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 제작자들
요아브 블룸 지음, 강동혁 옮김 / 푸른숲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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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몇 번은 누가 내 삶에 의도적으로 개입해서 일을 벌인 듯한 기분이 들어 “이거 깜짝카메라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곤 하지 않는가?
특히 안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머피의 법칙이나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샐리의 법칙이 떠오를 때에는 우연이 우연 같지가 않다.
나의 경험이 설계의 결과물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 경험이 있는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비슷한 생각을 한 다른 사람의 상상력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소설 속 우연 제작자들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끔 교묘하게 상황을 설계해서 대상의 인생을 변화시킨다.
예를 들면 음악적 재능을 가졌지만 자신의 재능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훌륭한 작곡가가 되도록 먼저 일자리에서 해고 당하게 한 뒤 작곡을 시도할 마음이 들게 음악에 노출시키는 등 우연 제작자가 여러모로 고군분투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제작했던 최초의 우연을 계획해둔 페이지를 펼쳤다. 그것은 신발 공장에 다니는 어떤 직원이 일자리를 잃게 만드는 임무였다.
(...)
물론, 그 계획은 실패했다. 가이가 직원들의 출근 시간을 잘못 계산하는 바람에 신발 공장에서는 다른 사람을 해고했다. 그 시절의 가이는, 각각의 사람이 더 큰 그림 속에서 맺고 있는 관계를 들여다보지 못하고 하나의 사람만을 염두에 두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작곡가가 사는 동네의 목요일 아침 교통 체증 패턴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표적이 도착해 있을 것으로 생각한 시간에 공장에는 다른 사람이 나와 있었다.

가이가 실행하려 했던 작전 전체가 공책을 네 페이지에 간략하게 그려져 있었다. 겨우 네 페이지라니! 제기랄, 대체 난 내가 얼마나 잘났다고 생각한 걸까?

p.25-26


하지만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나비효과처럼, 조금만 삐끗해도 일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버리기 때문에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대상과 그 주변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분석 그리고 수많은 경우의 수를 바탕으로 한 섬세한 작업을 필요로 한다.


방금 완료한 임무에 관한 크고 자세한 다이어그램이 벽에 그려져 있었다. 가운데에 ‘셜리’라고 적힌 원이 하나 있고, 두 번째 원에는 ‘댄’이 적혀 있었으며, 그 둘에서 뻗어나가는 선이 수없이 많이 그려져 있었다.
그 옆의 기나긴 목록에는 성격과 특징, 장래 희망, 욕망 등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파란색 선(수행할 행동), 검은 선(고려해야 하는 연관성)으로 연결된 원도 엄청나게 많았다. 각 원 안에는 작게, 머뭇거리는 듯한 선으로 메모가 적혀 있었다. (...) 왼쪽 아래 구석은 계산을 위한 공간이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커피 잔에 충분히 이목이 쏠릴 만한 커피의 양, 줄리아의 향수병에 남아 있어야 하는 향수의 양, 수도관의 시간당 유량, 버스가 운행 중 마주칠 물웅덩이의 바람직한 깊이, 여자아이들이 흥얼거리기 좋아하는 노래 등등.
그 외에도 수백 가지의 다른 세부 사항들이 다양한 색깔의 작은 글자로 적혀 있는 목록이 있었다. (...) 단 하나의 목표점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모든 가능성과 하위 가능성, 맥락과 생각, 또 그 조합 사이를 오가며 선들이 뻗어 있었다.
확실히, 공책에 적어가며 일하는 수준은 오래전에 넘어섰다.

p.41-42


그렇기 때문에 우연 제작자가 되려면 우연 제작자 수련 과정을 거쳐야 하고, 주인공 가이와 에밀리 그리고 에릭 셋은 우연 제작자 수련 과정 동기다.
가이는 인연을 맺어주는 우연 제작이 특기인데 반에 건조해 보이지만 사실은 한 여자를 잊지 못하는 순정파이고, 에밀리는 그런 가이에게 마음이 있으며, 에릭은 그 둘을 곁에서 지켜본다.
그런데 우연을 만들며 실수하기도 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우연 제작에 꽤 능숙해진 것으로 보이던 가이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우연을 만드는 과정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와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인연 그리고 등장인물의 정체는 소설을 더욱 흥미롭게 한다.
또 한 가지, 책 중간중간 우연 제작자 수련 과정에 사용하는 교재에서 발췌한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글을 읽을 때면 우연 제작자 수련 과정이 실제로 있을 것만 같아 더 재미있었다.

<우연 제작자들>을 읽으면서 나는 인연과 운명에 대해서 생각하고, 어쩐지 삶에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소설 도입부에서 가이가 카페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셜리와 손님으로 방문한 사관생도 댄을 이어주기 위해서 셜리에게 어떤 일을 했냐면, 댄이 셜리를 인식하게 하려고 셜리가 커피잔를 떨어뜨리도록 설계해서 셜리는 카페에서 해고 당했고, 수도관을 터뜨려서 셜리가 버스나 택시를 타지 못하게 하고, 그래서 택시인 줄 착각하고 타게된 댄의 차에 휴대폰까지 놓고 내리게 했다.
셜리 입장에서 보면 그날은 재수가 없는 날이었지만, 그날의 재수 없는 일들은 댄과의 인연을 위해 가이가 그린 큰 그림이었다.

앞서 나온 다른 우연 제작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대상이 휼륭한 작곡가가 되도록 하기 위해 먼저 직장에서 해고 당하게 해야 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니 나 또한 당장 보기에는 실망스럽거나 재수 없거나 힘든 일을 겪을지라도 멀리에서 보면 그런 일들이 다 이유가 있고 결국에는 잘 되기 위함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연 제작자들>은 국내에 처음 소개된 작가 요아브 블룸의 데뷔작인데, 이어서 같은 작가의 <다가올 날들의 안내서>(가제)도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그 또한 기대된다.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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