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의 힘 - 조직심리학이 밝혀낸 현명한 선택과 협력을 이끄는 핵심 도구
박귀현 지음 / 심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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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이라는 짧은 시간. 현역과 복학생의 삶은 그렇게 다르다던데 나의 경우도 그러했다. 2001년만 하더라도 빔프로젝터와 PT는 매우 고오급 기술 중 하나였다.(심지어 강의 때 이걸 하려면 행정실 같은 데서 대여해야 했다!!) 그런데 전역 후 돌아온 캠퍼스에는 거의 모든 강의에 빔프로젝터가 활용되고 있었고 비싸게만 느껴졌던 노트북은 대학 생활의 필수품이 되었다. 파워포인트를 활용한 PT 능력은 기본 소양이 되어있었고. 어른들의 말이 옳았다. 세상은 변했다.

사실 이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꽤 신나게 이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적응을 하지 못했던 건, 지금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그 이름 '조별 과제'였다.


복학생이라는 이유로 나는 수업 첫 시간, 학번 혹은 교수님 마음대로 끊어지는 거의 모든 조에서 조장이 되었다. 처음 보는 조원들의 전화번호를 일일이 저장해야 했고 전화번호와 얼굴, 학과 등을 매칭 시키고 처음 만나는 5-6명(심할 땐 8~10명)의 조원들을 모아 과업을 정해줘야 했다. 발제 시 조사할 분량을 쪼개고, PT를 만들고, 발표자를 정하고(이건 보통은 나)도 남는 인원이 있을 때도 있다. 경험상 이 중에 20%는 잠수 혹은 기량 미달이기에 백업을 붙여야 하지만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이런 머리를 굴리는 중 한 녀석이 PT를 넘기는 손가락도 인원으로 정하자고 해 따로 불러 크게 혼낸 적도 있다 후..). 여하튼 이렇게 과업을 쪼개고 나면 의례적으로 2~30%의 인원은 잠수를 타거나 누가 봐도 인터넷에서 긁어온 수준 미달의 과제를 제출한다. 심한 경우는 발표 하루 전까지도 연락이 되지 않고, 꽤 많은 경우 발표날 빵이나 커피를 가득 들고 나타나서는 (주로 누가 죽었거나, 정신이 없었다며) PT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줄 것을 읍소하는 경우도 있다. 아예 대놓고 조원이 정해지는 날 점심을 거하게 사며 자기가 얼마나 바쁜지와 함께 본인은 묻어가겠노라 하며 허허 웃으시는 만학도님(주로 목사님..)들도 갑자기 떠오른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면 조별 과제 따위 다시는 없을 줄 알았다. 반전은 여기서 시작되는데 이 모든 조별 과제를 이겨내고 입사한 회사란 곳에서도 이 '조별 과제'가 매일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딘가 사라졌다 결정적일 때 나타나서는 실적을 나누길 요구하는 무임승차자, 늘 혼자 열심이지만 엉뚱한 방향으로 혼자 뛰어가는 열심이, 모두의 엔빵만이 공정이다 말하는 공정이. 

거기다 회사라는 집단은 조직 이기주의까지 더해져, 개인을 넘어 한 조직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에 대한 과제도 추가된다. 갑자기 떨어지는 과업이 이 팀과 저 팀 사이를 오가다 그만 땅에 떨어져 버리는 일, '00를 묻기 위해' 건 전화가 이 팀과 저 팀으로 오가다 그만 끊어지고만 경험들, 아마 회사라는 조직에 속해봤으면 누구나 한 번쯤 하는 이러한 경험에 절망하던 찰나. 대학 때야 수강 취소하면 그만이라지만 미치고 팔딱 뛰는 팀이라는 구조의 대환장 파티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고민하던 차에 이 모든 조별 과제에 대답하는 책이 나왔다.


앞서 말했듯 우리가 굉장히 뛰어난 프리랜서가 아닌 이상 우리는 회사라는 조직에 속하게 되고 그 안에서 각자의 팀으로 배정된다. 티 안에서 혹은 팀끼리, 나아가 회사끼리 우리는 수많은 의견을 주고 받고(때론 치고 받고), 수많은 인간들을 만나며(싸우며) 그렇게 성장(혹은 퇴화) 한다. 책은 그 조직 안에서 개인과 집단이 어떻게 하면 더 성장하고 성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꽤 많은 실험과 경험들을 가지고 설명한다. 어떤 부분은 조직심리학 수업 시간에 들었던 이야기 같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지금 당장 내 문제이기도 해서 꽤 꼼꼼히 들여다 보기도 했다. 어떤 챕터는 이제는 팀을 이끌어야 하는 리더로 역할이 주어지며 어떻게 함께 나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개인적 고민의 대답이 되어주기도 했다.

나아가 저자는 이렇게 하라는 충고에서 멈추지 않고 책은 집단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부작용에 대한 경고도 멈추지 않는다. 집단 허울, 집단 차별, 다수의 횡포, 개인의 이익과 집단의 이익 사이의 딜레마 등 다양한 이슈 발생 지점에 서 저자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멈추고 더 좋은 방향으로 사고할 것을 권한다. 결국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하니까.


새해에 다양한 과업들을 받은 사람도, 새로운 목표를 사진 이들도 있을진대 추천할 법한 책이다.

24년에는 우리 팀에 또 어떤 일이 벌어지려나. 아직은 기대보단 걱정이 앞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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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세상은 불안하다 - 일상을 깨뜨린 비극, 이름으로 톺아보기
선이정 지음 / 정한책방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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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대문을 나서며 오늘 저녁 별일 없이 다시 나섰던 그 문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나도 그랬다. 언제나처럼 현관을 나선 엄마도 당연히 돌아올 줄 알았다. 15살이 되던 어느 날이었다. 교통사고가 있었고 엄마는 그 문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오늘도 그저 그런 평범한 하루일 거라는 믿음이 무너지던 날. 일상이 깨어지고 우리 가족의 삶이 꺼져버린 날. 그날은 오랜 시간에 걸쳐 한 걸음씩 찾아오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순간에 훅 우리 모두의 삶을 깨고 들어왔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하루를 시작했고 지금도 그 삶을 살고 있다.


2.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라는 사랑스러운 드라마를 보며 엉엉 울었던 것도 아마 이런 이유일 것이다. 에피소드마다 주인공들은 어느 날 갑자기, 피할 수 없는 곳에서 깨어짐을 만난다. 사무실에 함께 앉은 동료의 얼굴에서, 매일 나를 짓누르는 공부의 무게에서, 응답하지 못한 한 통의 전화에서 인생은 무너지고 마음은 고장 나 버린다. 이 드라마에서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들의 옆에는 항상 그 고장 난 마음을 함께 끌어안고 울어주는 가족, 친구, 사회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이 드라마가 ’드라마‘인 이유이기도 하다.


3. 이렇듯 당신의 세상은 불안하다. 책은 이 조금은 두려운 선언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자는 챕터마다 하나의 이름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미 알고 있는 이름일 수도, 혹은 낯선 이름일 수도 있다. 이 이름의 공통점은 어느 순간(혹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유도 모를 깨어짐에 부딪힌 이들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도 우리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지구마을 어딘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시리아 난민, 홍콩 우산 혁명, 인도 파키스탄 분쟁, 미투 등. 어쩌면 우리는 이 깨어짐을 이미 알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사례들을 SNS에 공유하며 함께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라도 이내 이 깨어짐을 오늘 저녁 9시 뉴스 끝자락에 잠깐 등장하는 에피소드 정도로 잊어 버린다.

혹 더 나아가 이러한 일이 있노라 길에서 목놓아 외치는 이들에게는 ’별나다‘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심한 이들은 주머니에서 몇 푼 꺼내고선 이것이 필요한 것이었냐며 비웃기도 한다. 그렇게 모두가 착각 속에 살아간다. 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나의 세상은 안전하다고.


4. 당신은 당신의 오늘이 평범하게 마무리 될 것이라 자신하고 있는가? 그 삶은 정의롭고, 평탄하며, 안전할 것이라고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가? 세상에 존재하는 불합리와 부정의, 사건과 사고, 멀리는 전쟁과 기근, 자연재해의 소식이 나를 비켜갈 것이라고 그렇게 당신은 말할 수 있는가. 오늘 대한민국에는 말도 안 되는 추위가 들이 닥쳤다. 당신은 이 추위를 피할 수 있는가.


5. 나는 두렵다. 물론 대부분의 삶을 따뜻하게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삶이 부지불식간에 사라질까 두렵다. 그래서 나와 같은 이들을 찾고 그들과 손 잡는다. 맞잡은 손의 온기가 전해질 때, 마주 잡은 이 손을 놓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맞닿을 때, 나의 모자람과 부족함을 누군가 채워줄거라는 신뢰 그리고 연대. 이 가치는 이제 내게 아주 중요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문득 내가 딛고 선 자리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나 살자고 나와 손잡고 있던 이들을 내가 버려둔 것은 아닐까. 꽤 깊이 있게, 꼼꼼히 돌아보았다.


6. 이 책은 나와 함께 국제구호 NGO에서 일하는 후배님이 썼다. 잘 쓰는 줄은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깊다는 것에 새삼 그가 자랑스러워졌다. 앞으로 나는 ’왜 이런 일을 하세요?‘라는 물음에 이 책을 내어줄 생각이다. 지구 반대쪽의 누군가의 삶도 당신의 오늘과 같았다. 다시 말한다. 당신의 세상도 불안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함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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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전트의 세계 - 그라운드 뒤편 협상 테이블에서 벌어지는 은밀하고 짜릿한 이야기
장기영 지음 / 시월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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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 3대 악마의 게임으로 불리는 FM(Football manager)이라는 축구게임이 있다. 보통의 축구게임은 플레이어가 되어 진행하지만 이 게임은 말 그대로 축구 감독(축구는 감독을 manager라 부른다.)이 되어 게임을 진행한다. 유저의 역할은 골을 넣는 게 아니라 골을 넣을 수 있는 좋은 팀과 전술을 만드는 것이다. 상대를 이길 수 있는 전략을 짜고 그에 맞는 플레이어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한다. 만약 우리 팀에 적합한 플레이어가 없으면 전 세계를 뒤져서 꼭 맞는 플레이어를 찾아낸다. 그 플레이어를 얻기 위해 돈을 지불하기도 하고 때론 우리 팀의 잉여 선수와 트레이드 하기도 한다. 운이 좋을 땐 좋은 선수를 별다른 조건 없이 영입하기도 하고, 어릴 적부터 소질이 보이는 선수를 유스팀에 데려와 육성하기도 한다. 말만 들어도 웅장해지는 게임.(고백컨대 10년 전 나는 걸어 다니면서도 노트북을 안고 이 게임을 했었다;;)


2. 모든 스포츠의 리그와 컵 대회도 흥미롭지만 사실 그것보다 재밌는 건 모든 리그가 끝나고 열리는 스토브리그다. 어느 선수가 FA 자격을 얻었고, 어떤 선수들이 트레이드 되며 또 어떤 선수가 은퇴를 선택하는지. 서로 유니폼을 바꾸어 입거나 평생을 몸담았던 구장을 떠나게 되는 선수의 이야기는 때론 감동적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분노를 자아내기도 한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인사이동은 모든 곳에서 여러모로 흥미롭다.


3. 신문기사 혹은 커뮤에서 이렇게 된다더라 저렇게 된다더라만 접하다 문득 저 세계에서 뛰는 사람들은 어떨까? 궁금해 했던 적이 있다. 스토브리그의 플레이어지만 언제나 막후에서 역사는 일어나기에 프로선수보다 더 만나기는 어려운 직업. 에이전트. 책은 손흥민과 황희찬의 에이전트, 한국인으로 해외리그에서 뛰는 국내 최고의 축구 에이전트인 장기영의 이야기다.

물론 언론을 통해 손흥민과 황희찬의 이적 이야기를 들었으나, 그 모든 일을 직접 겪은 이가 들려주는 손흥민이 어떻게 함부르크에서 레버쿠젠을 거쳐 지금의 토트넘에 이르게 되었는지. 황희찬이 잘츠부르크에서 라이프치히를 거쳐 지금의 울버햄튼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그 뒷이야기는 사실 이슈만으로도 꽤 흥미진진하다.


4. 이런 썰을 넘어 저자는 아직은 생소한 에이전트라는 직업을 우리게 소개한다. 아마도 에이전트라는 직업의 A부터 Z까지 일러주는 책은 처음이 아닐까 싶은데, 행여 에이전트를 꿈꾸는 이들이라면 우리나라에 이런 직업이 존재하지 않을 때부터 시작한 대선배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우리가 겉으로만 보는 화려한 삶 뒤에 한 선수를 만들기 위해 이들이 어떤 역할을 하며 어떻게 노력하고 있는지, 하루에도 몇 개 도시를 넘나들며 협상을 이어나가는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세세한 부분들까지 현직 에이전트는 꼼꼼히 일러준다. 당초 영업에는 젬뱅이라 책을 읽으며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구나 싶으면서도 이런 친구 하나 있으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싶었다.


5. 우리나라의 경우 축구선수가 되기 위해 어릴 적부터 노력한 1% 정도만 프로선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국가대표가 되고 해외로 나갈 확률은 더 떨어진다. 문제는 엘리트 체육으로 성장하는 우리나라의 체육 구조상 어릴 적부터 평생을 운동만 해 온 이들은 원하는 프로가 되지 못할 때 다른 진로를 찾기 굉장히 어렵다는 점이다.

물론 무리뉴 감독처럼 선수 시설은 별 볼일 없었으나 오히려 은퇴 후 코치로 대성하는 인물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프로야구 감독이 10명이고, 프로 축구 감독이 12명인 것처럼 이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이들에게도 에이전트는 꽤 매력적인 직업군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6. <제리 맥과이어> <머니볼> <스토브리그> 등 돌이켜보면 에이전트의 이야기는 늘 흥미로웠다. 그리고 진짜가 이제 그 세계를 들려준다. 행여 축구와 그 뒷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은 즐겁게 읽어볼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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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은 총을 부르고 꽃은 꽃을 부르고 - 열 편의 인권영화로 만나는 우리 안의 얼굴들
이다혜.이주현 지음,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 한겨레출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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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도 대통령은 "강한 군대만이 진정한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손에 총 대신 꽃을》에 실린 임재성 변호사의 말처럼 "모든 전쟁의 순간마다 전쟁을 거부했던 이들이 있었고 더 많아져야 하는 것은 전쟁 이 아니라 그 전쟁을 거부했던 실천"이다. 그 어느 때보다 전쟁을 거부하는 목소리와 실천이 필요한 때다.(p.177)


진보와 보수를 보는 시각은 비단 정치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투자를 할 때도, 친구를 사귈 때도 보수적으로 접근하는 이가 있는 반면, 모든 것에 전향적인 자세로 타인을 대하는 이도 있다. 사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의 문제이다. 대통령의 말과 행동도 나는 이제 그저 이렇게 접근하려 한다. 후보 시절에도 아마 그는 강한 군대의 필요성을 역설했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많은 국민들이 그를 선택했다. 그의 말마따나 강한 총과 칼이 평화를 지켜줄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환경은 그때그때 다르고 사회에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전히 찜찜함은 남는다.


역사에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강함이 짓눌러 지켜지는 것 같아 보이는 평화는 결국 오래가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은 (그들의 말이 의하면) 평화로웠고, 엄석대가 통치하는 5학년 2반은 겉으로 보기에 아무 문제가 없는 반이었다. 하지만 무력에 짓눌릴 대로 눌려버린 이들이 하나둘 일어서기 시작하자 허울뿐인 평화는 금세 소용돌이가 되었다. 이는 419 혁명이라든지 민주화 항쟁에도 그랬다. 총이 꽃을 부를 수 있는가? 글쎄다.


잿빛 책을 펼쳐들면 이 외에도 데이트 폭력, 청년실업, 청소년 인권, 노인과 아동 차별, 존엄사, 무연고 고독사, 양심적 병역거부, 가난과 장애(장애인 흉내를 내는 것), 감시사회 등 우리 사회의 감춰진 부분들을 영화의 입을 빌려 들춰낸다. 경제가 좀 나아졌다고 우리는 예전보다 살기 좋은 세상이라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곁에는 소수자의 자리에서 고통받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다수는 눈에 거슬리는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예전과 다름없이 지우고 잘라내려 한다. 


하지만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지우려는 자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어서는 안된다. 맞서야 하고 싸워야 한다. 연대해야 하고 사랑해야 한다. 책은 그렇게 온몸으로 존재하려는 자들의 기록이다. ‘별나게 살지 말라고’, ‘대충 좀 맞춰 살라고’ 말하는 세간의 이야기에 맞서 나와 우리를 지켜내려는 이들의 울부짖음이다. 사회복지를 전공한 사람으로 사실 이런 이들을 꽤 많이 만난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영화에서 그려지는 것보다, 책에서 희망하는 것보다 훨씬 무겁고 막막하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잿빛 표지 위 꽃으로 쓰인 글씨를 본다. 언제쯤 우리는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낼 수 있을까? 꽃을 꽃이라 말하고 총을 총이라 말하는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그리고 우리는 그만큼 더 손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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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 일기 쓰는 세 여자의 오늘을 자세히 사랑하는 법
천선란.윤혜은.윤소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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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일기를 읽어버린 뒤에 그 사람을 친밀하게 느끼지 않는 법”을 우리는 모른다. 

“남의 고유한 분투를 지켜보는 게 어째서 지금의 내 삶에 대한 응원이 되는” 건지도.

때론 고되고 서글퍼도 결국에는 유쾌하고 상큼하게 마감되는 그들의 이야기를 보면 무심했던 나 자신에게 한 걸음 다가가고 싶어진다. 

이 시간을 오롯하게 담아 뜻밖에 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_김신지 작가의 추천사


중고 시절 때 교환일기라는 게 유행했다. 손글씨를 잃어버린 아이들에게는 조금 어려운 일일지 모르나 한 권의 노트만 있다면 우리는 충분했다. 친구들끼리 돌려쓰는 일기를 통해서는 매일 만나지만 도통 드러나지 않는 아이의 속마음을 볼 수 있었다. 가끔 반끼리 돌려쓰는 교환일기장에는 모르는 아이와 짝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이름이 아니라 아이디로 적혀오는 일기를 통해 모르는 사이에서나 털어놓을 수 있는 고민을 들을 때도 있었고, 그런 소소한 고민에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마음을 적어 답을 하고 또 그 일기는 돌아오고 뭐 그랬었다. 그 일기장 중 몇 권은 흑역사가 되어 지금도 내 서랍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 그리고 그때 우리가 나누었던 일기장들은 또 누군가의 집에 고이 잠들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사 때마다 가끔 꺼내보곤 하는데 일기장을 펼 때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경험과 동시에 나를 30년 전 그때로 데려가 준다. 그저 풋풋했던 시절. 마음 담에 꾹꾹 눌러 쓴 그 글들이 그래 우린 그때 참 좋았다.


지나고 와서 보니 그때 우리는 함께 글을 썼었다. 누군가 잠들기 전 종이에 꾹꾹 눌러쓴 마음을 다음날 설레하며 받아 읽고는 하루 종일 어떻게 답장을 쓸지 생각한다. 그리고 책상 머리에 앉아 상대의 이야기에 이어 내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일기의 당사자가 아닌 이들도 가끔 일기에 등장하기도 했다. 노래 가사를 쓰기도 했고, 좋은 구절은 밑줄을 긋고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어떤 고민에 자기는 이렇게 생각하노라며 꽤 진심 어린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의 일기를 나누고는 괜히 더 돈독해져 운동장 한편에 앉아, 또 소소한 이야기를 한참을 나누기도 했다.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이든 좋다는 소설가,

음악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에세이스트,

무언가를 좋아하고 시작하기에 망설임 없는 편집자.


책은 이 소개만으로도 귀를 열게 하는 이력의 세 여자의 교환일기다. 그들은 일기장에 모든 것에 대한 수다를 시작한다. 그들의 공통의 직업인 글은 물론이고 결혼, 연애, 모녀 등 30대 여성의 모든 것에 대해 그들은 툭 터놓고 이야기한다. 책의 제목처럼 엉망으로 살고 있지만 열심히는 사노라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꽤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게 된다. 가끔은 끼어들어서 '아니 근데 그건 말이야'라고 나의 이야기를 막 하고 싶어지기도 하고 :) 

무엇보다 아직도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글로 나눌 친구가 있다는 게. 뭔가 부럽기도 했다.


누군가의 일기를 읽어버린 뒤에 그 사람을 친밀하게 느끼지 않는 법을 우리는 모른다는 추천사는 매우 적확하다. 어우 이렇게 사랑스러운 책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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