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가 - 일상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파리의 관찰자 클래식 클라우드 24
이연식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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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의 그림을 벽에 걸어두며 그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그의 그림 몇 점을 좋아한다고 “에드가 드가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무엇보다 에드가 드가가 여성을 혐오한다는 말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이런 찜찜함은 근본적으로 내가 에드가 드가와 그의 작품에 대해 잘은 모른다는 것에서 기인한 것인데, 이번에 아르테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클래식 클라우드 스물네 번째 책 <드가>를 읽으면서 일레르 제르맹 에드가르 드가와 그의 작품에 대해서 알아가는 여행을 했다.



에드가르 드가(또는 에드가 드가)의 풀네임은 일레르 제르맹 에드가르 드가(Hilaire Germain Edgar Degas)인데, 책을 읽으며 그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보통 사람들이 화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는 퍽 다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그는 할아버지가 프랑스를 떠나 이탈리아 나폴리에 은행을 차려서 이룬 부 덕분에 경제적으로 아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심지어 어릴 때 음악과 미술을 좋아하는 아버지와 함께 미술품 수집가들을 만나러 다녔고, 그런 아버지이기 때문인지 드가가 화가가 된다고 했을 때 집안의 반대도 없었다고 하니 예술가로서 굉장히 운이 좋은 편이었던 셈이다.
덕분에 드가는 국비 유학에 목을 맬 필요 없이 미술의 본산으로 여겨지던 이탈리아에 가서 친척 집에 머무르며 거장의 작품을 직접 보고 연구하는 그림을 공부할 수 있었고, (나중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시기도 있었지마는) 대체로 예술가 활동을 하면서도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 다른 화가와 달리 경제적 이유로 압박 받는 일이 없었다.


(...)
이 대목에서 드러나는 것은 인상주의 예술가들이 예술적인 지향점 외에 계급적인 측면에서도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드가와 마네, 카유보트, 베르트 모리조, 커셋은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고, 모네와 르누아르는 형편이 안 좋았다. 특히 르누아르는 재봉사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돈을 벌기 위해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면서 예술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런데 가장 가난했던 르누아르의 그림이 가장 따스하고 행복한 느낌을 준다. 그에게는 대중의 사랑이 당장 필요했기 때문이다. 반면 드가와 커셋, 카유보트는 냉랭하고 세련된 스타일을 보여준다.

이처럼 대부분의 인상주의 예술가들이 지향했던 중심부에서 비켜나 주변부에서 움직이던 드가의 행보는 그의 부유한 배경과 관련있었다. 당장 작품을 팔지 않아도 되었던 그는 멀리 내다보면서 미술계에서 자신의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존재감을 높이는 방향으로 움직이려 했다.

p.102-105


그리고 그는 인상주의 모임에 속하면서도 밖으로 나가 햇빛 아래의 자연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화가들과는 다르게 도시 문명이 만들어낸 인공조명 아래인 실내에 있는 인물들을 그려냈다.


하지만 드가도 초반에 역사화를 그리던 때가 있었고, 나는 그런 면모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드가가 이런 그림도 그렸단 말이야?’하는 생각이 드는 그림도 볼 수 있었다.

사실 그림을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역사화는 드가에게는 맞지 않는 옷처럼 보였는데, 그렇게 어정쩡하게 역사화를 그리던 드가는 ‘자기 시대와 함께 보이는 걸 그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나간 일보다는 현재를 그렸던 에두아르 마네의 영향을 받아 일상적인 모습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마네가 드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 외에도 두 사람의 운명은 흥미롭게 엮여있었다.

한번은 드가가 마네 부부의 모습을 그려 마네에게 선물했다가, 며칠 뒤 마네의 집에 방문했을 때 자신이 선물한 그림이 잘려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그 그림을 가지고 나와야 했다.
드가는 소파에 앉아 있는 마네와 피아노를 치고 있는 마네의 배우자 쉬잔 렌호프를 그려서 줬는데,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마네는 평소 쉬잔의 얼굴을 더 아름답게 그렸기 때문에 드가가 그린 쉬잔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쉬잔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그림을 일부 잘라버렸던 것이다.
자신이 그린 그림이 찢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같은 화가였던 마네가 나보다 더 잘 알았을 텐데, 이런 무례한 행동에 드가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지... 하지만 놀랍게도 드가는 마네에게 따지고 들지도 않았다고 한다.

(위 : 드가가 그린 <마네 부부>, 아래 :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피아노를 치는 쉬잔 렌호프>)


하지만 여기에서 끝이 난다면 드가와 마네의 운명이 흥미롭게 엮였다고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후에 마네의 그림 또한 잘리는 운명에 처하는데, 마네가 죽고 그의 그림을 정리하던 양아들이 <막시밀리안의 처형>을 판답시고 그 작품을 조각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조각난 마네의 <막시밀리안의 처형> 조각을 백방으로 애쓴 끝에 찾아내서 캔버스에 붙인 것이 다른 사람도 아니라 드가였으니 참 흥미롭지 아니한가?
드가가 손님들에게 그렇게 붙인 <막시밀리안의 처형>을 보여줄 때마다 했다는 말도 재미있다.


드가는 손님들에게 이 그림을 보여줄 때마다 “하여튼 가족을 조심해야 하오!”라며 그림을 망친 마네의 가족을 성토했다. 마네는 드가의 그림을 잘랐다가 자신의 그림이 잘렸고, 그것을 드가가 다시 붙였으니 얄궂은 노릇이었다.

p.87



그림을 잘랐다니 말인데, 드가는 화면 속의 인물이나 사물을 신중하고 주의깊게, 그리하여 섬세하고 아름답게 절단했으며, 중심 인물이 한쪽으로 치우쳐있는 등 화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할 거라 기대한 요소와 부차적인 요소를 뒤바꿔 위계를 흐트러뜨리고, 화면 중심에 공백을 만들기도 하면서 역동적이고 전복적으로 화면을 구성했다는 것을 클래식 클라우드 드가편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러자 드가의 작품에서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자는 한 예술가의 생애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고 했고(나도 그 말에 적극 동의한다), 그렇기에 책을 읽으면서 드가가 살던 19세기 프랑스가 겪었던 여러 차례의 혁명, 프로이센과의 전쟁과 파리코뮌, 파리 대개조, 드레퓌스 사건 등 역사에 대한 지식도 쌓을 수 있었다.

전쟁과 내전 때문에 경제적으로 위축되어 더 보수적인 취향과 기준을 고수할 테니 차라리 우리가 전시회를 열자며 만들어진 ‘무명의 화가, 조각가, 판화가 협회’가 바로 드가의 삶에도 미술사에도 빠질 수 없는 ‘인상주의’ 모임이었으니 당시 시대적 상황이 예술가 개인에게도 미술사 전체에도 큰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하다.
화가들에게 초상화 고객을 빼앗아가고 미술의 흐름을 바꾼 사진의 등장이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미친 영향도 빼놓을 수 없겠다.


무엇보다 클래식 클라우드 <드가>를 읽음으로써 얻게 된 큰 수확은 드가의 그림을 깊고 폭넓게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함께 드가에 대한 오해를 풀게된 것이 아닐까.


여성들을 그려냈다는 것이 내가 드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였건만 반대로 드가가 트라우마 때문에 여성을 혐오했다는 이야기가 세상에 떠돌고 있다.
마치 거의 정설인 것처럼 네이버 검색창에 ‘드가 여성혐오’를 검색해보면 검색 결과가 주르륵 뜨니 여간 신경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에도 여성에 대한 드가의 시선과 생각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드가는 메리 커셋과 베르트 모리조라는 여성 예술가들을 자신이 있는 인상주의 모임에 합류시키고 예술 활동을 격려했으며, 특히 메리 커셋과는 잘 맞아서 곧잘 함께 다녔다는 것을 그림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여성의 누드화를 그릴 때 관음적인 시선에서 그렸다는 것에서 한계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저자는 관음증의 대상이 되려면 이상적인 육체여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드가의 많은 작품이 무대에 오르기 위해 연습하고, 서커스를 하고, 다림질 하는 등 자기 일에 몰두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담아냈다는 것을 생각하면 드가는 어쨌든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이렇게 드가가 여성을 혐오했다는 오해를 풀 수 있었고, 또 내가 알고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여성들을 그려낸 드가의 작품들에 대해 알게 되면서 이 책을 읽은 것은 드가의 작품이 더 좋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대표 매력은 단연 ‘한 예술가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이다.

<콩코르드 광장, 르피크 자작과 딸들>의 무대인 콩코르드 광장, 드가가 자주 드나들며 발레리나(무용수)의 모습을 그렸다는 오페라가르니에와 같이 드가가 그림으로 그려내거나 머문 장소를 비롯한 파리 곳곳을 저자와 함께 거니는 것은 코로나19 때문에 오랜 기간 사회적 거리두기가 이어지는 와중에 코에 바람을 넣어주듯 나를 환기 시켜주었다.
책 앞쪽에 위치한, 주요 장소들을 콕 찝어놓은 그림 지도를 보며 따라가면 더욱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또한 파리의 심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방대한 작품을 소장했고 거대한 규모를 가진 루브르, 그리고 관학파와 (드가가 포함된) 인상주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어 드가의 조각 작품도 볼 수 있는 (루브르보다 규모는 작아서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알찬) 오르세 미술관에 대해서도 즐겁게 읽었다.


특히 드가가 디아고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판화로 옮기다가 마네를 만났던 그 루브르에서 지금도 모사 작업이 가능하다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당연히 원하는 사람 모두가 루브르에서 모사 작업을 할 수는 없고, 루브르 박물관 측에서 전 세계 사람들 가운데 매년 150명에서 200명을 선정해서 허가를 해준다고 한다.
그리고 관람객이 많은 일요일은 작업을 할 수 없으며 위작으로 유통되는 것을 막기 위해 원작보다 20퍼센트 작은 화면에 작업하고 캔버스 뒷면 나무틀에 박물관 인장을 찍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나중에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에 가면 미술사에 획을 그은 거장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명화를 모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 될 것이다.


에드가르 드가라는 한 예술가를 통해 그의 작품을 알아가고, 그의 작품을 통해 에드가르 드가라는 예술가를 알아가는 시간을 보내면서 드가의 작품을 더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통해 드가를 만난 것과 같이 만나고 싶은 예술가가 한 명 생겼다.
바로 ‘오귀스트 르누아르’다.
가난했기 때문에 대중의 사랑이 가장 필요했고, 그렇기에 따스하고 행복한 느낌을 주는 그림을 그린 화가라는, 드가와 대비되었던 르누아르에 대한 문장이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책이 출간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로 거장 100인을 만날 수 있다고 했으니) 앞으로 클래식 클라우드를 통해 독자들과 만날 수십 명의 거장 중에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빠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클림트>에 이어 <드가>를 읽으면서 클래식 클라우드에 대한 신뢰가 더 공고해졌기에 클래식 클라우드 <르누아르>를 읽는 것도 기대된다.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출판사 아르테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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