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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1 - 개정판 ㅣ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7월
평점 :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야기는 짧지만 강렬한 선언으로부터 시작한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라. 보통 일제강점기의 이야기는 우리의 아픈 역사로부터 출발한다. 나라를 잃었고 그 애증 가득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일제에 맞서 싸운다는 뭐 그런 이야기.
그런데 파친코의 선자는 그럴 마음은 없어 보인다. 양반의 나라는 이미 백성을 저버린지 오래였다. 나의 조국이 조선이든 일본이든 중국이든 상관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 굶지 않으려 악을 쓰며 씨를 뿌리고, 짐승을 잡고 그것들을 시장에 팔아 오늘 먹을거리를 구해야만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허울뿐인 국가나 대의가 아니라 삶이다. 오늘 먹을 양식이고 내 새끼의 배를 채워줄 한 끼 밥이다. 구한말부터 일제 시대를 건너 독립 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관통하는 여인 아니 그의 가족의 이야기는 그래서 아프다.
선자는 일제강점기 부산 영도에서 태어난 조선 빈민 중 하나였다. 장애가 있는 아버지와 하숙을 치는 어머니 사이에서 기적처럼 태어난 아이였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세는 급격히 기울고 선자는 그렇게 하숙집 손님들 사이에서 자란다. 그 와중에 시장통에서 오사카에서 건너온 한수를 만나게 되고 선자가 한수의 아이를 가지게 되며 그렇게 사랑이 결혼으로 어이질 줄 알았지만 이미 한수는 오사카에 처자식이 있는 처지. 이 황망한 사연 앞에 그녀와 결혼하자는 이삭이 나타나게 되고 선자는 이삭을 따라 오사카로 향한다. 일제강점기, 오사카에서의 한인은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자이니치'라 불리는 한수의 말처럼 인간 이하의 삶이었다. 그곳에서 선자는 이삭의 형 요셉과 경희와 살아가는데 차마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만리타향의 삶은 생각한 것보다 더 만만치 않았다. 설상가상 두 아들을 두고 남편 이삭도 죽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삶의 끈을 놓지 않는다. 산다. 살아남는다.
삶은 모두에게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책을 읽으며 마음이 닿았던 것은 이 극한의 삶을 이겨낸 선자의 삶에 대한 의지였다. 한수의 아이를 가지고 그에게 버림받았고, 처음 보는 남자를 따라 오사카로 향해야 했으며, 오사카에서는 가족이라 불리는 이들에게조차 손가락 질 당했고, 남편은 비명횡사하고 두 아들과 오사카에 던져졌다. 그럼에도 선자를 살게 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악착같이 자신의 삶을 살았던 것일까.
<파친코>는 일본의 게임 기계이다. 자신의 능력이나 기술과 상관없이 오직 운에 맡겨야 하는 게임 기계. 합법적인 도박이라 재일교포들이 이 사업에 많이 뛰어들었다고 한다. 아마 삶에 치여 일본으로 건너왔던 조선인들의 모습이 파친코 기계 안에 그 공과 같지 않았을까. 어디로 어떻게 향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았고, 그 결과는 운명에 맡겨야 했던 이들. 다만 자신의 최선이 삶의 성공 같은 것과 이어질 수 없었던 세상에 살았던 우리의 어미, 아비들.
<파친코>는 소설로 먼저 발간되었으며 절판되었다. 이후 애플TV의 드라마를 거쳐 다시 개정판으로 재발간 되었다. 현재 재발간 된 <파친코> 1권이며 여기는 선자의 어릴 시절부터 선자가 오사카로 건너가 노아와 모자수를 키우며 살아가는 이야기까지를 담고 있다. 이후의 이야기가 읽고 싶어 괜히 2권이 나오기 전에 먼저 1권을 읽었나 후회 중이기도 하다 ㅠ_ㅠ
드라마로 먼저 접했었는데 길지 않은 드라마에 뿜어 나오는 이야기의 힘이 엄청나다고 생각했는데 원작 소설은 드라마를 훨씬 뛰어넘는다. 400여 페이지. 만만치 않은 양이었는데 읽는 데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몰입감이 어마 무시하다. 드라마로만 접하셨다면 꼭 원작 소설 1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