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걸 보면 네 생각이 나 - 먼 곳에서 선명해지는 시간의 흔적들
청민 지음, Peter 사진 / 상상출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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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많은 것들이 불투명해졌다. 아무도 여행을, 특히 해외여행을 갈 수 없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여행을 다녀온 후, 추억에 기대던 청민은 그간의 여행 기억을 모조리 끌어안았다. 온 가족이 탈탈 털어 마련한 돈으로 다녀온 유럽 캠핑은 든든한 가족의 울타리를 실감했다. 러시아어도 모른 채로 시작한 모스크바 교환학생은 넘어지는 법을 가르쳐줬다.

그는 10대 소녀에서 30대 성인까지 스스럼없이 넘나들며 시간 여행자가 된다. 스코틀랜드, 러시아, 인도, 몽골 등의 해외여행지부터 강릉, 여주 등의 국내 여행지. 그리고 삶의 터전인 서울, 일산, 대구까지. 청민이란 이름의 비행기는 창밖으로 '우리 모두 누군가의 아름다운 풍경이었음을' 상기시킨다.




- 이륙, 비행 그리고 착륙


맞아, 넘어지는 일도 실패하는 일도 많았지만, 해내고 만 일도 많았었지. 남들보다 좀 느렸지만 결국 내 속도대로 모아온 조각들을 떠올려본다. p. 71


청민의 걸어온 흔적은 여행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해리포터 촬영지에서 자신의 취향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한 어른들의 마음을 떠올린다. 힘든 나날을 보내던 그를 데리고 바다로 데려간 친구의 섬세한 마음에 감동한다. 흐린 스코틀랜드 날씨에서 어두운 학창 시절이 겹쳐진다.

여행지의 사람과 풍경은 잊고 있던 과거의 나를 자꾸만 끄집어낸다. 그런데도 현재의 나는 결코 그에 지지 않는다. 느린 걸음으로 고비사막 능선을 오르던 그때처럼 또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언덕은 때로 사람과 상황이기도 했지만, 대부분 나 자신(p. 72)이었으니까.


용기도 두려움처럼 패턴을 이룬다. 몇 번의 두려움에 노크를 하다 보면, 고개를 빼꼼 내미는 작은 용기들이 나름의 패턴을 이뤄 자리를 잡는다. 한번 해봤으니까 일단 기회 앞에 나를 던지는 용기,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라는 용기, 머뭇거리면서도 언젠가 해낸 기억을 믿고 선택하는 용기. 늘 작다고만 여겼던 것들은 언제나 나보다 컸다.

그래서 내가 쌓아온 작은 시간들을 믿어보기로 다시금 다짐했다. 두려워도 포기하지만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p. 72





- 여행, 머무르지 않는 마음


매일 부대끼며 살던 가족이든, 친한 친구든 여행에선 원수가 되기도 한다. 익숙지 않은 환경, 너무나도 다른 취향, 개인 공간 없이 몇 날 며칠을 보내야 하는 일정은 갈등을 부른다. 하지만 그때를 같이 추억할 사람은 함께 여행을 떠난 사람들뿐이다.

그중 피식 웃은 에피소드가 있다. 가족과 함께 떠난 유럽 캠핑의 돌발 상황이다. 비바람에 속절없이 망가진 텐트를 테이프로 간신히 살려낸 가족은 빌린 테이프를 다 써버렸단 사실을 주인에게 말해야 했다. 그 임무를 맡은 동생 ‘찬’은 이렇게 외친다. “Tent is dead, tape is dead!”

저 말에 가족들은 눈물을 흘려가며 웃기 시작한다. 별것 아닌 동생의 말에 날 선 신경들이 누그러진다. 이젠 함께이니까 웃을 수 있다. 크고 작은 시련 앞에서도 농담 한번 툭툭 던지고 깔깔 웃을 수 있다(p. 63). 돌아서면 잊어버릴 순간이자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은 지금뿐이니까.


때론 함께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어떤 불안정한 곳도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공간이 된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이, 같은 기억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겠다.

p. 63







- 사랑하고 또 사랑받은 기억

시선은 결국 아름다움에 맺힌다던데 아빠의 카메라 끝에는 언제나 내가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 위안 받는 밤이 있다. 흔들리고 바스러지는 마음에 금방이라도 어둠 속으로 도망치고 싶을 때 내가 누군가의 시선 끝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밤이. 본문 中


책에는 청민의 아빠, Peter의 사진이 가득하다. 행복한 연료를 가득 채워준 청민의 베이스캠프, 가족의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동네에 정이 붙기 시작할 때쯤 전학을 다닌 청민. 어느 곳에도 뿌리내릴 수 없는 자신에 불안했지만, 지금은 가족의 울타리가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었단 사실을 잘 안다.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기억이 있기에 떠났다가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사랑한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 좋은 건 다 주고 싶은 마음. 꼭 같이 하고 싶은 마음. 내가 좋아하는 걸 소중한 사람도 좋아하는 마음을 보면 괜히 더 신이 나는 마음. 그러고 보면 아빠도 늘 그랬는데. 멋진 걸 보고 오면 우리를 데리고 꼭 다시 가고는 했다. p. 90-91

아빠는 말한다. “우리가 떠나는 건 더 잘 돌아오기 위해서야.” 그는 아름다운 것이 있으면 엄마와 찬, 청민에게 먼저 보여준다. 덕분에 자녀들은 풍요로운 마음의 성인으로 자란다. 청민은 젊은 날의 아빠와 비슷한 나이가 되어서야 깨닫는다. 고단한 직장 생활을 견디기 위해 무용하며 아름다운 것을 찾아다녔을 아빠를. 쌓아온 사랑의 기억으로 더 멋지게 길을 나설 수 있게 해준 그의 따뜻함을 느낀다.



가방에 필요한 것만 챙겨서, 일단 길을 나설 거다. 물론 떠난다고 하루아침에 삶이 변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기울어진 행복의 균형을 다시금 맞출 수 있을 테니까. p. 175


멀리 떠나지 않아도 주변의 행복을 찾아다니는 청민이 됐다. 퇴근 후에 브롬톤 자전거를 타고 산책하거나 훌쩍 백패킹을 떠나기도 한다. 베이스캠프를 잠시 두고 멀리, 더 멀리 페달을 밟으면, 나그네 같은 삶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몸으로 알 것도 같다(p. 215)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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