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나희덕 지음 / 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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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하며 바라본 시인의 시선에는 평범한 것들의 특별함이 깃들어 있다. 그녀의 글을 읽다 보면 내가 바라보는 건, 김 서린 안경으로 바라본 뿌연 세상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가만히 있으면 김은 눈 녹듯 서서히 사라지지만 마음만 먹으면 안경닦이로 깨끗이 닦으면 초점이 선명해진다. 넓은 시야를 갖는 건 생각만큼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왜 나는 영국의 구름이 더 특별하다고 여겼던 것일까. 생각해보니, 그건 구름의 차이가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모처럼 하늘을 보고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잃어버린 것은 구름이 아니라 구름을 바라볼 시간과 마음이었다. (p. 40~41)

 

그녀는 세계 곳곳으로 나아가 산책한다. 가만히 올려다본 영국의 하늘에서 신선함을 느끼기도 하고, 골동품으로 들여온 괘종시계를 보며 시간의 속성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하고, 누군가의 등을 쳐다보며 뒤는 항상 무방비 상태인 자신을 엿보기도 한다. 여행은 같은 자리에 있으면 느끼지 못할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건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루를 살아가는지에 따라 매일 변한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이 삶을 강하게 구부릴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지? 더 낮게, 더 낮게, 엎드리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바람이 지나갈 때까지 뿌리는 흙을 향해 더 맹렬하게 파고드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엎드렸던 흔적을 나무도 사람도 지니고 있다. (p. 33)

 

그녀의 괘종시계는 독촉하지 않는다. 이제 정시마다 댕댕- 울리는 종소리도 제멋대로인 낡고 쓸모없는 시계는 결국 이렇게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을 '통제하도록' 만들어진 물건이 목적이 사라지자 빗장을 푼 듯 자유로워진다. 산책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춥다고 스마트폰만 보며 따뜻한 장판 안에서 나가지 못하는 나는 통제된 인간이다. 주변에 필요한 것 같은 물건만 잔뜩 쌓아놓고 필요한 물건은 '귀찮다고' 가져오지 않는다. 통제와 귀찮음이 맞닿아 있다. 난 걸어보기도 전에 주저앉아 가버린 것들이 알아서 자리를 찾아오도록 미련하게 바라고 있었다.

 

시계는 시간의 상징 형식인 동시에 실제로 우리의 시간을 매 순간 지배한다. 아침에 출근하면서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시계는 종일 우리를 따라다니며 일과를 지시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내가 삶의 주체가 되어 사는 게 아니라 시계가 이끄는 대로 분주하게 뛰어다니다가 하루가 지나가고 만다. 몇 시에 약속, 몇 시에 회의, 몇 시에 강의……. 그 숫자들 속에 갇혀 어느새 하루가 지나고, 그렇게 일생이 지나갈 것이다. (p. 58)

 

그녀에게 걸음은 세상이 멀찍이 앞서갈 때마다 자신만의 속도를 갖는 일이다. 조금은 거친 숲속으로 걸어들어가 가시에 찔리고 상처가 났다가도, 내 걸음이 다른 시공간의 속도와 같아지 날을 꿈꾸는 희망이기도 하다. 애타는 '거기'에 도착할 수 있을 때까지 흔적을 새기고 삶을 구부리는 압력에 순응한다. 그렇게 나를 유연하게 만들다 보면 닿아있을 도착이란 단어 앞에 나는 왜 숨만 차게 뛰려 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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