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 수 있는 여자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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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커상 수상자이자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책 좀 읽은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작품 <시녀 이야기>는 드라마와 그래픽노블 등으로 만들어질 만큼 유명하다.
하지만 나는 읽어야 할 책 목록에 마거릿 애트우드의 책을 여러 권 적어두고도 한 권도 읽지 못했다.
(별다른 이유는 아니고 읽고 싶은 책은 많고 책을 읽는 속도에는 한계가 있다보니 그렇게 됐다)
<시녀 이야기> 그래픽노블을 보긴 했지만 그것으로 마거릿 애트우드의 책을 읽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책 <먹을 수 있는 여자>가 내가 처음 읽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이 되겠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소설은 처음으로 출판된 마거릿 애트우드의 장편 소설이기도 했다.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최근에 출판되어 작가가 비교적 최근에 쓴 소설인 줄 알았는데 1960년대 초반 내내 써서 1965년에 탈고한 소설이었다.
그리고 소설을 탈고한 지 4년이 흐른 뒤인 1969년에 책이 출판되었을 때에는 북미에서 페미니즘 열풍이 불기 시작했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여자>를 페미니즘 운동의 소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작가가 소설을 썼던 시기는 페미니즘 열풍이 불기 이전이었으므로 ‘프로토페미니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 메리언 매캘핀은 시모어 서베이스라는 설문 회사에서 근무하며 친구 에인슬리와 함께 살고 있고 또 피터라는 잘생긴 수습 변호사 남자친구가 있는, 평범한 캐나다 여자다.

메리언에게는 일찌감치 임신을 하게 되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둘 낳은 뒤 셋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인 클래라와 메리언과 함께 살고 있는 에인슬리라는, 상황도 성향도 정반대인 친구 둘이 있다.
습도가 높아 끈적이는 캐나다 공기 속에서 이전과 다르지 않은 일상이 이어지는 듯했지만, 어느 날 에인슬리가 메리언과 함께 클래라의 집을 방문한 뒤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가지겠다고 선언을 하고 메리언의 또다른 친구 렌 슬랭크에게 접근하며 그 아이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아이를 낳을 거야.”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
“그러니까 결혼을 하겠다는 거야?” (...) 에인슬리가 누구에게 관심이 있는지 알아맞혀보려고 했지만 오리무중이었다. 나와 알고 지낸 기간 동안 그녀는 확실하게 결혼반대주의자였다.
“그렇게 물어볼 줄 알았다.” 그녀는 재밌어하는 한편 경멸하는 투로 말했다. “아니, 결혼은 하지 않을 거야.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게 문제거든. 부모가 너무 많다는 거. (...)”

p.58


에인슬리는 짜증 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 식으로 비꼬다니. 하지만 자기들이 아이한테 어떤 유전자를 물려주는지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기만 해도 다들 그렇게 맹목적으로 달려들지 않을 거야. 우리도 알다시피 인류는 지금 퇴보 중인데 그게 다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열등한 유전자를 물려줘서 그래. (...)”

p.63


그렇게 에인슬리의 아이 계획으로 심란해진 데 이어 결혼 이야기는 꺼낼 것 같지 않던 남자친구 피터가 청혼을 하자 오히려 메리언의 속은 더욱 복잡해지고, 급기야 식이 문제까지 생기게 되는데...


“너 맛있어 보인다.” 그녀는 작품을 향해 말했다. “아주 먹음직스러워 보여. 너는 결국 먹히게 될 거야. 음식의 운명이 그렇거든.”

p.374


<먹을 수 있는 여자>라는 소설 제목도, 소설 후반부에 메리언이 여자 형상을 한 케이크를 만들어 퍼먹는 모습도 무척 자극적이다.
우리는 여성을 음식에 비유하고, 음식을 보듯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소설의 제목과 메리언의 기행이 더욱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부엌에서 성상이나 쿠션에 얹은 왕관같이 성스러운 물건을 들고 행진하는 연극배우처럼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접시를 들고 나왔다. 무릎을 꿇고 피터 앞에 놓인 커피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당신은 나를 파괴하려고 하고 있지?” 그녀는 물었다. “나를 동화시키려고 하고 있지? 하지만 내가 대역을 만들었어. 당신이 훨씬 더 좋아할 만한 걸로. 당신이 처음부터 진심으로 원했던 건 이거 아니야? 내가 포크 가져다줄게.” 그녀는 밋밋한 목소리로 말했다.

p.376


앞서 말했듯 이 소설은 1960년대 초반에 쓰여졌기 때문에 그 시기 캐나다 여성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회사에서는 결혼한 여성을 선호하지 않는 반면 남성은 결혼을 한 쪽이 사회 생활을 하기에 더 유리하고, 결혼을 하지 않은 남녀를 바라보는 시각 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50년도 더 전인 1960년대 캐나다나 지금의 한국이 큰 차이가 있기는커녕 비슷한 부분이 더 많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지금 내가 서평을 작성하고 있는 2020년 12월 즈음이나 멀지 않은 미래에 이 소설의 서평이나 책을 읽은 사람은 에인슬리를 보며 얼마 전에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뉴스 하나를 떠올릴 것이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방송인 사유리 씨가 결혼하지 않고 일본에서 기증 받은 정자로 아이를 가지고 비혼모로서 출산한 일이다.
사유리 씨를 지지하는 수많은 응원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뉴스 기사를 읽으면서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는 불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실소가 터져나왔다.
출생율이 낮아서 문제라고 말하고, 남자들 결혼 시킨다고 돈까지 쥐어주며 다른 나라 여자와의 매매혼을 장려해온 우리나라에서 여자가 사유리 씨와 같은 방법으로 아기를 가지는 것은 불법이라니 참으로 우습지 않은가?
소설을 통해 볼 수 있는 1960년대 캐나다와 내가 살고 있는 2020년의 한국이 그리 달라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소설을 읽고 나자 저자 서문에서 마거릿 애트우드가 한 말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초반부에 여주인공의 앞에 놓인 선택의 갈림길이 막판까지 그대로인 것은 주목할 만하다. (...) 하지만 1960년대 초반에 캐나다의 젊은 여성들은 아무리 고학력자라도 이런 고민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후로 모든 게 달라졌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일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의 논조는 예컨대 지금보다 사회가 더 빠르게 달라질 수 있다고 믿었던 1971년보다 현재에 더 걸맞지 않나 싶다. 페미니즘 운동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우리가 포스트 페미니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착각의 늪에 빠져 있거나 페미니즘 자체를 고민하는 데 신물이 났거나 둘 중 하나다.
(...)
1979년 에든버러에서
마거릿 애트우드

p.10-11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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