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짐, 맺힘 문지 에크리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학과 지성사>에서 '문지에크리'라는 산문 시리즈를 시작한다길래 주저 없이 신청했다. 이제니, 이광호, 김소연 등 평소 좋아하던 작가님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김현 작가님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문학 평론가였던 그가 생전에 발표했던 글들을 다시 편집해 모은 <사라짐, 맺힘>은 1960년~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위화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걸 보면 생활상은 세련도 차이일 뿐 가치의 본질은 그대로임으로 알 수 있었다. 도시의 삭막함, 물질만능주의, 단절되어가는 관계, 개인주의, 현대화의 이면들은 2019년 지금과 다를 바 없었다.

 

그 확신은 그곳에 다시 와야겠다는 다짐의 결과가 아니라, 다시 오고 안 오고는 관계없이, 그곳이 좋은 곳이라는 확인의 결과이다. (p. 23)

 

그가 작고했을 때, 나는 태어났으니 그가 풀지 못한 삶의 질문을 글로서 마주한다. 도시화가 한참 진행되던 과도기적 시기는 고층 아파트와 편리한 대형마트가 들어선다. 나에게 당연한 생활방식이 그에게는 낯설다. 귀찮더라도 사람 냄새가 나던 시간을 그리워하는 마음속에서 복잡한 도시의 삶에 지친 영혼을 마주한다. 들어섰거나 이미 들어서 있거나 관계없이 우리는 한 방향으로 마음을 위탁하고 있었다. 그가 읽었던 문학작품들, 보고 느꼈던 미술작품들, 먹고 자랐던 공간과 사람의 틈은 갈라진 나의 심장에 들어와 "그래, 이거지"하고 감정을 동하게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하는 위상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갇혀 있다고 느끼느냐 아니면 해방되어 있다고 느끼느냐에 있다. 그것은 위상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의 문제이다. 그것은 의식의 섬세한 조작을 필요로 한다. (p. 117)

 

우리 거의 모두는 계면의 슬픔 음색을 더욱 사랑한다. 우리는 아직도 즐거워해야 할 일보다는 슬퍼해야 할 일이 많은 곳에 살고 있나 보다. (p. 197)

 

슬프지만 슬픔에 꺾이지 않는 강한 내면이 느껴진다. 또르르 떨어지는 이슬처럼 흘러가는 존재인 인간이 하찮고 잠시뿐인 여정을 어떻게 걸어나가야 할지 생각해보게 한다. 사라진 자리는 텅 비어있지 않다. 새로움이 태동하고 자라나 나름대로의 열기를 내뿜으며 가득 채운다. 즐거운 나날은 아니지만 사무치게 슬픈 나날도 아닌 삶이란 여행은 약간의 오차 속에서 끌어올려진 희망과 절망의 노래가 아닐까. 그가 한 미술가의 처참한 노력 속에서 자신의 초상을 마주했던 것처럼.

 

삶, 그것 때문에 고통하지 않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그것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관찰하려 하는, 그래서 의외성을 발견하는 한 미술가의 처참한 노력,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초상이었다. (p. 26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