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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가 된 남자들 - 페미니즘이 상식이라고 말하는 7명의 남자들
전인수 지음 / 멜랑콜리아 / 2021년 12월
평점 :
<페미니즘>을 처음 접한 건 20년 전 학부 때였다. 그때만 해도 페미니즘은 여성학이라는 이름으로, 진보의 영역에 속한 많은 이슈 중 양성평등의 문제를 노동이나 환경보다 우선시하는 이들의 분파 정도로 인식되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정도로 인식되던 학문의 갈래는 언젠가부터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시대를 양분하는 이슈가 되었고, 누군가에겐 생의 가치가 되고 또 누군가에겐 악마화되었다. 그리고 나같이 어중간한 이들에게는 함부로 이름을 불러선 안되는 이름이 되어 아예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좋은 어떤 것이 되었다.
비겁해도 할 수 없다. 페미니즘에 대해 꽤 많은 책을 읽었고 동의한다. 하지만 페미니즘에 대해 내가 내 입으로 내뱉을 수 있는 이야기는 '남자 새끼들은 모르면 그냥 닥치고 있자'가 전부였다.
조금 더 비겁해지자면 남자들의 경우 대부분 비슷한 경험이 있을진데, 남자인 내가 감히 페미니스트라 자칭하는 이들과 이야기할 때 돌아온 건 대부분의 경우 농도 깊은 비웃음이었다. '니가 뭘 알아'부터 시작해서 소환되는 나의 과거 즉 '한남으로의 역사'는 아무리 '그땐 몰랐다'라 말하고 사과해도 회복될 수 없는 낙인이 되었다. '역시 너도 한남'이라는 조롱은 꽤 참기 힘들었고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이들을 조용히 멀리하기 시작한 게.
그래서 페미니즘에 관련된 책의 리뷰를 의뢰받을 때 늘 생각이 좀 많아진다. 결국 책을 읽고 그냥 해버리기는 하지만 다른 글과 비교해 꽤 많은 자기 검열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언제나 뭉툭한 글을 튀어나왔다. 그런데 7명의 페미니스트 남성들이 차례로 들려주는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사실 좀 생각이 바뀌었다. 서론의 조금 긴 내 이야기는 거기에서 나왔다.
"그 사람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정체성 중에 나머지를 지우고 여성으로만 바라보는 건 일방적인 대상화예요. 동료 시민으로 바라보지 않는 거죠" p.37 곽승훈 님
"덕분에 삶이 다채롭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전까지는 대충 지냈거든요.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는. 그런 게 보통 남자 같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세상에는 맛있는 음식이 굉장히 다양하게 있고, 아름다운 것들이 여럿이 있더라고요" p.85 이한 님
"결국 정체성은 개인의 작업이기도 하고 집단의 작업이기도 해요. 개인 혼자서 땅을 뚫고 나와서 주위를 줄러봤을 때 혼자라면 아무 소용이 없겠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한 사람 한 사람의 합의에 의해 공존하는 세계가 정체성인 거예요." p.329 신필식 님
책에서 나온 7명의 인터뷰이들은 한목소리로 단지 '함께 사는 삶'을 말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지만 이 땅에 존재하는 권력이나 위계를 인정하고 그것들을 없애자고 말하고 있었다. 어떠한 기준으로 등위를 정하지 말고, 그가 가진 특징 하나로 대상화하지 말고, 다채로운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인정하자고 말하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존재 그 자체로 빛나는 삶, 그렇게 내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삶. 그것을 이들은 페미니즘이라고 말한다. 남자들의 입에서 나온 페미니즘, 그리고 함께 사는 삶.
혹 나와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거나, 페미니즘을 메갈리아가 주창한 어떤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읽고 같이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