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 나 좀 봐 비룡소 그래픽노블
재럿 J. 크로소치카 지음, 양혜진 옮김 / 비룡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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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려 12년 동안 영화 촬영을 하며 메이슨이라는 꼬마가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그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낸 <보이후드>라는 영화가 있다.
워낙 극찬이 자자했던 영화라서 그만큼 기대감을 가지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건만 잔잔하게 흘러가는 시간동안 이 영화가 왜 그렇게 극찬을 받은 걸까, 역시 12년 동안 같은 배우와 촬영하며 세월의 흐름을 그대로 담아냈다는 특수함 때문만이었나 싶었다.
그러나 <보이후드>의 진가는 그뿐만이 아니라는 것은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작가 재럿 J. 크로소치카가 자신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를 그려낸 자전적 그래픽노블 <헤이, 나 좀 봐>를 보고 영화 <보이후드>가 떠올랐다.
둘 다 소년이 대학교에 들어갈 때까지의 이야기라는 공통점도 있으며 비슷하게 감상했기 때문이다.



<헤이, 나 좀 봐>는 시간상 좀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 재럿의 할머니 셜리와 할아버지 조가 대학에서 만나 재럿의 엄마를 포함한 아이들을 낳고, 재럿의 엄마 레슬리가 밴드 기타리스트인 리처드를 만나서 재럿을 가지게 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재럿의 엄마와 아빠는 만남부터가 어긋났었는데, 리처드는 여자친구가 있는 상태였고 레슬리가 임신하자 자기 아이가 아니라며 발뺌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재럿은 아빠 없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도 이뿐이었다면 재럿이 이 그래픽노블을 그릴일은 없었을 테지만 레슬리가 또 문제였다.

레슬리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절도를 할 정도로 엄마로는 부적절한 인물이었는데, 실은 그녀는 헤로인 중독자였기 때문에 이전부터 끊임없이 사고를 쳐왔고 가족도 눈에 봬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재럿은 어린 나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서 자라게 되었고, 그래픽노블에는 재럿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의 이야기가 그러져 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뒤에 있는 작가의 말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이 그래픽노블의 가장 큰 특징은 곳곳에 있는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작가와 가족의 과거에서 캐낸 유물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각 장이 끝날 때마다 신생아 건강 기록부나 사진이나 편지나 저자가 그렸던 그림 등이 실려있고, 그래픽노블 내에 등장하는 그림도 실제로 저자가 그렸던 그림을 넣었는데 두 점(조의 스케치나 로튼 랠프드로잉)을 제외하고는 모두 실제 작품이라고 한다.
이렇게 실린 그림과 기념품을 마주할 때마다 이 이야기는 픽션이 아니라 작가와 그의 가족의 역사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니 더욱 이입이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 그래픽노블은 보기보다 더 섬세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었다.

작가가 자신의 힘들었던 과거를 덤덤하게 털어놓은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데 일조하는 거칠고 무채색의 만화에 유일하다시피 한 색채인 짙은 주황색은 작가 재럿을 키워준 할아버지 조의 포켓치프에서 가져온 것이었고(포켓치프는 작가의 딸의 애착담욕가 되었다고 하니 뭉클하다), 각 장 마지막에 실려 있는 기록물과 기념품 뒤에 위치한 파인애플 무늬 배경은 파인애플을 좋아하던 할머니 셜리가 사둔 벽지 두루마리를 활용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실은 앞서 언급했던 영화 <보이후드>의 주인공 메이슨의 삶도 그렇고 더욱이 이 그래픽노블 <헤이, 나 좀 봐>의 주인공 재럿의 삶은 내 삶과 비슷한 부분이라고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정에서 나고 자랐으니) 초반에는 내가 재럿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런 삶도 있구나’하는 감상 그 이상을 느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래픽노블을 보며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삶을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있었다.
점점 성장하는 재럿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내 어린시절과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돌아보게 되었고, 그러면서 환경은 다를지라도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무언가를 잡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재럿에게 역경도 있었지만 생명줄과도 같은 만화가 있었고,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든든한 부모님과 같았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 그리고 친구 패트릭과 같은 소중한 존재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무엇보다 나는 힘든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기 위해 덮어두기보다는 직시해야 한다는 재럿의 인생관이 마음에 들었는데, 그런 깨달음을 얻고 살아갔기에 재럿은 <뉴욕 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 어린이책 작가이자 삽화가가 되고 2백만 건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한 TED 강연을 할 수 있었을 테다.


“ 어린아이일 때, 청소년일 때에는 주어진 환경을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어른이 되는 과정이 아름다운 것은 자신의 현실과 자신의 가족을 스스로 만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 가족은 결속이 단단한 친구 무리일 수도 있고, 배우자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일 수도 있다. 요컨대 유년기의 현실이 꼭 성인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되도록 방치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물론 노력이 따른다.

할아버지께서는 늘 나에게 “과거의 망령을 곱씹고 있으면 놈들이 널 잡으러 올 거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나는 실상은 그 반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과거에서 온 유령들을 무시한다면 그것들이 당신을 잡으러 와서는 좀처럼 놔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릴 때 심리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랬더라면 아주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성인이 되어 심리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밝힌다.”

- 작가의 말 중에서


그렇기 때문에 이 그래픽노블은 재럿과 같은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희망을 주는 의미가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고 나처럼 재럿과는 다른 길을 걷는 사람의 마음에도 가닿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 흔히 책이 사람을 살린다고들 하지만, 나는 텅 빈 스케치북도 때론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수많은 스케치북을 그림으로 채웠고, 그것들이 내 삶을 구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작가의 말 중에서





<해당 후기는 비룡소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저의 솔직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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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히어로의 단식법
샘 J. 밀러 지음, 이윤진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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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십대였을 적에도 식이장애를 겪는 청소년이 있었지만 요즘은 거식증을 동경하기까지 하는 ‘프로아나(Pro-ana)’나 ‘개말라인간’ 같은 신조어가 SNS를 타고 청소년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다니 더 심각해진 것 같다.
이런 시점이기에 더욱이 섭식 장애를 겪고 있는 십대 게이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의 등장은 눈길을 끌었고, 청소년 섭식 장애와 초능력의 조합이 무척 흥미로워 보여서 읽고 싶었다.
그리고 <슈퍼히어로의 단식법>은 청소년 섭식 장애를 가볍게 다루지 않으면서도 생생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나를 사로잡았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분명하고 긍정적인 메시지는 덤이다.

맷은 굶으면 굶을수록 후각, 청각, 촉각 등 감각이 예민해지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으며, 심지어는 순간이동이나 시간을 멈추는 일도 가능했던 것이다.
맷은 계속해서 식사량을 줄여나갔고, 초능력을 발휘하며 타리크와 가까워지는 데 성공한다.


나는 엄마의 유심 칩을 마야 누나의 유심 칩으로 바꿨다. 그리고 타리크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면 타리크에게는 누나가 보낸 메시지로 보일 것이었다.
다 말할 거야.
거의 곧바로 엄마의 핸드폰이 내 손안에서 진동했다. 발신자가 <타리크>로 떴다. 나는 빨간 버튼을 누르며 전화를 거절했다.
문자가 왔다.
제발 그러지 말아줘.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침묵을 고수했다.
타리크에게서 두 번째 문자가 왔다. 그러면 내 인생이 망가질 거야.
이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마치 네가 누나 인생을 망친 것처럼 말이지?
두 번째 전화가 왔다. 나는 그것을 다시 거절했다. 그러고는 5분 뒤, 다리크가 문자를 보내왔다. 왜 내게 그런 짓을 하겠다는 거야? 우리는 서로 많은 것을 나눴잖아.
그렇군. 뭔가 있긴 했다는 건데....... 나는 그것이 뭔지 몰랐다. 그래서 다음 말을 매우, 매우 신중히 골라야 했다. 왜냐하면 한 번만 잘못해도 타리크가 내 꿍꿍이를 눈치챌 것이기 때문이었다.

p.96


타리크는 숨기고 있는 비밀이 있고, 엄마도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하지만 맷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맷의 누나 마야는 어째서 집을, 맷을 떠난 것일까?
무엇보다 굶으면 발휘되는 맷의 초능력은 진짜일까, 아니면 고통스러운 허기가 야기한 흐릿해진 정신으로 인한 환각 같은 것일까?
소설은 이런 궁금증을 유발하여 책장을 계속 넘기게 만든다.


나는 타리크에게 한 걸음 다가가서 그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제대로 들이마셨다. 모든 표면적인 냄새를 뒤로하고, 그가 지나온 세상의 악취도 무시하고...... 그의 냄새, 그의 신체의 겉껍질 냄새도 보내 버렸다. 땜내와 머리 냄새와 침 냄새까지 전부. 그리고 마침내 발견했다.
외로움이었다.

p.107


나를 포함한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 했을 맷의 초능력의 실체에 대해서는 작가가 밀당을 제대로 한다.
나도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져서 후각과 미각은 극도로 예민해지지만 사고는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굶으면 굶을수록 강해지는 맷의 초능력이 그저 맷의 착각이며 상상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보면 초능력을 단순히 맷의 상상력과 착각의 산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초능력의 결과물이 실재하는 것이, 이 소설은 거식증을 겪는 게이 버전의 <캐리>인가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면서 맷의 초능력에 대해서는 몇 번이고 생각이 왔다갔다 하게 된다.


“네 손이 차.” 타리크가 내 손 한쪽을 들어 보이며 속삭였다.
“순환이 잘 안 돼.” 내가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순환 장애는 수많은 섭식 장애 사례에서 발견되는 증상 중 하나라는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전에도 누차 강조했듯...... 나는 섭식 장애에 해당하지 않으니까.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은데, 네 손톱도 징그럽게 생겼어.”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뉘앙스로 어깨를 으쓱했다. 손톱 퇴화도 수많은 섭식 장애 사례에서 발견되는 증상 중 하나지.
“흠.”
타리크는 모순적인 존재였다. 그는 내 기분이 나아지게 만들어 주면서 동시에 더 안 좋게 만들기도 했다. (...) 하지만 그를 바라볼 때면, 그를 만질 때면, 내 부족함을 전보다 더욱 예리하게 느끼기도 했다. 나는 생각했다. 이곳에는 그야말로 강하고 아름답고 완벽한 남자가 있어. 여기에는 네가 절대로 될 수 없는 존재가 있어.

p.290


작가는 또 섭식 장애를 겪는 사람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기가 막히게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작가도 게이이며 섭식 장애를 겪은 경험이 있다고 한다.
맷은 음식 거부를 합리화하며 반복적으로 자신이 섭식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못을 박지만 섭식 장애 증상을 모두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우리는 맷이 섭식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앞에 그렇게 요리가 놓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며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지방과 전분과 소금 덩어리였다.
국수는 둥지처럼 쌓여 있었다. <어쩌면 반쯤 먹었는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전부 그대로 있는> 형상으로 자잘하게 자르기도 불가능한 대상이었다.
나는 그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마침내 젓가락을 들고 그것을 찔러 봤다. 모두가 자신의 음식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대화가 줄었다. 나는 대화가 다시 시작되기를, 신경을 분산시켜 주는 뭔가가 나타나기를, 내게 어떻게 행동할지 대책을 강구할 시간이 주어지기를 바랐다. 무릎 위에 휴지를 펼치고 아무도 안 볼 때 그 위로 음식 덩어리를 떨군 뒤, 휴지를 잘 접어 의자 밑에 남겨 두는 방법이 있긴 했다....... 하지만 타리크가 너무 가까이 앉아 있어 볼 것이 확실했다. 그는 아마.......
“너 배 안 고파?” 타리크가 물었다. 그의 눈빛이 기민하고 예리했다.
나는 당황했다. “미안해.” 나는 사과하며 젓가락으로 국수를 한가득 집어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
빌어먹을 몸아. 나는 생각하며 맛있는 돼지 지방 속에 흠뻑 빠져들었다. 내 몸이 다시 능력을 끄기 시작했다. 질주하는 아드레날린의 속도를 늦췄다. 과민해졌던 감각들을 안정시켰다.

p.347-348


자기 혐오에서 비롯된 행위이지만 또 무엇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으로 먹는 행위를 제한하는 맷은 섭식 장애를 겪고 있는 독자나 섭식 장애를 경험한 독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다못해 트라우마를 자극할 것 같을 정도로 생생한데, 소설을 다 읽고나니 그렇기에 맷이 털어놓는 고백 같은 이 이야기에서 치유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소설을 읽으면서 섭식 장애를 가진 사람의 사고방식과 행동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를, 그러니까 섭식 장애 증상과 후유증을 알 수 있어 섭식 장애를 초기에 바로 잡고 극복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오늘은 세상의 모든 맷을 응원하며 글을 마치고 싶다.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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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하) - 중세의‘압도적 선구자’,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일생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민경욱 옮김 / 서울문화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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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상권과 하권 통합 리뷰입니다.


역사 소설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잡지에서 데뷔작 <르네상스의 여인들>을연재하던 시절부터 언젠가는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해 쓸 것이라고 말했고, 그로부터 45년도 넘는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펴내게 된 책이 바로 이 정직한 제목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다.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를 중심으로 한 역사에 빠진 유명 작가가 쓰고 싶어했던 역사적 인물이고, 또 십자군 전쟁으로 피를 흘리지 않고도 성지를 되찾았다는 업적에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지 나도 궁금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는 시오노 나나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인 이야기>와 달리 역사 소설이 아니라 시오노 나나미의 시각에서 (그래서 작가의 견해가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라는 실존 인물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써내려간 평전이기 때문에 재미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더 재미있게 읽어나간 책이다.

프리드리히가 성이나 대저택이 아닌 작은 마을의 광장에 설치된 천막 안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태어나는 시작부터가 그러했다.
(프리드리히의 아버지 하인리히보다 어머니 콘스탄체가 열한 살 연상이었고, 프리드리히도 후에 자신보다 열 살 연상이며 어머니와 같은 콘스탄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과 결혼한다는 것 등 비교적 사소해보이는 부분도 흥미로웠다)

프리드리히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아버지 두었고 어머니로부터는 시칠리아 왕국을 물려받을 금수저 중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몸이니 풍족하고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을 것 같지만, 태어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품을 떠나 공작 부인에게 맡겨져 떨어져 지냈기 때문에 아버지는 세례식 때 한 번 만났을 뿐이었으며 어머니는 프리드리히가 세 살이 되어서야 다시 만난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시칠리아의 왕이었던 하인리히가 급사해서 콘스탄체가 아들 프리드리히를 데려와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시켰던 것인데,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콘스탄체가 병상에 누워 프리드리히가 네 살 때 세상을 떠났다.

병상에서 콘스탄체가 홀로 남을 프리드리히의 후견인으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를 선택하기는 했지만, 대대로 교황은 한 사람이 신성로마제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모두 다스리게 되는 것을 경계한 데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로마 교황은 태양이고 황제는 달”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인물로, 통치자가 될 프리드리히의 교육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귀공자에게 필수적인 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프리드리히 자신이 원하는대로 탐구할 수 있었는데, 책을 읽다보니 이런 교육 상황이 그의 군주로서의 면모를 형성하는 데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풍족한 환경에서 철저하게 미래의 통지차로서 교육을 받았다는 것보다 멋져 보이고 말이다.

또 사고 안 치고 건강하게 잘만 자라주면 아버지가 앉았던 세속의 최고위자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던 것이,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는 세습이 되었던 반면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는 선제후들의 선택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는 일찍이 신성로마제국의 넓은 지역을 위험을 무릅쓰고 발로 뛰어다녀야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어머니로부터 세습되어 통치권을 가진 시칠리아 왕국도 중앙집권제로 탈바꿈시켜 근대 군주국으로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 그 모든 일을 이야기하면 글이 너무 길어지니 서평에서는 프리드리히가 어떤 군주였는지를 알 수 있는 몇 가지만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먼저 프리드리히 2세는 유럽 최초의 국립 대학인 나폴리대학을 세웠다.
당시 유럽에 다른 대학들이 있기는 했지만 신학이나 교회법을 가르치며 성직자들을 길러내는 장이라고 할 수 있었던 데 반해 나폴리대학은 처음부터 세속인을 위한 대학을 목표로 하여 그리스도교 필터를 배제하고 모든 과목을 가르치고자 했고, 국비로 운영되었다는 점이 크게 다르다.

프리드리히는 대학 수업료를 무료로 했을 뿐만 아니라 학업 성적에 따른 장학금 제도도 확립하고 장학금 혜택을 받지 못하는 학생을 위한 저금리 학자금 대출 제도를 만들었으며, 나폴리 시내에 집을 빌려야 하는 학생을 고려하여 임대료 상한까지 정해두었으니, 나폴리대학은 당시 다른 대학보다 시작은 늦었으나 여러모로 최초인 대학이었다.

나폴리 대학은 분명 8백 년 전 중세의 대학인데도 이런 점을 보면 지금의 대학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 것이, 프리드리히 2세는 종교에 얽매이지 않고 또 상당히 앞서 나간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라센 문제를 다룰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라센은 유럽의 그리스도교도가 이슬람교도를 통틀어 부르는 말이다. (이슬람교도가 유럽의 그리스도교도라면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건 프랑크인이라고 불렀듯 말이다)
시칠리아에는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가 공존했는데 어느 날 시칠리아 농촌 지대에 사는 이슬람교도들이 일제히 봉기했고, 시칠리아 왕국 전체가 위험에 처하기 전에 프리드리히 2세는 봉기에 가담한 인물과 그 가족을 시칠리아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강경책을 폈다.

시오노 나나미는 때가 십자군 시대였던 만큼 프리드리히가 이교도에게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을 강요했더라면 교황을 비롯한 가톨릭 교회의 칭찬을 받았을 거라고 했는데 프리드리히는 그러지 않았다.
봉기에 가담한 이슬람교도들을 강제 이주 시키기는 했지만 산간벽지가 아니라 왕궁에서 불과 18km 떨어진 곳을 사라센인 마을로 정하고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으며 생활 수단도 제공했던 것이다.
그러니 시칠리아에 사는 아랍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다시는 없었을 만하다.

또 중세하면 십자군 원정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교황에게 이교도로부터 성스로운 수도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일은 중요한 목표였기 때문에 프리드리히도 계속해서 십자군 원정을 떠나라는 압박을 받았고, 결국에는 십자군 원정을 떠나지만 놀랍게도 피 흘리는 일 없이 성지를 탈환하는 업적을 달성한다.

그동안 속세 최고위자인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그리스도교 교회의 최고위자인 교황은 이교도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동안 교황이 몇 번 바뀌었음에도) 서로를 쭉 견제했고, 교황이 프리드리히를 몇 번이나 파문하며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지만 프리드리히는 이에 굴복하지 않아 더 빛을 발한다.

이렇게 군사력도 자금도 없었던 젊은 프리드리히가 통치권 확립하고 부지런히 나라를 탈바꿈시키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소설의 주인공 같은데, 프리드리히는 가상 인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며 그의 업적도 실제로 달성되었으니 평전임에도 소설보다 더 흥미로웠고 지루하지가 않았다.
이런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가진 매력에 시오노 나나미의 필력이 더해져서 더 그랬을 수도 있다.

그리고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를 읽으면서는 프리드리히 한 명의 생애를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중세라는 시대를 그려볼 수 있기 때문에, 서양 중세에 관심이 있었다거나 이 서평을 읽으며 프리드리히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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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상) - 중세의‘화려한 반역아’,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일생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민경욱 옮김 / 서울문화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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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상권과 하권 통합 리뷰입니다.


역사 소설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잡지에서 데뷔작 <르네상스의 여인들>을연재하던 시절부터 언젠가는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해 쓸 것이라고 말했고, 그로부터 45년도 넘는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펴내게 된 책이 바로 이 정직한 제목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다.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를 중심으로 한 역사에 빠진 유명 작가가 쓰고 싶어했던 역사적 인물이고, 또 십자군 전쟁으로 피를 흘리지 않고도 성지를 되찾았다는 업적에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지 나도 궁금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는 시오노 나나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인 이야기>와 달리 역사 소설이 아니라 시오노 나나미의 시각에서 (그래서 작가의 견해가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라는 실존 인물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써내려간 평전이기 때문에 재미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더 재미있게 읽어나간 책이다.

프리드리히가 성이나 대저택이 아닌 작은 마을의 광장에 설치된 천막 안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태어나는 시작부터가 그러했다.
(프리드리히의 아버지 하인리히보다 어머니 콘스탄체가 열한 살 연상이었고, 프리드리히도 후에 자신보다 열 살 연상이며 어머니와 같은 콘스탄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과 결혼한다는 것 등 비교적 사소해보이는 부분도 흥미로웠다)

프리드리히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아버지 두었고 어머니로부터는 시칠리아 왕국을 물려받을 금수저 중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몸이니 풍족하고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을 것 같지만, 태어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품을 떠나 공작 부인에게 맡겨져 떨어져 지냈기 때문에 아버지는 세례식 때 한 번 만났을 뿐이었으며 어머니는 프리드리히가 세 살이 되어서야 다시 만난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시칠리아의 왕이었던 하인리히가 급사해서 콘스탄체가 아들 프리드리히를 데려와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시켰던 것인데,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콘스탄체가 병상에 누워 프리드리히가 네 살 때 세상을 떠났다.

병상에서 콘스탄체가 홀로 남을 프리드리히의 후견인으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를 선택하기는 했지만, 대대로 교황은 한 사람이 신성로마제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모두 다스리게 되는 것을 경계한 데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로마 교황은 태양이고 황제는 달”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인물로, 통치자가 될 프리드리히의 교육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귀공자에게 필수적인 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프리드리히 자신이 원하는대로 탐구할 수 있었는데, 책을 읽다보니 이런 교육 상황이 그의 군주로서의 면모를 형성하는 데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풍족한 환경에서 철저하게 미래의 통지차로서 교육을 받았다는 것보다 멋져 보이고 말이다.

또 사고 안 치고 건강하게 잘만 자라주면 아버지가 앉았던 세속의 최고위자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던 것이,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는 세습이 되었던 반면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는 선제후들의 선택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는 일찍이 신성로마제국의 넓은 지역을 위험을 무릅쓰고 발로 뛰어다녀야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어머니로부터 세습되어 통치권을 가진 시칠리아 왕국도 중앙집권제로 탈바꿈시켜 근대 군주국으로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 그 모든 일을 이야기하면 글이 너무 길어지니 서평에서는 프리드리히가 어떤 군주였는지를 알 수 있는 몇 가지만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먼저 프리드리히 2세는 유럽 최초의 국립 대학인 나폴리대학을 세웠다.
당시 유럽에 다른 대학들이 있기는 했지만 신학이나 교회법을 가르치며 성직자들을 길러내는 장이라고 할 수 있었던 데 반해 나폴리대학은 처음부터 세속인을 위한 대학을 목표로 하여 그리스도교 필터를 배제하고 모든 과목을 가르치고자 했고, 국비로 운영되었다는 점이 크게 다르다.

프리드리히는 대학 수업료를 무료로 했을 뿐만 아니라 학업 성적에 따른 장학금 제도도 확립하고 장학금 혜택을 받지 못하는 학생을 위한 저금리 학자금 대출 제도를 만들었으며, 나폴리 시내에 집을 빌려야 하는 학생을 고려하여 임대료 상한까지 정해두었으니, 나폴리대학은 당시 다른 대학보다 시작은 늦었으나 여러모로 최초인 대학이었다.

나폴리 대학은 분명 8백 년 전 중세의 대학인데도 이런 점을 보면 지금의 대학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 것이, 프리드리히 2세는 종교에 얽매이지 않고 또 상당히 앞서 나간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라센 문제를 다룰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라센은 유럽의 그리스도교도가 이슬람교도를 통틀어 부르는 말이다. (이슬람교도가 유럽의 그리스도교도라면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건 프랑크인이라고 불렀듯 말이다)
시칠리아에는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가 공존했는데 어느 날 시칠리아 농촌 지대에 사는 이슬람교도들이 일제히 봉기했고, 시칠리아 왕국 전체가 위험에 처하기 전에 프리드리히 2세는 봉기에 가담한 인물과 그 가족을 시칠리아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강경책을 폈다.

시오노 나나미는 때가 십자군 시대였던 만큼 프리드리히가 이교도에게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을 강요했더라면 교황을 비롯한 가톨릭 교회의 칭찬을 받았을 거라고 했는데 프리드리히는 그러지 않았다.
봉기에 가담한 이슬람교도들을 강제 이주 시키기는 했지만 산간벽지가 아니라 왕궁에서 불과 18km 떨어진 곳을 사라센인 마을로 정하고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으며 생활 수단도 제공했던 것이다.
그러니 시칠리아에 사는 아랍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다시는 없었을 만하다.

또 중세하면 십자군 원정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교황에게 이교도로부터 성스로운 수도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일은 중요한 목표였기 때문에 프리드리히도 계속해서 십자군 원정을 떠나라는 압박을 받았고, 결국에는 십자군 원정을 떠나지만 놀랍게도 피 흘리는 일 없이 성지를 탈환하는 업적을 달성한다.

그동안 속세 최고위자인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그리스도교 교회의 최고위자인 교황은 이교도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동안 교황이 몇 번 바뀌었음에도) 서로를 쭉 견제했고, 교황이 프리드리히를 몇 번이나 파문하며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지만 프리드리히는 이에 굴복하지 않아 더 빛을 발한다.

이렇게 군사력도 자금도 없었던 젊은 프리드리히가 통치권 확립하고 부지런히 나라를 탈바꿈시키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소설의 주인공 같은데, 프리드리히는 가상 인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며 그의 업적도 실제로 달성되었으니 평전임에도 소설보다 더 흥미로웠고 지루하지가 않았다.
이런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가진 매력에 시오노 나나미의 필력이 더해져서 더 그랬을 수도 있다.

그리고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를 읽으면서는 프리드리히 한 명의 생애를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중세라는 시대를 그려볼 수 있기 때문에, 서양 중세에 관심이 있었다거나 이 서평을 읽으며 프리드리히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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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 유혹과 저주의 미술사 해시태그 아트북
알릭스 파레 지음, 박아르마 옮김 / 미술문화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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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나에게 마녀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 <백설공주>에서 사악한 여왕이 변신한 노파였고, 그 다음으로는 <해리포터> 시리즈나 만화 속의 특별한 능력을 가진 또래 여자아이였고, 또 그 다음에는 아름답고도 위험한 매력이 있는 여성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마녀사냥의 역사가 있었고 그로 인해 많은 여성들이 마녀로 몰려 죽임을 당했으며, 마녀는 여성혐오와 여성억압의 결과로 탄생했다는 것을 알고나서는 페미니즘적 의미가 추가되었다.
그래서 내가 마녀에 대해 더 알고 싶고, 마녀를 그려낸 작품들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고령의 여인

처음에는 아버지, 그 다음에는 남편의 보호 아래 놓였던 중세의 여성은 과부가 된 후에야 약간의 독립성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노파들이 가진 자유와 오랜 연륜에서 비롯된 지혜는 여성을 감시받아 마땅한 존재로 치부했던 남성을 공포에 떨게 했다. 노파들은 곧 마녀사냥의 훌륭한 먹잇감이 된다.

p.20


<마녀 : 유혹과 저주의 미술사>는 미술문화 출판사에서 출간하고 있는 해시태그 아트북 두 번째 책으로 마녀를 그린 40여 점의 작품을 수록했다.
(마녀로 분장한 사람이나 마녀로 오해받은 인물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마녀의 이미지를 담은 작품이라고 해야겠지만, 그러면 글이 너무 길어지니 여기에서는 통틀어 ‘마녀’라고 하겠다)

본격적으로 마녀를 그려낸 작품을 소개하기에 앞서예술에서 마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으며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를 가볍게 다루고 넘어갔고, ‘꼭 봐야 할 작품들’로 열여덟 점을, ‘의외의 작품들’로 스물두 점을 소개하고 있다.

마녀를 그린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과 설치 미술도 포함된 마흔 점의 작품들은 시대순으로 수록되었고, 책을 펼쳤을 때 왼쪽 페이지에는 작품에 대한 글을 싣고 오른쪽 페이지는 해당 작품으로 채워서 되도록 책장을 이리저리 넘기지 않아도 되게끔 했는데, 책을 읽기 편하게 하는 이런 배치는 물론이고 작품 사진 자료의 인쇄 품질도 마음에 들었다.

처음 책을 손에 들고 넘겼을 때 내지를 만져보고 이 책은 안 좋은 인쇄 상태로 나를 실망시키지는 않겠구나 했는데 정말 그랬다.
한 페이지를 모두 작품을 보여주는 데 할당하고 그것도 모자라다고 판단한 몇 작품은 다음 장에서 두 페이지를 꽉 채운 큰 그림으로 만날 수 있게 한 데다, 이미지가 흐릿하거나 모자이크마냥 깨지는 일 없이 선명한 편이어서 만족스러웠다.

단, 작품 사진 자료는 (네 개의 원형화로 구성된 <마녀들이 있는 장면> 같은 그림을 제외하고) 글에서 소개하는 주요 작품 하나만을 수록했기 때문에 글에 등장하는 다른 작품은 따로 찾아봐야 하는데, 만약 언급된 작품 모두의 사진 자료를 넣었다면 분량도 많아지고 지금처럼 글을 읽으며 그림을 보기 편하게 배치하기 위해서 이런 선택을 한 것일 수도 있을 테다.

<마녀 : 유혹과 저주의 미술사>를 읽으며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마녀 키르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 속 마녀들, 중세 소설 <아서왕의 죽음>의 삽화로 그려진 마녀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엔돌의 마녀, 러시아와 동유럽 동화 속에서 아이들을 잡아먹는 노파 바바 야가를 비롯한 사람들의 상상력으로 창조된 마녀들을 볼 수 있었고, 17세기 말 미국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에서 있었던 마녀재판을 소재로 한 <마녀의 언덕-세일럼의 순교자>나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구했음에도 마녀재판을 받고 화형에 처해졌던 잔 다르크가 신의 계시를 받는 장면을 그린 <잔 다르크>에서는 역사 속 마녀(정확히는 마녀로 오해했던 것이지만)도 만날 수 있었다.

그중 내게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프란시스코 고야가 그린 <허공의 마녀들>과 칠도 메이렐리스의 설치 미술 <마녀>였는데, 이 두 작품은 각자 판이한 느낌으로 압도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날아오른 세 마녀들이 한 남자를 생포했다. (...) 머리에 쓴 뽀족모자는 작은 뱀들로 장식되어 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종교재판 때 죄인에게 씌웠던 모자 코로자coroza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포르투갈어로 ‘이단자 처형’이라 불렀던 공개 처벌 의식에 쓰이는 모자로 악명이 높았다. 고야는 종종 이런 장면을 그려서 종교재판에서 벌어지는 가혹 행위를 고발했다. 다만 마녀들이 쓰고 있는 모자는 코로자와 달리 가톨릭 주교가 쓰는 거대한 주교관, 미트라mitre처럼 중앙이 갈라져 있다. 여기서는 오로지 종교적 폭력에 대한 비판이 강조된다.

p.34


이렇게 다양한 마녀를 담아낸 작품들을 보고 저자가 들려주는 그림 뒤의 배경 이야기와 감상을 읽으며 과거부터 현재까지 사람들 안에서 마녀의 이미지는 어떠했는지와 과거에 실제로 행해졌던 마녀사냥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그 유명한 세일럼 마녀재판이 한창이었던 1692년으로 가 보자. 그해 매사추세츠주의 작은 청교도 마을은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두 아이가 여자 셋을 마녀로 지목한 이후 온 마을에서 비방과 고발이 뒤따랐고, 투옥이나 교수형이 선고됐다. 마녀 혐의를 받은 자가 몇 달 만에 100명을 넘어갔다. 그중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남자도 몇몇 있었다. 처음에는 혼혈이거나 사회에서 소외된 여성들을 음해하다가 나중에는 나이가 많든 적든, 독실하든 아니든, 도움이 되든 안 되든 가리지 않고 아무나 고발했다.

p.40


그러자 내 눈에 마녀가 더 다채롭고 풍부한 이미지로 보이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으며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마녀라는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켜 보는 것 같았다.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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