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전트의 세계 - 그라운드 뒤편 협상 테이블에서 벌어지는 은밀하고 짜릿한 이야기
장기영 지음 / 시월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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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 3대 악마의 게임으로 불리는 FM(Football manager)이라는 축구게임이 있다. 보통의 축구게임은 플레이어가 되어 진행하지만 이 게임은 말 그대로 축구 감독(축구는 감독을 manager라 부른다.)이 되어 게임을 진행한다. 유저의 역할은 골을 넣는 게 아니라 골을 넣을 수 있는 좋은 팀과 전술을 만드는 것이다. 상대를 이길 수 있는 전략을 짜고 그에 맞는 플레이어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한다. 만약 우리 팀에 적합한 플레이어가 없으면 전 세계를 뒤져서 꼭 맞는 플레이어를 찾아낸다. 그 플레이어를 얻기 위해 돈을 지불하기도 하고 때론 우리 팀의 잉여 선수와 트레이드 하기도 한다. 운이 좋을 땐 좋은 선수를 별다른 조건 없이 영입하기도 하고, 어릴 적부터 소질이 보이는 선수를 유스팀에 데려와 육성하기도 한다. 말만 들어도 웅장해지는 게임.(고백컨대 10년 전 나는 걸어 다니면서도 노트북을 안고 이 게임을 했었다;;)


2. 모든 스포츠의 리그와 컵 대회도 흥미롭지만 사실 그것보다 재밌는 건 모든 리그가 끝나고 열리는 스토브리그다. 어느 선수가 FA 자격을 얻었고, 어떤 선수들이 트레이드 되며 또 어떤 선수가 은퇴를 선택하는지. 서로 유니폼을 바꾸어 입거나 평생을 몸담았던 구장을 떠나게 되는 선수의 이야기는 때론 감동적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분노를 자아내기도 한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인사이동은 모든 곳에서 여러모로 흥미롭다.


3. 신문기사 혹은 커뮤에서 이렇게 된다더라 저렇게 된다더라만 접하다 문득 저 세계에서 뛰는 사람들은 어떨까? 궁금해 했던 적이 있다. 스토브리그의 플레이어지만 언제나 막후에서 역사는 일어나기에 프로선수보다 더 만나기는 어려운 직업. 에이전트. 책은 손흥민과 황희찬의 에이전트, 한국인으로 해외리그에서 뛰는 국내 최고의 축구 에이전트인 장기영의 이야기다.

물론 언론을 통해 손흥민과 황희찬의 이적 이야기를 들었으나, 그 모든 일을 직접 겪은 이가 들려주는 손흥민이 어떻게 함부르크에서 레버쿠젠을 거쳐 지금의 토트넘에 이르게 되었는지. 황희찬이 잘츠부르크에서 라이프치히를 거쳐 지금의 울버햄튼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그 뒷이야기는 사실 이슈만으로도 꽤 흥미진진하다.


4. 이런 썰을 넘어 저자는 아직은 생소한 에이전트라는 직업을 우리게 소개한다. 아마도 에이전트라는 직업의 A부터 Z까지 일러주는 책은 처음이 아닐까 싶은데, 행여 에이전트를 꿈꾸는 이들이라면 우리나라에 이런 직업이 존재하지 않을 때부터 시작한 대선배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우리가 겉으로만 보는 화려한 삶 뒤에 한 선수를 만들기 위해 이들이 어떤 역할을 하며 어떻게 노력하고 있는지, 하루에도 몇 개 도시를 넘나들며 협상을 이어나가는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세세한 부분들까지 현직 에이전트는 꼼꼼히 일러준다. 당초 영업에는 젬뱅이라 책을 읽으며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구나 싶으면서도 이런 친구 하나 있으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싶었다.


5. 우리나라의 경우 축구선수가 되기 위해 어릴 적부터 노력한 1% 정도만 프로선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국가대표가 되고 해외로 나갈 확률은 더 떨어진다. 문제는 엘리트 체육으로 성장하는 우리나라의 체육 구조상 어릴 적부터 평생을 운동만 해 온 이들은 원하는 프로가 되지 못할 때 다른 진로를 찾기 굉장히 어렵다는 점이다.

물론 무리뉴 감독처럼 선수 시설은 별 볼일 없었으나 오히려 은퇴 후 코치로 대성하는 인물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프로야구 감독이 10명이고, 프로 축구 감독이 12명인 것처럼 이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이들에게도 에이전트는 꽤 매력적인 직업군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6. <제리 맥과이어> <머니볼> <스토브리그> 등 돌이켜보면 에이전트의 이야기는 늘 흥미로웠다. 그리고 진짜가 이제 그 세계를 들려준다. 행여 축구와 그 뒷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은 즐겁게 읽어볼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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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은 총을 부르고 꽃은 꽃을 부르고 - 열 편의 인권영화로 만나는 우리 안의 얼굴들
이다혜.이주현 지음,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 한겨레출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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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도 대통령은 "강한 군대만이 진정한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손에 총 대신 꽃을》에 실린 임재성 변호사의 말처럼 "모든 전쟁의 순간마다 전쟁을 거부했던 이들이 있었고 더 많아져야 하는 것은 전쟁 이 아니라 그 전쟁을 거부했던 실천"이다. 그 어느 때보다 전쟁을 거부하는 목소리와 실천이 필요한 때다.(p.177)


진보와 보수를 보는 시각은 비단 정치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투자를 할 때도, 친구를 사귈 때도 보수적으로 접근하는 이가 있는 반면, 모든 것에 전향적인 자세로 타인을 대하는 이도 있다. 사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의 문제이다. 대통령의 말과 행동도 나는 이제 그저 이렇게 접근하려 한다. 후보 시절에도 아마 그는 강한 군대의 필요성을 역설했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많은 국민들이 그를 선택했다. 그의 말마따나 강한 총과 칼이 평화를 지켜줄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환경은 그때그때 다르고 사회에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전히 찜찜함은 남는다.


역사에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강함이 짓눌러 지켜지는 것 같아 보이는 평화는 결국 오래가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은 (그들의 말이 의하면) 평화로웠고, 엄석대가 통치하는 5학년 2반은 겉으로 보기에 아무 문제가 없는 반이었다. 하지만 무력에 짓눌릴 대로 눌려버린 이들이 하나둘 일어서기 시작하자 허울뿐인 평화는 금세 소용돌이가 되었다. 이는 419 혁명이라든지 민주화 항쟁에도 그랬다. 총이 꽃을 부를 수 있는가? 글쎄다.


잿빛 책을 펼쳐들면 이 외에도 데이트 폭력, 청년실업, 청소년 인권, 노인과 아동 차별, 존엄사, 무연고 고독사, 양심적 병역거부, 가난과 장애(장애인 흉내를 내는 것), 감시사회 등 우리 사회의 감춰진 부분들을 영화의 입을 빌려 들춰낸다. 경제가 좀 나아졌다고 우리는 예전보다 살기 좋은 세상이라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곁에는 소수자의 자리에서 고통받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다수는 눈에 거슬리는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예전과 다름없이 지우고 잘라내려 한다. 


하지만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지우려는 자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어서는 안된다. 맞서야 하고 싸워야 한다. 연대해야 하고 사랑해야 한다. 책은 그렇게 온몸으로 존재하려는 자들의 기록이다. ‘별나게 살지 말라고’, ‘대충 좀 맞춰 살라고’ 말하는 세간의 이야기에 맞서 나와 우리를 지켜내려는 이들의 울부짖음이다. 사회복지를 전공한 사람으로 사실 이런 이들을 꽤 많이 만난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영화에서 그려지는 것보다, 책에서 희망하는 것보다 훨씬 무겁고 막막하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잿빛 표지 위 꽃으로 쓰인 글씨를 본다. 언제쯤 우리는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낼 수 있을까? 꽃을 꽃이라 말하고 총을 총이라 말하는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그리고 우리는 그만큼 더 손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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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 일기 쓰는 세 여자의 오늘을 자세히 사랑하는 법
천선란.윤혜은.윤소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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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일기를 읽어버린 뒤에 그 사람을 친밀하게 느끼지 않는 법”을 우리는 모른다. 

“남의 고유한 분투를 지켜보는 게 어째서 지금의 내 삶에 대한 응원이 되는” 건지도.

때론 고되고 서글퍼도 결국에는 유쾌하고 상큼하게 마감되는 그들의 이야기를 보면 무심했던 나 자신에게 한 걸음 다가가고 싶어진다. 

이 시간을 오롯하게 담아 뜻밖에 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_김신지 작가의 추천사


중고 시절 때 교환일기라는 게 유행했다. 손글씨를 잃어버린 아이들에게는 조금 어려운 일일지 모르나 한 권의 노트만 있다면 우리는 충분했다. 친구들끼리 돌려쓰는 일기를 통해서는 매일 만나지만 도통 드러나지 않는 아이의 속마음을 볼 수 있었다. 가끔 반끼리 돌려쓰는 교환일기장에는 모르는 아이와 짝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이름이 아니라 아이디로 적혀오는 일기를 통해 모르는 사이에서나 털어놓을 수 있는 고민을 들을 때도 있었고, 그런 소소한 고민에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마음을 적어 답을 하고 또 그 일기는 돌아오고 뭐 그랬었다. 그 일기장 중 몇 권은 흑역사가 되어 지금도 내 서랍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 그리고 그때 우리가 나누었던 일기장들은 또 누군가의 집에 고이 잠들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사 때마다 가끔 꺼내보곤 하는데 일기장을 펼 때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경험과 동시에 나를 30년 전 그때로 데려가 준다. 그저 풋풋했던 시절. 마음 담에 꾹꾹 눌러 쓴 그 글들이 그래 우린 그때 참 좋았다.


지나고 와서 보니 그때 우리는 함께 글을 썼었다. 누군가 잠들기 전 종이에 꾹꾹 눌러쓴 마음을 다음날 설레하며 받아 읽고는 하루 종일 어떻게 답장을 쓸지 생각한다. 그리고 책상 머리에 앉아 상대의 이야기에 이어 내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일기의 당사자가 아닌 이들도 가끔 일기에 등장하기도 했다. 노래 가사를 쓰기도 했고, 좋은 구절은 밑줄을 긋고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어떤 고민에 자기는 이렇게 생각하노라며 꽤 진심 어린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의 일기를 나누고는 괜히 더 돈독해져 운동장 한편에 앉아, 또 소소한 이야기를 한참을 나누기도 했다.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이든 좋다는 소설가,

음악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에세이스트,

무언가를 좋아하고 시작하기에 망설임 없는 편집자.


책은 이 소개만으로도 귀를 열게 하는 이력의 세 여자의 교환일기다. 그들은 일기장에 모든 것에 대한 수다를 시작한다. 그들의 공통의 직업인 글은 물론이고 결혼, 연애, 모녀 등 30대 여성의 모든 것에 대해 그들은 툭 터놓고 이야기한다. 책의 제목처럼 엉망으로 살고 있지만 열심히는 사노라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꽤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게 된다. 가끔은 끼어들어서 '아니 근데 그건 말이야'라고 나의 이야기를 막 하고 싶어지기도 하고 :) 

무엇보다 아직도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글로 나눌 친구가 있다는 게. 뭔가 부럽기도 했다.


누군가의 일기를 읽어버린 뒤에 그 사람을 친밀하게 느끼지 않는 법을 우리는 모른다는 추천사는 매우 적확하다. 어우 이렇게 사랑스러운 책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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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동 헤리티지 - 공단과 구디 사이에서 발견한 한국 사회의 내일
박진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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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 내가 기억이 있는 순간부터 나의 고등학교 시절까지 18년을 살아온 내 고향이다. 

대구광역시. 대학에 들어와 취업과 결혼을 하고 지금도 20년째 살고 있는 내 집이다.


지금은 서울에 있는 사무실을 매주 들락거리는 처지지만, 내겐 아직도 지역에 대한 마음이 있다. 대학을 서울로 가지 않은 것도, 취업을 서울로 하지 않은 것도 이 개똥같은 철학에서부터 출발했다.(지금은 좀 후회하지만 어쨌든) 취업할 즈음 누군가 너의 비전이 뭐냐 물었을 때도 '서울의 대안이 되는 지역공동체'라 했고, 아직까지 지역 은행과 지역 백화점이 서울 자본에 편입되지 않고 살아있는 도시. '우리가 남이가'가 부정적 뉘앙스로 쓰이긴 하지만 아직까지 역으로 아직까지 우리가 남이 아닌 도시. 그 도시에서 이곳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싶은 소망이 내겐 있다.


가끔 약속이 있어 한번 가본 구디 역과 라이온즈의 원정 경기가 열릴 때마다 찾는 고척돔. 사실 내가 구로라는 지역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의 전부다. 공단, 디지털 단지, 중국인으로 통칭된다며 저자는 구로를 소개하는데 미안하지만 사실 나는 구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아마 이렇듯 구로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 같기도 하다. 책을 읽으며 비로소 구로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구로에서 자랐고, 구로를 좋아하고 계속해서 함께 살고 싶은 이의 마음과 그가 담아둔 구로에 대한 애정에 대해 알게 되었다.


구로동 토박이인 저자는 구로의 구석구석을 소개하며 구로의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상처들, 그리고 그 역사의 순간에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함께 꺼내 놓는다. 미싱과 함께 성장한 구로공단과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함께 써온 수많은 사람들, 이제는 소위 3D로 분류된 산업도시에 유입될 수 밖에 없던 외국인들. 그리고 끊이지 않는 이들을 향한 차별과 혐오의 시선에 대해 그는 이야기한다. 이는 노동자에서 외국인으로 대상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이 시선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해 함께 고민하자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이런 차별의 시선을 덮어버리기 위해 '디지털'이라는 허울 좋은 단어로 진짜 구로를 숨기려 하기도 한다. 온갖 정치적 수사로 얼룩져 버린, 그렇게 구로가 아닌 곳에서 구로를 찾는 이들의 이야기도 그는 그 안에서 살아온 토박이의 눈으로 우리게 들려준다. '우리도 강남 못지않다' 말하는, 그들이 부끄러워하는 구로를 우리는 왜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이제는 지역 소멸을 걱정해야 하고, 우리가 부끄러워 내 고향을 등지거나 혹은 이곳을 강남처럼 만들겠다고 소리 높이는 이들에게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꽤 울림이 크다.

그렇게 모두가 강남 바라기가 되어버린, 우리를 부끄러워하며 특색을 잃어버린 건 사실 구로의 문제는 아니다. 전국의 모든 동네는 공히 똑같은 마트에서 장을 보며 똑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똑같은 스타벅스를 공유하고 있다.

* 물론 양양의 서피비치처럼 리퀴드폴리탄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들도 있다.


저자의 시선을 따라 구로동 구석구석을 훑으며 구로동의 과거와 지금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대구가 떠올랐다. 보수의 성지, 대프리카, 김광석 거리, 막창, 치맥의 도시 등 대구를 둘러싸고 있는 이미지는 모두 다르지만 20년을 쌓아온 나의 대구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누군가는 또 자신의 동네를 떠올릴 것이다. 구로동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그렇게 조금씩 확장되다 보면 우리는 어느 교차로에서 만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짜 지역이 나아갈 방향, 한국 사회가 나아갈 길이 생겨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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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 일기
권남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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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꽤 오래전부터 카공족이었으며, 취업을 하고 나서는 주말에 카일족으로 변했다. 어느 날 스벅에서 유현준 교수의 책을 보다 무릎을 쳤다. 집이란 건 방과 거실로 이루어진 공간이라고. 현관을 열면 침대가 보이는 원룸을 전전하는 청춘들은 집보다 오히려 카페가 편하고 숨 쉴 공간이라고. 딱 내가 그랬다. 몇 평 원룸에 있느니 커피값을 들이더라도 노트북 들고 카페에 있는 게 나았다.

카페에 오래 앉아있다 보니 눈치라는 게 생겼다. 카공족 논란도 그때쯤 시작되었다. 이후 내 선택은 무조건 스벅이었다. 개인 카페나 점주님이 사장인 체인의 경우는 몇 시간 이후에 한 잔을 더 시키는 것도 민폐 같았다. 그랬다. 스벅은 가난한 내게 오래도록 앉아서 일하거나 공부하는 것이 허락된 유일한 공간이었다.


2. 스타벅스 재즈라는 장르가 있다. 스벅 회장 하워드 슐츠의 책 <온에어>라는 책에 스벅은 BGM도 수많은 공을 들인다고 한다. 생각해 보라. 오늘 들어갔던 스벅의 BGM을 기억하는지. 신기하게도 스벅의 BGM은 처음에는 들리다가 일이나 책, 대화에 집중하면 이내 사라진다. 새삼 스벅이 대단하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3. 개인 카페 사장님들(특히 목사님)을 만나다 보면 그렇게 스벅과 커피 맛 비교를 많이 한다. 하나같이 스벅보다 좋은 원두를 쓰고, 특히 에스프레소를 어떻게 먹으면 기가 막힌다고. 그런데 미안하지만 알바가 바뀔 때마다(아침저녁으로) 바뀌는 커피 맛을 경험하는 건 커피 좋아하는 사람에게 꽤나 곤혹스러운 일이다. 또한 스벅에만 있는 초록과 나뭇빛 느낌이 어지간한 개인 카페에는 나지 않는다. 아마 보통의 사람은 평타를 치는 일정한 맛의 커피, 언제 가도 편안하고 예측 가능한 공간을 좋아한다. 아무래도 스벅이다.


4. 여의도에는 스벅이 꽤 많고 이름도 비슷비슷하다. 퇴근 후 늘 가던 스벅에 사이렌 오더로 주문하고 노트북을 폈다. 곧 이어 음료가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왔는데 카운터는 비어있었다. "혹시 여기가 여의도OO점이 아닌가요?" "아 고객님 여의도OO점은 길 건너 OO건물에 있는 지점입니다" 황급히 노트북을 접고 건너난 길 건너 스벅에는 빈자리가 없었고 내 커피도 한쪽 구석에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5. 스벅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엄마와 딸로 보이는 모녀가 있었고 뒤이어 엄마와 아들로 보이는 이들이 맞은 편에 앉았다. 네 사람은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자기소개를 했다. 곧 이어 목사님이라 불리는 남자가 등장했다. 목사님은 네 사람의 가운데 앉아 기도와 함께 설교 비슷한 걸 시작했다. 20분 정도 되었는데 하나님이 얼마나 가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뭐 그런 얘기였다. 그 중간에 젊은 남녀도 각각 소개해 주었는데 아마도 목사와 남녀도 처음 만나는 사이 같았다. 어느 대학을 나왔고 지금 어느 회사에서 일하느냐는 게 소개의 전부다. 그렇게 목사의 시간이 지난 뒤, 어른 셋은 빠져나갔고, 남은 두 남녀는 그들의 길을 어색하게 배웅했다. 잠깐의 멀뚱한 시간이 지난 뒤 둘은 서로에게 '수고하셨다'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는 일어나면서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 눈이 꽤 슬퍼 보였다. 텅 비어 보였다고 해야 하나. 그러고 보니 시켜놓은 아메리카노도 거의 마시지 않았다.


6. 책은 이런 스벅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친구들끼리, 연인들끼리, 가족들끼리, 혹은 혼자 또 여러 관계의 사람들이 그곳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스타벅스 일기. 이렇게 스벅에서 일하는(아 스텝이 아니라 카일족) 저자가 스벅 테이블 건너에서 만나게 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읽다 보면 빙그레 웃음이 나기도 하고, 마음 한편이 따땃해지기도 한다. 가끔은 생각이 많아 질 때도 있다. 스타벅스가 처음 한국에 나타났을 때 귀족 음료였던 그 스벅이 우리 생활에 이렇게까지 깊숙이 들어왔구나 싶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스타벅스는 그냥 카페의 하나로 불리기는 우리 삶에 너무 깊이 들어왔다.


7. 스벅을 이렇게 발견할 수도 있구나. 사실 읽으면서 괜스레 좋았다. 캐롤이 빵빵 나올 스벅에 옷을 좀 챙겨 입고 커피 한 잔 하러 가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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