 하지만 색깔론에 휩싸여 같은 민족끼리 이념의 다른 편에서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된다. 이런 현실을 어떻게 생각 했을까? 신부는 이념이나 색깔에 연연하지 않고 신부를 찾는 누구든 반겨주고 안아 주었다. 그렇게 포항에 정착해 '송정원'을 건립하고 많은 일을 구상하고 실천했다.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하는가 하면 전쟁 고아나 힘없는 노인들을 모아 정착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모인 송정원의 식구는 무려 800명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후에 이곳에 포항제철이 들어서고 그걸 주도했던 젊은 현대건설 중역이 후에 대통령이 되었다고 한다. 다들 아시리라. 신부는 이름도 '남대영'이라는 한글 이름을 지어 부르게 했다. 델랑드는 처음 들었지만 '남대영'이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는 것도 같다. 그런 많은 일을 일궈낸 신부는 1972년 77세의 나이로 떠나셨다. 나보다 낮은 곳을 어두운 곳을 나를 버리면서까지 일궈 내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모든 것을 종교의 힘이라고 정의 내리기엔 뭔가 아쉽다. 그분의 성품에 가정적 환경에 밑바탕이 되었던 건 아닐까? 어찌됐든 이 나라의 아픔과 슬픔을 같이 한 파란 눈의 자비로운 신부님이 계셨다는 걸 뒤늦게나마 알게 되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