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상) - 중세의‘화려한 반역아’,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일생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민경욱 옮김 / 서울문화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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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상권과 하권 통합 리뷰입니다.


역사 소설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잡지에서 데뷔작 <르네상스의 여인들>을연재하던 시절부터 언젠가는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해 쓸 것이라고 말했고, 그로부터 45년도 넘는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펴내게 된 책이 바로 이 정직한 제목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다.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를 중심으로 한 역사에 빠진 유명 작가가 쓰고 싶어했던 역사적 인물이고, 또 십자군 전쟁으로 피를 흘리지 않고도 성지를 되찾았다는 업적에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지 나도 궁금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는 시오노 나나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인 이야기>와 달리 역사 소설이 아니라 시오노 나나미의 시각에서 (그래서 작가의 견해가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라는 실존 인물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써내려간 평전이기 때문에 재미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더 재미있게 읽어나간 책이다.

프리드리히가 성이나 대저택이 아닌 작은 마을의 광장에 설치된 천막 안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태어나는 시작부터가 그러했다.
(프리드리히의 아버지 하인리히보다 어머니 콘스탄체가 열한 살 연상이었고, 프리드리히도 후에 자신보다 열 살 연상이며 어머니와 같은 콘스탄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과 결혼한다는 것 등 비교적 사소해보이는 부분도 흥미로웠다)

프리드리히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아버지 두었고 어머니로부터는 시칠리아 왕국을 물려받을 금수저 중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몸이니 풍족하고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을 것 같지만, 태어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품을 떠나 공작 부인에게 맡겨져 떨어져 지냈기 때문에 아버지는 세례식 때 한 번 만났을 뿐이었으며 어머니는 프리드리히가 세 살이 되어서야 다시 만난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시칠리아의 왕이었던 하인리히가 급사해서 콘스탄체가 아들 프리드리히를 데려와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시켰던 것인데,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콘스탄체가 병상에 누워 프리드리히가 네 살 때 세상을 떠났다.

병상에서 콘스탄체가 홀로 남을 프리드리히의 후견인으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를 선택하기는 했지만, 대대로 교황은 한 사람이 신성로마제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모두 다스리게 되는 것을 경계한 데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로마 교황은 태양이고 황제는 달”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인물로, 통치자가 될 프리드리히의 교육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귀공자에게 필수적인 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프리드리히 자신이 원하는대로 탐구할 수 있었는데, 책을 읽다보니 이런 교육 상황이 그의 군주로서의 면모를 형성하는 데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풍족한 환경에서 철저하게 미래의 통지차로서 교육을 받았다는 것보다 멋져 보이고 말이다.

또 사고 안 치고 건강하게 잘만 자라주면 아버지가 앉았던 세속의 최고위자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던 것이,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는 세습이 되었던 반면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는 선제후들의 선택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는 일찍이 신성로마제국의 넓은 지역을 위험을 무릅쓰고 발로 뛰어다녀야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어머니로부터 세습되어 통치권을 가진 시칠리아 왕국도 중앙집권제로 탈바꿈시켜 근대 군주국으로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 그 모든 일을 이야기하면 글이 너무 길어지니 서평에서는 프리드리히가 어떤 군주였는지를 알 수 있는 몇 가지만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먼저 프리드리히 2세는 유럽 최초의 국립 대학인 나폴리대학을 세웠다.
당시 유럽에 다른 대학들이 있기는 했지만 신학이나 교회법을 가르치며 성직자들을 길러내는 장이라고 할 수 있었던 데 반해 나폴리대학은 처음부터 세속인을 위한 대학을 목표로 하여 그리스도교 필터를 배제하고 모든 과목을 가르치고자 했고, 국비로 운영되었다는 점이 크게 다르다.

프리드리히는 대학 수업료를 무료로 했을 뿐만 아니라 학업 성적에 따른 장학금 제도도 확립하고 장학금 혜택을 받지 못하는 학생을 위한 저금리 학자금 대출 제도를 만들었으며, 나폴리 시내에 집을 빌려야 하는 학생을 고려하여 임대료 상한까지 정해두었으니, 나폴리대학은 당시 다른 대학보다 시작은 늦었으나 여러모로 최초인 대학이었다.

나폴리 대학은 분명 8백 년 전 중세의 대학인데도 이런 점을 보면 지금의 대학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 것이, 프리드리히 2세는 종교에 얽매이지 않고 또 상당히 앞서 나간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라센 문제를 다룰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라센은 유럽의 그리스도교도가 이슬람교도를 통틀어 부르는 말이다. (이슬람교도가 유럽의 그리스도교도라면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건 프랑크인이라고 불렀듯 말이다)
시칠리아에는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가 공존했는데 어느 날 시칠리아 농촌 지대에 사는 이슬람교도들이 일제히 봉기했고, 시칠리아 왕국 전체가 위험에 처하기 전에 프리드리히 2세는 봉기에 가담한 인물과 그 가족을 시칠리아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강경책을 폈다.

시오노 나나미는 때가 십자군 시대였던 만큼 프리드리히가 이교도에게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을 강요했더라면 교황을 비롯한 가톨릭 교회의 칭찬을 받았을 거라고 했는데 프리드리히는 그러지 않았다.
봉기에 가담한 이슬람교도들을 강제 이주 시키기는 했지만 산간벽지가 아니라 왕궁에서 불과 18km 떨어진 곳을 사라센인 마을로 정하고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으며 생활 수단도 제공했던 것이다.
그러니 시칠리아에 사는 아랍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다시는 없었을 만하다.

또 중세하면 십자군 원정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교황에게 이교도로부터 성스로운 수도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일은 중요한 목표였기 때문에 프리드리히도 계속해서 십자군 원정을 떠나라는 압박을 받았고, 결국에는 십자군 원정을 떠나지만 놀랍게도 피 흘리는 일 없이 성지를 탈환하는 업적을 달성한다.

그동안 속세 최고위자인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그리스도교 교회의 최고위자인 교황은 이교도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동안 교황이 몇 번 바뀌었음에도) 서로를 쭉 견제했고, 교황이 프리드리히를 몇 번이나 파문하며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지만 프리드리히는 이에 굴복하지 않아 더 빛을 발한다.

이렇게 군사력도 자금도 없었던 젊은 프리드리히가 통치권 확립하고 부지런히 나라를 탈바꿈시키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소설의 주인공 같은데, 프리드리히는 가상 인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며 그의 업적도 실제로 달성되었으니 평전임에도 소설보다 더 흥미로웠고 지루하지가 않았다.
이런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가진 매력에 시오노 나나미의 필력이 더해져서 더 그랬을 수도 있다.

그리고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를 읽으면서는 프리드리히 한 명의 생애를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중세라는 시대를 그려볼 수 있기 때문에, 서양 중세에 관심이 있었다거나 이 서평을 읽으며 프리드리히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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