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감옥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고요한숨 / 2020년 11월
평점 :
절판


<야시> 쓴 작가 쓰네카와 고타로의 단편집 <가을의 감옥>은 각각 시간, 공간, 환상에 갇힌 인물의 이야기를 담긴 세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절판이 되자 재출간 문의가 쇄도한 책이라고 해서 얼마나 흥미롭고 재미있을지 기대하며 책을 펼쳤다.

첫 번째 단편은 책 제목과 같은 <가을의 감옥>으로 갑작스럽게 가을의 어느 하루, 정확하게는 11월 7일 수요일이 반복되는 삶을 살게 된 아이(이름이다)의 이야기다.
그렇게 매일 같은 말, 같은 행동을 하는 수많은 안드로이드 속에서 유일한 사람으로 지내던 아이는 고독함을 느꼈고, 반복되는 11월 7일 수요일에서 벗어나고자 잠을 자지 않고 밤늦게까지 깨어있어봤지만 일정 시간이 되면 어느 장소에 있든, 무엇을 하고 있든지간에 모포가 몸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고, 눈을 뜨면 다시 11월 7일 아침을 맞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 벤치에서 책을 읽던 어느 날 한 남자가 말을 걸어온다.
그의 이름은 류이치이고, 아이처럼 11월 7일을 반복하며 살고 있는 ‘리플레이어’였다.
류이치는 이렇게 11월 7일을 반복해서 살고 있는 리플레이어들이 더 있다고 했고, 류이치 덕분에 매일 리플레이어들이 모이는 공원 분수대 앞에서 이누카이 씨와 중학생 소녀 구미를 비롯한 다른 리플레이어들을 만나게 된다.

처지가 같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 아이는 더이상 외롭지 않게 되었지만 리플레이어들이 한두 명씩 사라지는 문제가 있었다.
사람들은 ‘기타카제 백작’이라고 부르는 것이 리플레이어들을 사라지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해리포터> 시리즈 속 디멘터처럼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고 주변의 빛과 소리를 집어삼키며 흰 천을 뒤집어쓰고 둥둥 떠다니는 사람의 형상을 한 것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만하다.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가는 자들은 하루를 어떻게 살아갈지, 기타카제 백작의 존재는 리플레이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리플레이어들이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일지를 궁금해하며 첫 번째 단편부터 재미있게 읽었다.


“우리는...... 그림자일까?”

우리의 본체는 이미 한참 앞질러 가버렸고, 여기에 있는 우리는 본체가 11월 7일에 벗어 던져놓은 그림자 같은 것이 아닐까? 세계는 매일 앞으로 나아가면서 그 시간마다에 그림자를 버려두고 가는 것인지도 몰라.

9월 9일에는 그 날짜에 벗어던진 그림자들이 9월 9일을 영원히 반복하고, 8월 3일에는 8월 3일을 영원히 반복하는 그림자들이 있는 것은 아닐까?

p.66-67


두 번째 단편은 <신의 집>으로, 봄밤에 술에 취한 주인공이 초가지붕과 툇마루가 있는 낯선 집에 발을 들이면서 시작된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 밖으로 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그 집에 갇혀 지내던, 가면을 쓴 할아버지가 주인공을 집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코로나19로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우울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뛰어난 인터넷 통신망과 택배 서비스라도 있지, 주인공이 갇힌 집은 오랜 세월이 흐른 티가 역력할 정도로 낡은, 화장실은 재래식으로 밖에 위치했고 전기와 수도도 없어서 등불을 켜고 우물 물을 퍼다 사용해야 하는 집이었다.

그러나 이 집은 신비한 면이 있었는데, 먼저 우물의 물맛이 무척 뛰어났으며 뜰에는 감자와 호박 중간쯤 되는 맛이 나는 처음 보는 과일(주인공은 망고감자라고 부른다)이 열리는 나무가 있었는데 이 둘은 마치 신선의 음식처럼 사람의 노화를 늦추는 힘이 있는 것으로 보였고, 이건 더 중요한 점인데, 초가집은 마치 기차처럼 정해진 날짜에 일본 전국 곳곳의 정해진 장소로 이동을 했다.

시간이 흐르자 초가집에 갇힌 생활이 몸에 익기 시작했고 의도치 않게 건강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누구든 초가집에 발을 들이기가 좀 더 쉽도록 카페 간판도 만들어서 달아놓는다.
그리고 간판 덕분에 사람들이 초가집으로 발을 들이기 시작하고, 주인공은 그들 중 한 사람에게 이 신비한 집 지킴이 자리를 내주기로, 그러니까 그 사람을 이 집에 가두고 자신은 탈출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후 이야기는 주인공도 나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쪽으로 흘러간다.


어떻게 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그날 밤 오키나 가면 남자가 했던 말이 전부 진실이라면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대역을 찾는 것이다.
지킴이는 집을 벗어날 수 없다. 다만 지킴이 노릇을 대신해줄 사람이 있으면 나갈 수 있다.
아마도 터 안에 두 사람이 있으면 한 사람은 나갈 수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탈출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누군가 이리로 들어오기를 거미처럼 끈기 있게 기다리는 것이다.
누군가 길을 잃고 들어오면 먼저 인사를 건네고 터 안으로 불러들어야 한다. 툇마루에 붙들어 앉혀놓고 나만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아마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았다.
나로서는 그 가능성에 희망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

p.96-97


마지막 세 번째 단편은 <환상은 밤에 자란다>이고, 어지러운 환상을 소재로 해서인지 앞의 두 단편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가 쓰였다.
처음에는 환술을 사용할 줄 아는 할머니와 그의 손녀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이야기가 계속 전개될수록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이 세계는 환상으로 가득 차 있단다.
언제였던가, 할머니가 말했다.
누구나 환상을 믿고, 환상에 조종되고, 환상의 노예가 되고, 많은 시간을 환상에 바친단다. 짧은 생을 살면서 진짜를 꿰뚫어보는 놈은 한 명도 없단다.

p.148


나도 영화 <사랑은 블랙홀>처럼 같은 하루가 계속 반복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고,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지 않아서 영원히 건물 안에 갇히고 마는 악몽도 여러 번 꿨기 때문에 <가을의 감옥>에 수록된 단편들을 더 이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거기에다 쓰네카와 고타로는 ‘기타카제 백작’을 등장시켜 무한하고 무료한 시간을 또다시 한정된 시간으로 만들어 무한한 삶과 유한한 삶 모두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거나, 독자가 갇혀있는 주인공의 탈출에 집중할 때 생각지도 못한 특징을 부여한 인물을 등장시키며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다.

그리고 단편집 <가을의 감옥>은 여러모로 소설과 잘 어울리는 때에 재출간 되었다.
<가을의 감옥>을 읽으면서는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겨울이 되기 전 아직 가을이 지나가지 않은 지금 읽으면 소설의 분위기를 느끼기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신의 집>은 코로나19 때문에 오랜 시간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며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 시기에 읽으면 주인공에게 더 이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단편집을 읽고 나니 작가의 유명작 <야시>도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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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 제작자들
요아브 블룸 지음, 강동혁 옮김 / 푸른숲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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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몇 번은 누가 내 삶에 의도적으로 개입해서 일을 벌인 듯한 기분이 들어 “이거 깜짝카메라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곤 하지 않는가?
특히 안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머피의 법칙이나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샐리의 법칙이 떠오를 때에는 우연이 우연 같지가 않다.
나의 경험이 설계의 결과물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 경험이 있는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비슷한 생각을 한 다른 사람의 상상력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소설 속 우연 제작자들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끔 교묘하게 상황을 설계해서 대상의 인생을 변화시킨다.
예를 들면 음악적 재능을 가졌지만 자신의 재능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훌륭한 작곡가가 되도록 먼저 일자리에서 해고 당하게 한 뒤 작곡을 시도할 마음이 들게 음악에 노출시키는 등 우연 제작자가 여러모로 고군분투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제작했던 최초의 우연을 계획해둔 페이지를 펼쳤다. 그것은 신발 공장에 다니는 어떤 직원이 일자리를 잃게 만드는 임무였다.
(...)
물론, 그 계획은 실패했다. 가이가 직원들의 출근 시간을 잘못 계산하는 바람에 신발 공장에서는 다른 사람을 해고했다. 그 시절의 가이는, 각각의 사람이 더 큰 그림 속에서 맺고 있는 관계를 들여다보지 못하고 하나의 사람만을 염두에 두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작곡가가 사는 동네의 목요일 아침 교통 체증 패턴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표적이 도착해 있을 것으로 생각한 시간에 공장에는 다른 사람이 나와 있었다.

가이가 실행하려 했던 작전 전체가 공책을 네 페이지에 간략하게 그려져 있었다. 겨우 네 페이지라니! 제기랄, 대체 난 내가 얼마나 잘났다고 생각한 걸까?

p.25-26


하지만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나비효과처럼, 조금만 삐끗해도 일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버리기 때문에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대상과 그 주변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분석 그리고 수많은 경우의 수를 바탕으로 한 섬세한 작업을 필요로 한다.


방금 완료한 임무에 관한 크고 자세한 다이어그램이 벽에 그려져 있었다. 가운데에 ‘셜리’라고 적힌 원이 하나 있고, 두 번째 원에는 ‘댄’이 적혀 있었으며, 그 둘에서 뻗어나가는 선이 수없이 많이 그려져 있었다.
그 옆의 기나긴 목록에는 성격과 특징, 장래 희망, 욕망 등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파란색 선(수행할 행동), 검은 선(고려해야 하는 연관성)으로 연결된 원도 엄청나게 많았다. 각 원 안에는 작게, 머뭇거리는 듯한 선으로 메모가 적혀 있었다. (...) 왼쪽 아래 구석은 계산을 위한 공간이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커피 잔에 충분히 이목이 쏠릴 만한 커피의 양, 줄리아의 향수병에 남아 있어야 하는 향수의 양, 수도관의 시간당 유량, 버스가 운행 중 마주칠 물웅덩이의 바람직한 깊이, 여자아이들이 흥얼거리기 좋아하는 노래 등등.
그 외에도 수백 가지의 다른 세부 사항들이 다양한 색깔의 작은 글자로 적혀 있는 목록이 있었다. (...) 단 하나의 목표점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모든 가능성과 하위 가능성, 맥락과 생각, 또 그 조합 사이를 오가며 선들이 뻗어 있었다.
확실히, 공책에 적어가며 일하는 수준은 오래전에 넘어섰다.

p.41-42


그렇기 때문에 우연 제작자가 되려면 우연 제작자 수련 과정을 거쳐야 하고, 주인공 가이와 에밀리 그리고 에릭 셋은 우연 제작자 수련 과정 동기다.
가이는 인연을 맺어주는 우연 제작이 특기인데 반에 건조해 보이지만 사실은 한 여자를 잊지 못하는 순정파이고, 에밀리는 그런 가이에게 마음이 있으며, 에릭은 그 둘을 곁에서 지켜본다.
그런데 우연을 만들며 실수하기도 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우연 제작에 꽤 능숙해진 것으로 보이던 가이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우연을 만드는 과정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와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인연 그리고 등장인물의 정체는 소설을 더욱 흥미롭게 한다.
또 한 가지, 책 중간중간 우연 제작자 수련 과정에 사용하는 교재에서 발췌한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글을 읽을 때면 우연 제작자 수련 과정이 실제로 있을 것만 같아 더 재미있었다.

<우연 제작자들>을 읽으면서 나는 인연과 운명에 대해서 생각하고, 어쩐지 삶에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소설 도입부에서 가이가 카페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셜리와 손님으로 방문한 사관생도 댄을 이어주기 위해서 셜리에게 어떤 일을 했냐면, 댄이 셜리를 인식하게 하려고 셜리가 커피잔를 떨어뜨리도록 설계해서 셜리는 카페에서 해고 당했고, 수도관을 터뜨려서 셜리가 버스나 택시를 타지 못하게 하고, 그래서 택시인 줄 착각하고 타게된 댄의 차에 휴대폰까지 놓고 내리게 했다.
셜리 입장에서 보면 그날은 재수가 없는 날이었지만, 그날의 재수 없는 일들은 댄과의 인연을 위해 가이가 그린 큰 그림이었다.

앞서 나온 다른 우연 제작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대상이 휼륭한 작곡가가 되도록 하기 위해 먼저 직장에서 해고 당하게 해야 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니 나 또한 당장 보기에는 실망스럽거나 재수 없거나 힘든 일을 겪을지라도 멀리에서 보면 그런 일들이 다 이유가 있고 결국에는 잘 되기 위함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연 제작자들>은 국내에 처음 소개된 작가 요아브 블룸의 데뷔작인데, 이어서 같은 작가의 <다가올 날들의 안내서>(가제)도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그 또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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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
안토니오 G. 이투르베 지음, 장여정 옮김 / 북레시피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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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작은 도서관 하면 나는 옆 아파트 단지 관리소에서 운영하고 있는 작은 도서관이나 지하철 역사 안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 떠오른다.
하지만 이 책 제목의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은 그보다도 훨씬 작은, 책 여덟 권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를 해주어 살아있는 책이라고 불리는 여섯 사람이 전부인,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도서관보다 거대하게 느껴졌을, 그런 도서관이었다.
그리고 그 도서관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 안에 실재했으며, 디타라고 불리는 소녀가 그곳의 사서였다.

소설이 시작되기 앞서 위치한 발췌문을 보면 알겠지만, 독서가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은 알베르토 망겔도 저서 <밤의 도서관>에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안에 있었던 아주 작은 비밀 도서관에 대해서 언급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은 저자 안토니오 이투르베가 관련 자료를 조사하고 실존 인물인 디타 크라우스와 이야기를 나눈 뒤 상상력을 더해 써내려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디타 아들러는 부족함 없는 가정에서 자라던 소녀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만행의 피해자가 된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 게토를 거쳐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런 말을 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아우슈비츠는 죽음의 수용소라고 불릴 정도로 악명 높은 수용소였음에도 불구하고 (디타 크라우스의 말을 빌리자면) 엄청난 행운 덕분에 가족캠프라는 곳에 들어가게 되었던 디타는 아우슈비츠 내 다른 구역의 사람들보다는 그나마 나은 형편이었다.


역사상 모든 독재자며 폭군이며 압제자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이념과 상관없이, 아리아인이든 아프리카인이든 아시아인이든 아랍인이든 슬라브인이든 다른 어떤 인종이든, 대중혁명을 지지하든 상류층의 특권을 옹호하든 신의 뜻을 믿든 계엄령을 믿든, 그들은 책을 가혹하게 핍박했다. 책은 아주 위험하다. 책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p.18


아우슈비츠의 가족캠프 안에는 알프레드(프레디) 허쉬라는 유대인이 아이들을 모아서 돌보면 부모들의 노동력을 동원하기 쉬울 거라며 독일 관리당국을 설득해서 만든 막사가 있었는데, 31구역이라 불리는 그곳에서 프레디 허쉬와 몇 어른들이 비밀리에 아이들을 가르쳤다.
나치 독일은 강제수용소 내 아이들의 학습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들키면 절대 안 되는 비밀 학교였던 셈이다.
열네 살 소녀 디타 아들러는 그곳에서 여덟 권의 책을 관리하는 사서를 맡아 목숨을 걸고 책을 지킨다.

책은 단 여덟 권이지만 책이 허용되지 않는 강제수용소 안에서 책을 단 한 권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게 발각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기에 수십 수백 권의 책보다도 크고 무겁게 느껴졌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검열로 나치 친위대가 막사에 들이닥쳤을 때 책을 미처 다른 장소에 숨기지 못해서 디타가 책을 옷 안에 넣고 정렬해야만 했던 상황이나, 끔찍한 생체 실험을 해서 죽음의 박사라고 불리며 악명이 자자한 멩겔레가 디타를 불러 세웠을 때는 아찔했다.


“이 책은 상태가 아주 안 좋아. 심각해.”
“제가 손볼게요.”
“그리고 어쨌든...... 아이들, 특히 여자아이들이 읽을 책은 아니야.”
디타는 기분 나쁘다는 듯 실눈을 떴다.
“진짜 죄송한데, 프레디, 저 열네 살이에요. 캠프 중앙로 저 끝에 가스실이 있고 매일같이 수천 명이 그곳으로 보내지는 걸 목격했는데, 그런데도 진짜 제가 아직도 소설을 읽으면서 충격받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허쉬는 놀라서 디타를 쳐다보았다.
(...)
디타는 받은 책을 전부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망가지거나 찢어지고 낡은, 적갈색 곰팡이가 잔뜩 핀, 훼손되기까지 한 책들이었다. 그러나 이 책들이 없으면 수세기 문명을 거쳐 전해진 지혜가 그대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지리학, 문학, 수학, 역사, 언어...... 전부 소중한 것들이었다.
디타는 목숨을 걸고 이 책들을 지켜낼 것이다.

p.46-47


여덟 권의 책들은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열네 살 소녀가 이렇게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했는지 나는 책을 읽기 전부터 무척 궁금했는데, 여덟 권의 책이 어떤 책인지 알고나서는 기대했던 책과 거리가 있어서 김이 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책을 계속 읽으며 너덜거리다못해 책장이 떨어져 나가고, 재미를 떠나 심지어 외국어로 쓰여 읽지도 못할 책들이 강제수용소 안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의미였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강제수용소 안에 있었지만 지도책을 읽으며 전 세계를 비행했던 디타처럼 다른 사람들도 책을 접하고 배움을 이어가면서 강제수용소 바깥 세상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을 것이고, 책과 배움은 삶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 이토록 암울한 수용소이건만, 그래도 책을 보니 이보다는 덜 우울했던, 기관총 소리보다 사람들 말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지던 그런 시절이 떠올랐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를 다루듯 디타는 책을 한 권 한 권 조심히 만져보았다. 첫 번째 책은 철도 안 돼 있고 중간에 몇 장씩 없어진 데가 있는 지도책이었다. 책에는 과거의 유럽,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제국들이 담겨 있었다. 다홍색, 밝은 녹색, 주황색, 남색의 모자이크로 이뤄진 이 정치적인 지도들은 짙은 갈색 진흙, 빛바랜 누런 막사, 구름 낀 잿빛의 하늘까지 디타를 둘러싼 이 칙칙한 주변환경과 선명한 대조를 이뤘다. 책장을 손으로 빠르게 넘기자 마치 전 세계를 비행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바다와 산을 건너고 손가락으로 다뉴브강, 볼가강, 나일강을 따라 여행했다. 바다며 숲이며 전 지구의 산맥이며 강, 도시들, 세계 여러 나라까지 그 수백만 평방미터를 이렇게 작은 공간 안에 다 집어넣다니 책만이 성취할 수 있는 기적이었다.

p.45


나는 실존 인물 디타 크라우스와 소설 속 인물 디타 아들러를 보면서 <안네의 일기>로 알려진 안네 프랑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치 친위대의 앞에서도 품 안의 책을 놓지 않았으며 막사에서는 언변으로 좋은 자리인 위층 침대 자리를 얻어냈을 정도로 용감하고 재치있는 디타는 안네 프랑크의 또래였고,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와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에서 지냈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네 프랑크는 슬프게도 강제 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디타는 살아남아 강제 수용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디타가 살아서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디타 크라우스의 말대로 타고난 건강 체질과 엄청난 행운 덕분이라는 데에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 이유들의 한편에, 조그마하게라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안에서 만난 책들 또한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제대로 먹을 수도 없어 굶주리는 나날이 이어질 뿐만 아니라 살아 나갈 가능성도 희박한 때에 책이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은 나치의 악랄한 행위에 대적할 수 없었고, 가스실에세 학살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도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시커먼 구덩이 같은 그곳에서, 도서관이 들려주던 이야기의 힘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냈습니다. 아이들이 아이들로 남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결코 패한 게 아닙니다.
(...)
바르셀로나에서,
안토니오 이투르베

p.8


책이 쏟아지듯 출간되며 어디서든 어렵지 않게 책을 찾을 수 있는 곳에 나는 살고 있고, 이 책을 읽는 독자 대부분도 그러할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있을 때에도 내 옆에 있는 책상에는 책장이 받아들이지 못한 책이 쌓여 있었고, 책을 좋아하면서도 이사 때면 그렇게 쌓인 책을 무거운 짐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을 읽고 책상 위의 책들을 바라보며 내가 책의 의미와 소중함을 잊어버린 건 아닌지 되돌아보는 시간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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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호라이즌스, 새로운 지평을 향한 여정 - 명왕성을 처음으로 탐사한 사람들의 이야기
앨런 스턴.데이비드 그린스푼 지음, 김승욱 옮김, 황정아 해제 / 푸른숲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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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하러 나가면 나는 걷다가 멈춰서 하늘을 올려다 보곤 한다.
어두운 하늘을 밝히고 있는 달이나 짙은 하늘 위에 총총히 수놓아져 있는 별을 보고 있노라면 하늘에서 눈을 뗄 수가 없고, 내 눈에 담기는 아름다운 광경 그 너머에 있는 우주를 생각하게 된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그 끝은 절대 볼 수 없을 우주의 무한함과 그 무한한 공간에 있을 수많은 행성과 위성 등을 떠올리면 숨이 막힐 것만 같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내가 그렇게 가만히 서서 바라보기만 한 반면에 미지의 우주를 향해 한 발자국이라도 더 멀리 가고 조금이라도 더 알고자 하는 호기심과 함께 행동력을 가지고 발로 뛰며 움직인 사람들이 있었다.
<뉴호라이즌스, 새로운 지평을 향한 여정>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책은 명왕성을 처음으로 탐사하기까지의 기나긴 여정과 명왕성 탐사, 그리고 그 결과를 담았다.
나는 지금까지 화성 탐사나 달 탐사에 대해서는 여러 번 들어봤지만 명왕성 탐사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책을 읽어보니 당시에 명왕성 탐사는 꽤 큰 화제였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명왕성은 제2의 지구로 불리는 화성과 달리 주목 받지 못한 소행성이지만, 태양계 끝에 위치한 명왕성까지의 여정은 태양계를 끝까지 종단하며 인류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큰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지구에서 명왕성까지의 거리만큼이나 명왕성까지의 여정은 지난하고 또 지난했다.
뉴호라이즌스 호가 지구에서 명왕성까지 이동하는 데 10년이 걸렸는데 명왕성 탐사 제안서가 승인될 때까지만 해도 10년 이상이 걸렸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뉴호라이즌스 호가 명왕성 탐사를 마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겠는가?


SSES 회의에서 헌텐은 토론 중 중요한 순간에 앞으로 나셨다. 앨런이 다음 번 새로운 시작의 후보로 명왕성 탐사 계획을 꺼내 들었다가 공격을 받은 뒤였다. 화성이 더 중요하고 지구에서 가기도 쉽기 때문에 명왕성은 나중으로 미뤄도 된다고 누군가가 주장하자 헌텐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안을 한번 둘러본 뒤 명왕성에 탐사선을 보내야 하는 모든 과학적 이유들을 요약해서 발언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크게 소리치는 듯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젠장! 탐사선이 명왕성에 도착할 때쯤 나는 세상에 없을 겁니다. 설사 살아 있다 해도 그런 상황을 의식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닐 거예요. 그래도 이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맞습니다. 과학이 중요해요. 그러니 그냥 합시다.”

p.115


뉴호라이즌스 호가 명왕성까지 도착하는 데 단 열흘 앞두고 있었을 때 발생한 연락 두절 사고는 14년 동안 2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들인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 수 있었던 만큼 무척이나 아찔했지만 기술적 문제 이전에 외압으로 인해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될 뻔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러한 수많은 고난을 헤치고 드디어 명왕성 탐사선 뉴호라이즌스 호가 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06년에는 명왕성이 행성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퇴출되는 일이 일어났다.

라떼는 태양계 행성의 앞자리만 가져와 외울 때 ‘수금지화목토천해명’으로 마지막에 ‘명왕성’이 위치해 있었는데, 2006년에 새로운 태양계 행성 정의에 의해 달보다 작으며 궤도가 다른 명왕성이 더이상 행성이 아닌 왜소행성으로 분류되면서 이제는 태양계 행성을 외울 때 ‘수금지화목토천해’까지만 외우면 된다.
명왕성이 퇴출되어 학생들은 한 글자라도 덜 외울 수 있으니 좋을지 모르지만 명왕성과 뉴호라이즌스 팀에게는 좋을 리 없었다.

그러고보니 명왕성의 영문이름 플루토(Pluto)는 그리스 신화 속 저승의 신 하데스의 로마 이름에서 가져왔고, 하데스는 주요 신임에도 불구하고 지하에 있기 때문에 올림포스의 12신에는 포함되지 않는데, 명왕성의 처지가 하데스와 비슷해 보인다.
아무튼 이전에 명왕성 퇴출에 대해 찾아보았을 때에는 그대로였다면 태양계 행성이 계속 늘어났을 테니 (학생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이야기다) 새롭게 태양계 행성을 정의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명왕성 퇴출에 대한 다른 시각을 알 수 있었다는 것도 또 하나의 수확이었다.

<뉴호라이즌스, 새로운 지평을 향한 여정>의 저자는 두 사람, 앨런 스턴과 데이비드 그린스푼이다.
두 사람은 모두 명왕성 탐사 프로젝트 관계자이지만 앨런 스턴은 프로젝트 처음부터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고 데이비드 그린스푼은 (그 또한 과학자이지만) 이 책에 관해서는 주로 작가로서 활약했다.
그렇게 명왕성 탐사 프로젝트의 중심 인물과 주변 인물이 500여 페이지에 걸쳐 그 과정을 자세하게 적어내려간 결과물이니, 이 책을 읽으며 명왕성과 탐사 과정에 대해서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명왕성을 탐사하기 위한 끈질긴 노력과 명왕성, 그러니까 우주와 과학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까이에서 보는 듯했다.
그래서 깜짝 선물처럼 책 중앙에 위치해 다른 장과 달리 사진 자료에 적절한 종이에 인쇄된 사진 자료들, 뉴호라이즌스 팀원들의 얼굴, 뉴호라이즌스 호가 실린 로켓이 발사되는 장면, 크게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습, 탐사의 결과물 등을 보았을 때 감동이 더했고, 이 사진 자료들은 글과 함께 큰 상승 효과를 내서 제 역할을 다 했다.

또 책을 읽으면서 우주를 배경으로 하거나 소재로 한 영화들이 여럿 떠올랐지만 가장 선명하게 떠오른 영화는 제이크 질렌할이 주연으로 출연한 <옥토버 스카이(October Sky, 1999)>였고, 내가 수없이 본 이 영화는 냉전이 지속되던 때 탄광 마을에서 살던 호머 히컴(Homer Hickam)이 주변의 반대와 계속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노력하여 동경하는 로켓을 쏘아올리는 데 성공한다는 실화를 담고 있는데, 둘 모두 우주를 향한 열정으로 흘린 땀이 어린 이야기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호머 히컴은 나중에 나사(NASA)에서 일하게 되고,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인물 중 하나가 된다.

마지막으로, 뉴호라이즌스 호가 명왕성까지 가기 위한 과정과 아름답게만 보였던 표지의 사진이 뉴호라이즌스 호가 태양계 바깥으로 멀어지면서 명왕성을 바라본 사진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다시 표지를 보니 어쩐지 가슴이 벅찼다.
뉴호라이즌스 호와 뉴호라이즌스 팀과는 달리 따뜻하게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 위에 앉아 책을 읽으며 그들의 여정을 간접적으로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어쩐지 민망하면도 영광이었고, 앞으로 인류의 우주를 향한 행보가 기대되었다.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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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하버드까지 (10만 부 기념 스페셜 에디션) - 나의 생존과 용서, 배움에 관한 기록
리즈 머리 지음, 정해영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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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배움의 발견>을 읽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책 한 권이 떠올랐는데,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난 소녀가 배움을 통해서 인생을 바꾸었다는 저자의 실화를 담은 에세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년 전에 읽어서 이제 머릿속에는 굵직한 줄거리와 몇몇 인상적인 장면만이 남아 있는 그 책의 제목은 <길 위에서 하버드까지>로, 이번에 10만 부 기념 스페셜 에디션으로 새단장을 했다는 소식을 보면서 옛 친구를 만난듯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10만 부 기념 스페셜 에디션은 책 표지뿐만 아니라 내지 디자인도 붉은색 계열로 표지에 맞춰 바뀌었다.

<길 위에서 하버드까지>를 읽은 지 시간이 꽤 흘렀지만 아직도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들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이번에 다시 저자 리즈 머리의 이야기를 읽을 생각하니 책을 손에 들었을 때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책은 친구 집을 전전하며 떠돌아 다니던 시절의 리즈가 거울을 보며 자신의 엄마와의 공통점을 찾는 에필로그로 시작을 하고, 엄마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본문으로 넘어간다.
리즈의 엄마는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아빠와 학대를방관하는 엄마가 있는 집으로부터 도망쳐 나와 열세 살부터 친구 집을 전전했고, 그런 불우한 가정 환경 때문인지 일찍부터 마약에 손을 대서 약물 중독자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리즈는 정부에서 주는 복지 수당을 5일만에 다 써버리고 딸이 모아둔 돈을 훔쳐 코카인을 사는 약물중독자 부모 밑에서 먹을 것이 없어 언니와 치약이나 체리맛 챕스틱을 나눠 먹기도 했을 정도로 배고프고 악취를 풍기는 집에서 자랐는데, 이런 환경이 리즈를 학교와 집 밖으로 내몰았다.


우리는 아직 젊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우리가 어디에서 잠을 자건, 북쪽으로 향하는 지하철 D선의 꾸준한 흔들림 속에 머리를 기대거나 별빛 아래서 공원 도로 벤치의 단단한 판자에 엎드려 눈을 감고 있을 때, 내가 간직해야 할 것은 나의 가족과 집이라는 개념뿐이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다녀야 할 짐은 베드퍼드 파크에 도착해 서맨사의 따뜻하고 뚱한 목소리를 듣기 전부터 항상 가지고 다녔던, 이제는 익숙해서 가볍게 느껴지는 단출한 보따리뿐이라는 사실을.

p.291


책을 읽다보면 슬프게도 초반에는 리즈의 엄마와 리즈의 삶의 궤적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리즈도 열다섯 살에 결국 엄마와 마찬가지로 집을 나와 친구 집을 전전하거나 밖에서 노숙을 하며 지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맞는 친구와 함께 생활한다지만 미성년자가, 그것도 여자 아이가 그런 생활을 한다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기 때문에 불안정한 생활을 하는 리즈를 보면서 절벽 위 징검다리를 건너는 아이를 보는 듯한 심정이 되었다.


삶은 늘 그런 식이다. 한순간 모든 것이 이치에 닿다가도, 다음 순간 상황이 바뀐다. 사람들이 병에 걸리고, 가족들이 헤어지고, 친구들이 문전박대를 한다. 그곳에 앉아 있는 동안 내가 경험한 급작스러운 경험들이 떠올랐지만, 내 마음 속에 솟아난 감정은 슬픔이 아니었다. 느닷없이, 이유가 무엇인지 몰라도, 그 자리에 다른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인생이 최악으로 변할 수 있다면, 어쩌면 어쩌면 좋은 쪽으로도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내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할 수 있고, 심지어 전 과목 A를 받은 것도 가능했다. 물론 이전에 일어났던 일들에 비추어 보면 현실적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내가 모든 것을 바꾸어놓을 가능성은 있었다.

p.383


하지만 리즈의 엄마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되는데, 죽을 때까지 약물 중독자의 삶을 산 리즈의 엄마와 달리 리즈는 부모를 반면교사 삼았으며 마음을 다잡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공부에 매진하여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기 때문이다.

리즈가 자신의 엄마와는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리즈의 부모가 약물 중독자로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아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아니면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면서도 어려서부터 착하고 영민한 모습을 보여 준 리즈의 성품 때문에?


그러나 해결하기 훨씬 더 어려운 순간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내 입에서 “다 관두자”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런 상황은 아침 6시 20분에 자명종이 울리고 내가 피에프의 집 또는 부모님이 안 계신 다른 집, 즉 규칙도 없고 잠잘 수 있는 시간의 제약도 없는 곳에서 깨어났을 때 일어났다. 열 명 이상이 바닥에 있는 남루한 쿠션과 매트리스 위에서 아무렇게나 자고 있고, 해는 이제 막 떠오르고 있고, 아파트 벽에는 낙서가 도배되어 있고, 맥주병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곳. 모두들 밤새 파티를 하고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은 곳. 밤 시간 동안 나는 층층계에서 숙제를 했고 ㅡ성적표를 정신 집중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여ㅡ 담배 냄새와 파티를 파티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의 떠들썩하고 산만한 유혹을 피하기 위해 나 자신을 분리시켰다. 그러다 밤에 상황이 잠잠해지면 친구의 아파트로 들어가 찾을 수 있는 작은 공간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두어 시간 뒤에 자명종이 울리면, 나는 눈을 뜨고 그곳에 가만히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그럴 때면 담요를 뒤집어쓰고 다시 잠을 자고 싶은 유혹이 너무도 강렬했다. 그 순간 그 유혹은 내 의지를 약화시키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게 만들었다.

p.430-431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리즈는 외부 환경 그리고 자기 자신과 싸우는 삶을 살아왔고, 그녀의 삶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준다는 것은 변함 없다.

<길 위에서 하버드까지>를 처음 읽었을 때 약물중독자를 부모로 둔 리즈의 이야기는 내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는데, 거리에서 방황하는 리즈를 보면서는 내가 가출했던 때가 떠올라 공감도 하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고군분투하며 삶을 살아내고 도전하는 리즈를 응원하면서 책을 읽었다.
그리고 이번에 오랜만에 다시 읽으면서도 여전히 그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리즈 머리의 이야기는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특히 <배움의 발견>을 인상적으로 읽은 독자라면 같은 결을 한 <길 위에서 하버드까지>도 인상적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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