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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녹는 온도
정이현 지음 / 달 / 2017년 12월
평점 :
리얼리티란 말을 이 책에 쓰고 싶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처럼 반복되는 일상인 소설이자 산문집이다. 책에는 "그들은"으로 시작하는 10편의 짧은 소설과 "나는"으로 시작하는 작가의 후일담이 실려있다. 가볍게 읽었지만 마음에 남는 게 많은 글이었다. 소설은 누군가의 에피소드처럼 내 주변 또는 나의 이야기인 듯 별거 없는데, 그 별거 없음에서 오는 강한 여운이 있었다. 마치 오늘도 "살아냈다", "견뎌냈다" 내뱉는 우리만의 혼잣말처럼.
애완동물과의 이별을 다룬 <화요일의 기린>,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연인들의 이야기 <괜찮다는 말, 괜찮지 않다는 말>, 친한 친구지만 여행 스타일은 전혀 다른 <여행의 기초>, 내가 가진 재능에 확고한 믿음이 없어 생긴 불안감을 다룬 <어둠을 무서워하는 꼬마 박쥐에 관하여> 등 각 단편들은 나도 몰래 잠재된 기억의 파편을 맞춰보게 했다.
아무 편도 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 중립을 지키면 나를 지킬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꺼이 괜찮다고 하는 것이다. 기분이 상해도, 상처를 받아도,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 짓는 것이다. 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으면서. 종이필터 밑바닥에 가라앉은 검은색 커피 찌꺼기처럼 갈피를 잡기 어려운 감정이 그래도 남았으면서. (p. 42)
상대에게서 '무슨 말을 듣든 다 괜찮다고 또다시' 말할 거라면, 다시 시작하지 말라고. 괜찮을 땐 괜찮다는 말을, 괜찮지 않을 땐 괜찮지 않다는 말을, 여하튼 언제나 당신의 진심을 말하라고. (p. 44)
괜찮다는 말로 무마한 일이 여럿 있다. 대부분이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여러 사람의 입장을 고려해 내린 결론이었다. 말을 건넨다는 건 상대의 반응을 일일이 생각하는 과정 같다. 그래서인지 내 생각보다는 무마하는 쪽이 좀 더 평화로워 보였다. 내 속은 불타는데도. 이젠 상대가 욕을 하고 보채도 내 맘이 서지 않으면 단호하게 내 입장을 전달해야 더 이상 다치지 않는다는 걸 안다.
나는 자주 불안한 사람이다. 이 문장을 입 밖에 내어 말할 수 있게 되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통증의 모양과 형태를 아는 것은 질병을 짐작하는 실마리가 된다고 한다. 똑같은 가슴 부위의 동통이라도, 불타는 듯 아프면 위통이고 조이듯 아프면 심장의 문제라고 추측한다는 말을 들었다. 불타는 듯 아픈지 조이듯 아픈지 쥐어짜듯 아픈지는 아무도 대신 느껴줄 수 없는 일이다. 오직 자신만이 그것을 알 수 있다. (p. 137)
안 될 거라 생각했던 게 되고, 될 거라 생각했던 게 안되는 일이 내게도 있었다. 불안은 이 간극의 차이에서 오는 것 같다. 심해 깊은 곳에 내재된 건 나도 모른 채 돋아난 열등감이고 같은 재능을 가졌으니 비교를 하게 된다. 오직 자신만 알기에 고독하고 외롭고 힘들다. 그러니까 늘 '나 같이 불행한 사람은 없다'라고 자책하게 되고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된다.
차이는 고민에 빠지게 만든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차이에서 오는 오묘한 상관성 때문에 매력을 느끼기도 하고 눈물과 희열을 보이기도 한다. 책의 전반부에서 물의 어는 점과 녹는 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다를 것 같은 둘의 온도는 똑같다. 똑같은 온도에서 한쪽은 얼고 한쪽은 녹는다. 마치 인간관계 같다. 우리도 서로를 녹여주고 얼리는 그 지점이 같을까? 그럼 조금의 노력만 기울여도 되는 걸까? 사라지더라도 다시 만들 수 있는 눈사람처럼, 매법 다시 만들 수 있는 관계라면 좋겠다. 그럼 내일이 아니라 오늘을 살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사라진 것들은 한때 우리 곁에 있었다.
녹을 줄 알면서도, 아니 어쪄면 녹아버리기 때문에 사람은 눈으로 '사람'을 만든다.
언젠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오늘을 사는 것처럼. (p. 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