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 수 있는 여자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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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커상 수상자이자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책 좀 읽은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작품 <시녀 이야기>는 드라마와 그래픽노블 등으로 만들어질 만큼 유명하다.
하지만 나는 읽어야 할 책 목록에 마거릿 애트우드의 책을 여러 권 적어두고도 한 권도 읽지 못했다.
(별다른 이유는 아니고 읽고 싶은 책은 많고 책을 읽는 속도에는 한계가 있다보니 그렇게 됐다)
<시녀 이야기> 그래픽노블을 보긴 했지만 그것으로 마거릿 애트우드의 책을 읽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책 <먹을 수 있는 여자>가 내가 처음 읽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이 되겠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소설은 처음으로 출판된 마거릿 애트우드의 장편 소설이기도 했다.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최근에 출판되어 작가가 비교적 최근에 쓴 소설인 줄 알았는데 1960년대 초반 내내 써서 1965년에 탈고한 소설이었다.
그리고 소설을 탈고한 지 4년이 흐른 뒤인 1969년에 책이 출판되었을 때에는 북미에서 페미니즘 열풍이 불기 시작했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여자>를 페미니즘 운동의 소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작가가 소설을 썼던 시기는 페미니즘 열풍이 불기 이전이었으므로 ‘프로토페미니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 메리언 매캘핀은 시모어 서베이스라는 설문 회사에서 근무하며 친구 에인슬리와 함께 살고 있고 또 피터라는 잘생긴 수습 변호사 남자친구가 있는, 평범한 캐나다 여자다.

메리언에게는 일찌감치 임신을 하게 되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둘 낳은 뒤 셋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인 클래라와 메리언과 함께 살고 있는 에인슬리라는, 상황도 성향도 정반대인 친구 둘이 있다.
습도가 높아 끈적이는 캐나다 공기 속에서 이전과 다르지 않은 일상이 이어지는 듯했지만, 어느 날 에인슬리가 메리언과 함께 클래라의 집을 방문한 뒤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가지겠다고 선언을 하고 메리언의 또다른 친구 렌 슬랭크에게 접근하며 그 아이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아이를 낳을 거야.”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
“그러니까 결혼을 하겠다는 거야?” (...) 에인슬리가 누구에게 관심이 있는지 알아맞혀보려고 했지만 오리무중이었다. 나와 알고 지낸 기간 동안 그녀는 확실하게 결혼반대주의자였다.
“그렇게 물어볼 줄 알았다.” 그녀는 재밌어하는 한편 경멸하는 투로 말했다. “아니, 결혼은 하지 않을 거야.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게 문제거든. 부모가 너무 많다는 거. (...)”

p.58


에인슬리는 짜증 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 식으로 비꼬다니. 하지만 자기들이 아이한테 어떤 유전자를 물려주는지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기만 해도 다들 그렇게 맹목적으로 달려들지 않을 거야. 우리도 알다시피 인류는 지금 퇴보 중인데 그게 다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열등한 유전자를 물려줘서 그래. (...)”

p.63


그렇게 에인슬리의 아이 계획으로 심란해진 데 이어 결혼 이야기는 꺼낼 것 같지 않던 남자친구 피터가 청혼을 하자 오히려 메리언의 속은 더욱 복잡해지고, 급기야 식이 문제까지 생기게 되는데...


“너 맛있어 보인다.” 그녀는 작품을 향해 말했다. “아주 먹음직스러워 보여. 너는 결국 먹히게 될 거야. 음식의 운명이 그렇거든.”

p.374


<먹을 수 있는 여자>라는 소설 제목도, 소설 후반부에 메리언이 여자 형상을 한 케이크를 만들어 퍼먹는 모습도 무척 자극적이다.
우리는 여성을 음식에 비유하고, 음식을 보듯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소설의 제목과 메리언의 기행이 더욱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부엌에서 성상이나 쿠션에 얹은 왕관같이 성스러운 물건을 들고 행진하는 연극배우처럼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접시를 들고 나왔다. 무릎을 꿇고 피터 앞에 놓인 커피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당신은 나를 파괴하려고 하고 있지?” 그녀는 물었다. “나를 동화시키려고 하고 있지? 하지만 내가 대역을 만들었어. 당신이 훨씬 더 좋아할 만한 걸로. 당신이 처음부터 진심으로 원했던 건 이거 아니야? 내가 포크 가져다줄게.” 그녀는 밋밋한 목소리로 말했다.

p.376


앞서 말했듯 이 소설은 1960년대 초반에 쓰여졌기 때문에 그 시기 캐나다 여성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회사에서는 결혼한 여성을 선호하지 않는 반면 남성은 결혼을 한 쪽이 사회 생활을 하기에 더 유리하고, 결혼을 하지 않은 남녀를 바라보는 시각 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50년도 더 전인 1960년대 캐나다나 지금의 한국이 큰 차이가 있기는커녕 비슷한 부분이 더 많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지금 내가 서평을 작성하고 있는 2020년 12월 즈음이나 멀지 않은 미래에 이 소설의 서평이나 책을 읽은 사람은 에인슬리를 보며 얼마 전에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뉴스 하나를 떠올릴 것이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방송인 사유리 씨가 결혼하지 않고 일본에서 기증 받은 정자로 아이를 가지고 비혼모로서 출산한 일이다.
사유리 씨를 지지하는 수많은 응원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뉴스 기사를 읽으면서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는 불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실소가 터져나왔다.
출생율이 낮아서 문제라고 말하고, 남자들 결혼 시킨다고 돈까지 쥐어주며 다른 나라 여자와의 매매혼을 장려해온 우리나라에서 여자가 사유리 씨와 같은 방법으로 아기를 가지는 것은 불법이라니 참으로 우습지 않은가?
소설을 통해 볼 수 있는 1960년대 캐나다와 내가 살고 있는 2020년의 한국이 그리 달라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소설을 읽고 나자 저자 서문에서 마거릿 애트우드가 한 말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초반부에 여주인공의 앞에 놓인 선택의 갈림길이 막판까지 그대로인 것은 주목할 만하다. (...) 하지만 1960년대 초반에 캐나다의 젊은 여성들은 아무리 고학력자라도 이런 고민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후로 모든 게 달라졌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일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의 논조는 예컨대 지금보다 사회가 더 빠르게 달라질 수 있다고 믿었던 1971년보다 현재에 더 걸맞지 않나 싶다. 페미니즘 운동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우리가 포스트 페미니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착각의 늪에 빠져 있거나 페미니즘 자체를 고민하는 데 신물이 났거나 둘 중 하나다.
(...)
1979년 에든버러에서
마거릿 애트우드

p.10-11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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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문자 - 설형 문자에서 이모티콘까지 지양청소년 과학.인문 시리즈 1
비탈리 콘스탄티노프 지음, 이미화 옮김 / 지양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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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렇게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데에는 인쇄술의 혁신을 일으킨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공도 빠뜨릴 수 없지만, 그 이전에 문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문자가 빼곡히 들어찬 책을 좋아하기 때문인지, 외국어에 관심이 있기 때문인지, 역사에 흥미가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셋 모두에 해당하기 때문인지, 나는 문자에도 관심이 갔다.
<반지의 제왕>의 작가로 유명한 J. R. R 톨킨처럼 문자를 창조하는 수준의 관심은 아니지만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신성문자)를 외웠던 정도의 관심이라고나 할까.
(쓰지 않으면 잊힌다고,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는 쓸 일이 없다보니 지금은 가물가물하다)
아무튼 문자에 대한 관심이 나를 이 책으로 이끌었다.

지양 청소년 과학 인문 시리즈 첫 번째 도서 <세계의 문자>는 5,500년 전 수메르에서 사용했던 설형문자(쐐기문자)부터 오늘날 우리가 하루에도 몇 번이고 쓰는 이모티콘과 인공 문자까지, 그리고 우리의 자랑 한글부터 생전 처음 들어보는 여러 소수 민족의 문자까지, 문자 역사의 흐름을 타고 다양한 문자를 그래픽노블 형식으로 소개한다.

이 그래픽노블은 문자의 역사에 대해서 잘 모르는 독자도 읽으면서 어려움을 느끼거나 부담을 갖지 않도록 각 문자를 깊게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다루었다면 분량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이런 문자가 있다고 소개하는 정도고 역사 또한 가볍게 훑어보는 느낌인데다 만화 형식으로 풀어냈다.

저자는 먼저 단어문자(표어문자)와 소리글자(표음문자) 등 문자 체계에 따라 분류된 각 문자 집단의 특징을 소개하며 앞으로 만날 다양한 문자를 그에 맞춰 이해하기 수월하게 했고, 수만 년 전 그려진 문자로 추정되는 동굴 벽화 이야기부터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컴퓨터에 적용된 유니코드와 이모티콘 이야기까지까지를 개괄적으로 알려주고 난 다음에 본격적으로 여러 문화와 역사 속 다양한 문자를 각각 소개한다.

문자가 창조되고, 그 문자에서 다른 문자가 또 파생되고, 정복에 의해 고유의 문자가 사라지기도 하는문자의 역사를 따라가면서 문자의 변천 과정 또한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되니 더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난, 다양하게 뾰족뾰족하거나 꼬불꼬불하고 헷갈리게 생겨서 복잡해보이는 문자들이 재미있어 보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다시 한번 한글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펼치기 전부터 ‘세계의 문자’에 대한 책에 ‘한글’ 이야기가 빠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문자의 창조자들을 다룬 장에서 한글을 찾아볼 수 있었다.
책에서 한글은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문자는 해당 소리를 나는 기관의 모양을 본떴고, 자음과 모음을 네모반듯한 블록 형태로 구성해서 글자를 만들 수 있어 논리적으로 뛰어나다고, 내가 한글에 대해 아는 그대로 소개했다.

한글을 설명한 부분을 보니까 다른 문자들도 이처럼 굵직한 특징을 뽑아내서 간단명료하게 설명을 잘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픽노블 <세계의 문자>의 그림은 익살스러운 면이 있음에도 영미 문화권 작가와 달리 유머 감각이 돋보이지는 않지만(역시 비탈리 콘스탄티노프는 독일에서 활동하는 작가여서 그런가?), 이 책의 재미있는 점은 가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영화 <스타트랙> 속 클링온 문자나 앞서 언급했던 J. R. R. 톨킨이 만든 판타지 세계관 속 문자와 같은 인공 문자까지 다루었다는 것이다.

나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도 <스타트랙>에도 별 관심은 없음에도 며칠 전에 다시 본 잭 에프론 주연의 영화 <17 어게인>이나 오랜 시간 인기를 유지한 미드 <빅뱅이론>에서처럼 등장인물들이 판타지 세계관 속 그 언어들을 구사하는 것을 볼 때면 가상 언어의 위력에 놀라고 또 재미있어 보였기 때문에 <세계의 문자>에서 가상 언어를 다룬 것이 흥미로웠다.

부록으로는 문자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가 도표로 알아보기 쉽게 그려져 있어 그래픽노블을 다 보고 다시 한번 책 내용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만약 워낙 다양한 문자가 등장하는 통에 책을 보다가 역사의 흐름을 잃거나 헷갈리더라도 이 부록을 참고한다면 다시 물줄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한글 다음으로 익숙한 문자는 세계 공용어인 영어 덕분에 익숙해진 라틴 문자(로마자)일 것이다.
A부터 Z로 구성된 라틴문자도 처음에는 V 하나를 V,U,W처럼 읽다가 나중에 U와 J그리고 V 두 개가 겹친 모양의 W가 더해지는 등 변화를 거쳐서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인데, 이렇게 변화를 거친 문자는 많고 그 이유도 각기 다르다.
문명이 발생하고, 서로 잡아 먹고 잡아 먹히고, 사라지듯 문자 또한 비슷한 운명을 거친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문자도 점차 변화하고 있고, 언젠가는 사라지거나 아예 새로운 문자가 탄생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원인은 과거 일본이 한글을 빼앗아가려고 했거나 중국이 소수민족에게서 고유의 문자를 빼앗고 문자를 통일하려고 했던 것과 같이 강제적인 것일 수도 있고 편의를 위한 것일 수도 있겠지.
책을 보고 서평을 쓰면서 한글을 비롯한 다양한 문자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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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가 - 일상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파리의 관찰자 클래식 클라우드 24
이연식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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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드가와 그의 작품을 탐구하는 시간과 파리 곳곳을 여행하는 시간의 조화. <클림트>에 이어 <드가>를 읽으면서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에 대한 신뢰가 공고해졌다. 드가의 작품으로 발레리나(무용수)를 그린 그림만 알고 있다면 더욱이 이책을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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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가 - 일상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파리의 관찰자 클래식 클라우드 24
이연식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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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의 그림을 벽에 걸어두며 그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그의 그림 몇 점을 좋아한다고 “에드가 드가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무엇보다 에드가 드가가 여성을 혐오한다는 말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이런 찜찜함은 근본적으로 내가 에드가 드가와 그의 작품에 대해 잘은 모른다는 것에서 기인한 것인데, 이번에 아르테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클래식 클라우드 스물네 번째 책 <드가>를 읽으면서 일레르 제르맹 에드가르 드가와 그의 작품에 대해서 알아가는 여행을 했다.



에드가르 드가(또는 에드가 드가)의 풀네임은 일레르 제르맹 에드가르 드가(Hilaire Germain Edgar Degas)인데, 책을 읽으며 그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보통 사람들이 화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는 퍽 다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그는 할아버지가 프랑스를 떠나 이탈리아 나폴리에 은행을 차려서 이룬 부 덕분에 경제적으로 아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심지어 어릴 때 음악과 미술을 좋아하는 아버지와 함께 미술품 수집가들을 만나러 다녔고, 그런 아버지이기 때문인지 드가가 화가가 된다고 했을 때 집안의 반대도 없었다고 하니 예술가로서 굉장히 운이 좋은 편이었던 셈이다.
덕분에 드가는 국비 유학에 목을 맬 필요 없이 미술의 본산으로 여겨지던 이탈리아에 가서 친척 집에 머무르며 거장의 작품을 직접 보고 연구하는 그림을 공부할 수 있었고, (나중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시기도 있었지마는) 대체로 예술가 활동을 하면서도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 다른 화가와 달리 경제적 이유로 압박 받는 일이 없었다.


(...)
이 대목에서 드러나는 것은 인상주의 예술가들이 예술적인 지향점 외에 계급적인 측면에서도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드가와 마네, 카유보트, 베르트 모리조, 커셋은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고, 모네와 르누아르는 형편이 안 좋았다. 특히 르누아르는 재봉사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돈을 벌기 위해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면서 예술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런데 가장 가난했던 르누아르의 그림이 가장 따스하고 행복한 느낌을 준다. 그에게는 대중의 사랑이 당장 필요했기 때문이다. 반면 드가와 커셋, 카유보트는 냉랭하고 세련된 스타일을 보여준다.

이처럼 대부분의 인상주의 예술가들이 지향했던 중심부에서 비켜나 주변부에서 움직이던 드가의 행보는 그의 부유한 배경과 관련있었다. 당장 작품을 팔지 않아도 되었던 그는 멀리 내다보면서 미술계에서 자신의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존재감을 높이는 방향으로 움직이려 했다.

p.102-105


그리고 그는 인상주의 모임에 속하면서도 밖으로 나가 햇빛 아래의 자연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화가들과는 다르게 도시 문명이 만들어낸 인공조명 아래인 실내에 있는 인물들을 그려냈다.


하지만 드가도 초반에 역사화를 그리던 때가 있었고, 나는 그런 면모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드가가 이런 그림도 그렸단 말이야?’하는 생각이 드는 그림도 볼 수 있었다.

사실 그림을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역사화는 드가에게는 맞지 않는 옷처럼 보였는데, 그렇게 어정쩡하게 역사화를 그리던 드가는 ‘자기 시대와 함께 보이는 걸 그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나간 일보다는 현재를 그렸던 에두아르 마네의 영향을 받아 일상적인 모습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마네가 드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 외에도 두 사람의 운명은 흥미롭게 엮여있었다.

한번은 드가가 마네 부부의 모습을 그려 마네에게 선물했다가, 며칠 뒤 마네의 집에 방문했을 때 자신이 선물한 그림이 잘려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그 그림을 가지고 나와야 했다.
드가는 소파에 앉아 있는 마네와 피아노를 치고 있는 마네의 배우자 쉬잔 렌호프를 그려서 줬는데,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마네는 평소 쉬잔의 얼굴을 더 아름답게 그렸기 때문에 드가가 그린 쉬잔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쉬잔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그림을 일부 잘라버렸던 것이다.
자신이 그린 그림이 찢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같은 화가였던 마네가 나보다 더 잘 알았을 텐데, 이런 무례한 행동에 드가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지... 하지만 놀랍게도 드가는 마네에게 따지고 들지도 않았다고 한다.

(위 : 드가가 그린 <마네 부부>, 아래 :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피아노를 치는 쉬잔 렌호프>)


하지만 여기에서 끝이 난다면 드가와 마네의 운명이 흥미롭게 엮였다고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후에 마네의 그림 또한 잘리는 운명에 처하는데, 마네가 죽고 그의 그림을 정리하던 양아들이 <막시밀리안의 처형>을 판답시고 그 작품을 조각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조각난 마네의 <막시밀리안의 처형> 조각을 백방으로 애쓴 끝에 찾아내서 캔버스에 붙인 것이 다른 사람도 아니라 드가였으니 참 흥미롭지 아니한가?
드가가 손님들에게 그렇게 붙인 <막시밀리안의 처형>을 보여줄 때마다 했다는 말도 재미있다.


드가는 손님들에게 이 그림을 보여줄 때마다 “하여튼 가족을 조심해야 하오!”라며 그림을 망친 마네의 가족을 성토했다. 마네는 드가의 그림을 잘랐다가 자신의 그림이 잘렸고, 그것을 드가가 다시 붙였으니 얄궂은 노릇이었다.

p.87



그림을 잘랐다니 말인데, 드가는 화면 속의 인물이나 사물을 신중하고 주의깊게, 그리하여 섬세하고 아름답게 절단했으며, 중심 인물이 한쪽으로 치우쳐있는 등 화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할 거라 기대한 요소와 부차적인 요소를 뒤바꿔 위계를 흐트러뜨리고, 화면 중심에 공백을 만들기도 하면서 역동적이고 전복적으로 화면을 구성했다는 것을 클래식 클라우드 드가편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러자 드가의 작품에서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자는 한 예술가의 생애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고 했고(나도 그 말에 적극 동의한다), 그렇기에 책을 읽으면서 드가가 살던 19세기 프랑스가 겪었던 여러 차례의 혁명, 프로이센과의 전쟁과 파리코뮌, 파리 대개조, 드레퓌스 사건 등 역사에 대한 지식도 쌓을 수 있었다.

전쟁과 내전 때문에 경제적으로 위축되어 더 보수적인 취향과 기준을 고수할 테니 차라리 우리가 전시회를 열자며 만들어진 ‘무명의 화가, 조각가, 판화가 협회’가 바로 드가의 삶에도 미술사에도 빠질 수 없는 ‘인상주의’ 모임이었으니 당시 시대적 상황이 예술가 개인에게도 미술사 전체에도 큰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하다.
화가들에게 초상화 고객을 빼앗아가고 미술의 흐름을 바꾼 사진의 등장이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미친 영향도 빼놓을 수 없겠다.


무엇보다 클래식 클라우드 <드가>를 읽음으로써 얻게 된 큰 수확은 드가의 그림을 깊고 폭넓게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함께 드가에 대한 오해를 풀게된 것이 아닐까.


여성들을 그려냈다는 것이 내가 드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였건만 반대로 드가가 트라우마 때문에 여성을 혐오했다는 이야기가 세상에 떠돌고 있다.
마치 거의 정설인 것처럼 네이버 검색창에 ‘드가 여성혐오’를 검색해보면 검색 결과가 주르륵 뜨니 여간 신경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에도 여성에 대한 드가의 시선과 생각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드가는 메리 커셋과 베르트 모리조라는 여성 예술가들을 자신이 있는 인상주의 모임에 합류시키고 예술 활동을 격려했으며, 특히 메리 커셋과는 잘 맞아서 곧잘 함께 다녔다는 것을 그림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여성의 누드화를 그릴 때 관음적인 시선에서 그렸다는 것에서 한계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저자는 관음증의 대상이 되려면 이상적인 육체여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드가의 많은 작품이 무대에 오르기 위해 연습하고, 서커스를 하고, 다림질 하는 등 자기 일에 몰두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담아냈다는 것을 생각하면 드가는 어쨌든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이렇게 드가가 여성을 혐오했다는 오해를 풀 수 있었고, 또 내가 알고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여성들을 그려낸 드가의 작품들에 대해 알게 되면서 이 책을 읽은 것은 드가의 작품이 더 좋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대표 매력은 단연 ‘한 예술가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이다.

<콩코르드 광장, 르피크 자작과 딸들>의 무대인 콩코르드 광장, 드가가 자주 드나들며 발레리나(무용수)의 모습을 그렸다는 오페라가르니에와 같이 드가가 그림으로 그려내거나 머문 장소를 비롯한 파리 곳곳을 저자와 함께 거니는 것은 코로나19 때문에 오랜 기간 사회적 거리두기가 이어지는 와중에 코에 바람을 넣어주듯 나를 환기 시켜주었다.
책 앞쪽에 위치한, 주요 장소들을 콕 찝어놓은 그림 지도를 보며 따라가면 더욱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또한 파리의 심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방대한 작품을 소장했고 거대한 규모를 가진 루브르, 그리고 관학파와 (드가가 포함된) 인상주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어 드가의 조각 작품도 볼 수 있는 (루브르보다 규모는 작아서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알찬) 오르세 미술관에 대해서도 즐겁게 읽었다.


특히 드가가 디아고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판화로 옮기다가 마네를 만났던 그 루브르에서 지금도 모사 작업이 가능하다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당연히 원하는 사람 모두가 루브르에서 모사 작업을 할 수는 없고, 루브르 박물관 측에서 전 세계 사람들 가운데 매년 150명에서 200명을 선정해서 허가를 해준다고 한다.
그리고 관람객이 많은 일요일은 작업을 할 수 없으며 위작으로 유통되는 것을 막기 위해 원작보다 20퍼센트 작은 화면에 작업하고 캔버스 뒷면 나무틀에 박물관 인장을 찍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나중에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에 가면 미술사에 획을 그은 거장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명화를 모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 될 것이다.


에드가르 드가라는 한 예술가를 통해 그의 작품을 알아가고, 그의 작품을 통해 에드가르 드가라는 예술가를 알아가는 시간을 보내면서 드가의 작품을 더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통해 드가를 만난 것과 같이 만나고 싶은 예술가가 한 명 생겼다.
바로 ‘오귀스트 르누아르’다.
가난했기 때문에 대중의 사랑이 가장 필요했고, 그렇기에 따스하고 행복한 느낌을 주는 그림을 그린 화가라는, 드가와 대비되었던 르누아르에 대한 문장이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책이 출간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로 거장 100인을 만날 수 있다고 했으니) 앞으로 클래식 클라우드를 통해 독자들과 만날 수십 명의 거장 중에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빠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클림트>에 이어 <드가>를 읽으면서 클래식 클라우드에 대한 신뢰가 더 공고해졌기에 클래식 클라우드 <르누아르>를 읽는 것도 기대된다.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출판사 아르테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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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 우화 전집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32
이솝 지음, 아서 래컴 그림,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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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 우화란 이런 것이었군요. 그리스 원전을 번역하여 각색되지 않은 이솝 우화의 참맛을 알 수 있었고, 각 우화가 가진 교훈이 정리된 데다 친절한 각주 덕분에 우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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