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에 갇힌 소년 에프 영 어덜트 컬렉션
로이스 로리 지음, 최지현 옮김 / F(에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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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변덕이랄까, 까다롭달까, 기준이 높달까? 무엇에든 절대적인 충성이 없는 편인 나에게 인생 작가가 있다. 원어의 느낌대로 책을 읽고 싶다는 욕심이 외국어 공부의 원동력이 되었고 모국어만큼의 완벽한 이해는 아닐지라도 영어와 일어 원서를 읽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작품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내 인생의 기쁨이고 보람인 것 같다. 그 와중에 현재로서는 딱 한 분 인생 작가는 바로 로이스 로리 작가님이시다. 하와이 출신의 아동/청소년 문학가인 그녀는 영미권 아동문학의 최고의 명예인 뉴베리상을 두 번 수상한 작가이다.



모든 책을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이번에 읽은 책 《침묵에 갇힌 소년》은 타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번에 새로 단장하고 개정판이 나온 것 같다. 원서는 《The Silent Boy》로 2003년에 출간되었다.



이야기는 1987년 이제 노년의 은퇴한 의사인 캐이티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191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할머니가 어린 소녀 캐이티였을 때의 가족과 이웃들의 이야기, 말을 하지 않는 소년 제이콥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이어진다. 캐이티는 사랑이 많은 부모님과 유복하고 안온한 가정 환경 속에서 건전하고 영특하고 따뜻한 시선을 가진 소녀이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그랬듯이, 캐이티의 아버지는 진료소에서도 환자를 돌보지만 24시간 환자가 필요로 할 때면 왕진도 하는 양식 있는 의사이다.



캐이티의 이웃들도 참 유별나지만 따뜻한 사람들이다. 새로운 신문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옆집 비숍 씨, 그런 남편을 못말린다고 생각하면서도 웃음으로 넘기는 비숍 씨 부인, 캐이티의 소꿉친구인 비숍 씨의 작은 아들... 캐이티의 엄마의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시골 농장에서 페기라는 소녀가 가정을 돌봐주기 위해 '가정부'로 캐이티의 집으로 온다. 페기의 언니 넬은 옆집 비숍 씨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다. 이 둘은 자매이면서도 무척이나 성격이 다르다. 일은 야무지게 잘하지만 화려하고 허영심 가득하며 늘 뉴욕을 동경하는 넬과 달리, 페기는 수줍음 많으면서도 믿음직하고 충실하다. 캐이티와 친 자매처럼 지내고 캐이티의 부모님도 페기를 무척 아낀다. 페기의 집은 시골 농장인데 가난 때문에 넬과 페기가 집을 떠나 일을 한다. 페기에게는 자폐아(로 판단되는) 남동생 제이콥이 있다. 제이콥은 여러 가지 소리를 그대로 흉내를 잘 낸다. 캐이티는 아무 말이 없지만 제이콥이 좋다. 제이콥은 밤중에 캐이티네 집 마구간에 와서 말들을 어루만지다가 돌아가곤 한다. 6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걸어와서 말들을 어루만지다 돌아간다. 캐이티는 굳이 아빠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는 않는다.



여러 가지 그림 같이 평온한 일상의 풍경들이 그려지지만 실은 불온한 시대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세계는 불안한 정세 속에 흘러가고 있었고 경제 대공황 이 전의 불안한 사회 변화들, 그 가운데서 화려한 뉴욕의 무대를 동경하지만 가난한 식모에 불과한 넬의 동경과 허영... 그런 넬을 이용하기만 하는 비숍 씨의 장남 폴의 불장난...



작중에서 그려지는 여러 이야기들이 하나의 결론을 향해가는 복선이라는 것을 다 읽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다. 성미가 급한 독자인 나는 사건이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책을 선호하는 편이다 보니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인물들의 이야기가 느릿느릿 풍경처럼 그려지나 했다. 뭔가 불행한 사건이 그려질 듯한데, 그런 그림자가 계속 드리워지는데 폭풍 전야 같은 어두운 평온함이 계속되는 것일까 하며 읽어갔다. 아니다다를까, 마지막 부분에서 작가의 저력이 여실히 발휘된다. 갑자기 다가온 거대한 소용돌이, 마지막 몇 장 속에서 여태까지의 풍경들이 하나하나의 퍼즐조각으로 연결되며 온전한 그림으로 연결되었을 때, 난 통곡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무도 없는 곳이었다면 땅을 치며 울었을 것이다.



너무나 애절하고 잔혹하지만 아름다운 진실이었다. 사건의 끝은 비극이었지만 제이콥의 진심, 그것을 알아차린 유일한 사람 캐이티... 사건 이후의 제이콥의 행방은 아무도 모르지만 아마도 불행이었을 것이다. 말을 하는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침묵에 갇힌 소년의 비밀... 어찌할 힘도 없는 캐이티...



로이스 로리 작가는 급성 백혈병으로 언니를 잃은 경험이 있고 또 아들은 먼저 보낸 경험이 있다. 그 경험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녀의 작품에 충격적이면서도 중요한 진실을 말해주는 듯하다. 자전적 소설 《A summer to Die (그 여름의 끝)》에서는 출산을 앞둔 젊은 부부가 갓난아이가 만일 잘못되었을 때 무덤자리까지 예비해 두었던 부분에서 난 울었었다. 우리 큰아이가 태어날 때 그럴 수 있었기에 그 마음을 알기에 그 각오를 알기에 울었다. 또 《The Giver (기억 전달자)》 4부작 중 4번째 작품인 《Son (태양의 아들)》에서 그려진 히로인의 모성은 남다른 것이었다.



이 책에서도 제이콥이라는 14세 소년의 모습에 한없는 애정과 연민이 따뜻하고도 아프게 그려져 있다. 원서의 표지 그리고 역서의 마지막 장에 들어가 있는 사진은 책 속에서 그려진 제이콥 그 자체였다.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통곡을 부르는 책이지만 또 한 권의 소중한 로이스 로리 작가님의 작품으로 내 맘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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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가 돌아왔다
김범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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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보통이 아닌 책을 만났다. 띠지에 "10초마다 빵빵 터지는데 왜 자꾸 눈물이 나지?"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런 책일수록 실망이 클 수 있어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정말 대단했다. 초판 발행이 2012년 7쇄까지 발행되었으니 요즘같은 출판 시장에서 쾌거였다. 이번에 새로이 단장하고 개정판이 나왔다. 인디언 핑크의 센스 넘치는 할매 일러스트를 입은 표지는 그야말로 취향저격이었다.



여느 미스터리물 이상의 흥미진진한 흡인력이 있을 뿐더러 시대를 조금 앞서 태어난 페미니즘 소설로 손색이 없다. 2016년 10월에 출간된 <82년생 김지영>을 통해 그간 조금씩 불씨를 지피던 페미니즘 문학의 불길이 확 치솟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로부터 3년 정도 전에 출간되었으니 시대를 앞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문학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은 없지만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정말 잘 설계된 것 같다. 어느 누구 하나 낭비된 캐릭터 없이 독특하고 고유한 캐릭터대로 자기가 있을 곳에서 자기 몫을 톡톡히 해낸다. 처음부터 60억의 진위에 대한 호기심으로 쭉쭉 빨려들어갔다가 결국에는 그에 해당하는 답은 주지 않고 끝낸 불친절(?ㅋㅋ)은 있었지만 그게 오히려 매력이었고 모든 것이 아름답게 정리된 후련함까지 주었으니 아름답고 완벽한 완결인 것이다.



이 책은 '찌질이' 최동석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된다. 정말 찌질하고 찌질하다. 세상 이렇게 비호감 캐릭터가 있을까 싶어 책을 덮고 싶어졌다. 그러나 곧 충격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할머니. 그 할머니의 등장에 따라 데면데면했던 친척들의 구도가 엎치락뒤치락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가문의 수치, 민족의 배신자로 떠났던 할머니가 60억을 들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돈 앞에서 민낯을 드러내는 각 사람들... 600억처럼 터무니없지도 않고 6억처럼 어딘가 아쉬운 금액도 아닌, 중산층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딱 그만한 금액 60억 앞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팔랑팔랑한다. 각자 자기 몫의 유산으로 뭘 할까, 공상 혹은 망상의 나래를 맘껏 펼친다.



장손이라는 이유로 1억 정도를 미리 얻어낼 기회를 얻은 동석은 PC방을 하겠다고 설레발치고 있고 이혼한 여동생 동주는 그 틈을 타 한몫 잡아보려고 온갖 머리를 굴린다.



동석의 엄마, 고모, 여동생으로 이루어진 여성탐정단(?)은 정끝순 할머니의 과거에 관한 조사를 펼치고, 정치자금이 늘 부족한 이상만 높은 한물 간 진보 정치인인 아버지는 어떻게 한몫 얻어볼까 눈치작전 및 연기를 펼치고 평생 고상했던 할아버지는 있는 욕 없는 욕 입에 담으며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식구들을 당황케 한다.



이야기는 60억을 둘러싼 유산 상속 소동과 함께 동석이 사랑했던 여인, 사회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낙오자로 거의 확정되자, 그를 배신하고 잘나가는 친구 상우와 결혼해버린 현애를 못 잊고 연연하는 동석의 개인사가 날실과 씨실처럼 이루어진다.



모두들 자기 이익에 눈에 불을 켠다. 물론 동석 역시 그렇긴 하지만 할머니와 우연히 같은 방을 쓰게 되며 할머니와 정이 들고 연민을 갖게 된다. 그리고 동석이 우연히 발견했던 종이접기의 재능이 할머니에게로부터 온 것을 알게 되어 둘은 평온하게 종이를 접고 또 접으며 마음이 연결되는 유대의 시간을 갖게 된다.



이윽고 할머니의 과거가 할머니 자신의 입으로 밝혀진다. 그녀는 그 누구도 배신하지 않았었다. 자신을 믿지 않은 남편으로부터 버림 받았고 시대가 그랬기 때문에 시대의 희생자가 되었던 어리고 연약한 여성이었다. 울며 떠나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기고 억세게 살았고 이렇게 강인한 여성이 되어 나타났다.



이 책을 읽으며 얼마 전 스스로 생을 마감한 설리 씨가 생각났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TV를 보지도 않고 연예인에는 관심도 없어 그 핫한 BTS가 몇 명인지도 모르는 나지만 눈에 띄는 언행으로 인터넷에 뜨고 인구에 회자되는 아름다운 20대 연예인 설리 씨는 우연히 자주 접했고 볼 때마다 예쁘다고 생각했다. 남들과는 다를지 모르지만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악플이 많다고 들었는데 왠지 그런 거 개의치 말고 억세게 살아보라고 마음 속으로 응원했었다. 갑자기 들려온 비보에 울고 싶었다. 채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가 톡 꺾여버린 듯한 분함조차 들었다. 정끝순 여사, 억세게 살아온 일명 제니 할머니를 보며 왜 그녀를 떠올렸을까? 아무리 더럽고 거칠어도 살아보지 그랬냐고, 정끝순 할머니처럼 모든 게 풀리고 좋은 날도 오지 않았겠냐고 외치고 싶었다.



그리고 정끝순 여사의 인생 역정 못지 않게 동석의 고모, 엄마, 여동생의 인생도 서럽고 억세고 찬란하다. 그들의 인생을 무한 응원하고 눈물겹게 그들이 애틋하고 자랑스러웠다. 세대를 달리 하는 그들은 각자의 삶 속에서 분투하며 명분과 체면만을 내세우는 남자들로 인해 똥밭에 구르며 가정의 경제를 책임져왔다.



정끝순 여사와 최씨 가문의 강해서 아름다운 여성들을 끝까지 응원한다. 그리고 인과응보랄까, 찌질이 동석을 둘러싼 관계들도 최선의 방향으로 끝맺어진다. 찌질이 동석의 눈물은 가치있는 것이었다.



앞으로 챙겨서 볼 국내 작가가 생겨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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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만난 물고기
이찬혁 지음 / 수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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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혁 저자님의 소설을 읽으며 유튜브에서 새로 나온 앨범을 들었다. 그 앨범의 모티브가 된 소설이라고 하니 그 노래들을 들으며 읽어야 문자 하나하나의 의미가 제대로 느껴질 것 같았다. 역시나 그랬다. 민트향 나는 듯한 청량한 이수현의 음색과 평범한 듯 음 하나하나를 보듬는 듯한 이찬혁의 음색이 참 좋았다.

'선이'라는 청년이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이란, 예술이란, 인생이란 무엇인지를 추구하며 1년 간의 여행을 하며 만난 뮤즈 '해야'와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담아낸 판타지스럽고 몽환적이면서도 깊은 철학이 담겨 있었다.

때로 내 속에 있던 형태 없는 생각들을 정확히 짚어낸 작가의 말들을 만날 때 정말 심장이 쿵, 혹은 찡할 때가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나의 고민들과도 결이 같은 깊은 공감을 끌어내는 말들이 있었다.

가짜로 살기엔 나는 그들을 증오하며 인정하지 않았다.

진짜로 살기엔 나는 진짜의 면모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90쪽)

예술가도 아닌 범인 중 하나일 뿐이지만 내 삶을 살며, 내 일을 하며 난 정말 진짜가 되고 싶은데 아직 그 진짜의 조건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가짜로 살기는 싫고, 타협하고 안주하기는 싫다. 인생을 진지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고민이 아닐까 싶고, 그렇기에 젊은 천재적 음악가인 저자의 상황과는 다르더라도 깊은 공감을 하게 되는 것 아닐까?

우리가 노래하듯이,

우리가 말하듯이,

우리가 예언하듯이 살길...

어쩌면 이게 예술가가 도달한 결론이 아닐까? '선이'가 만났던 여러 사람 중 환경미화원과의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난 그들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지켜주고 있어요. (113쪽)

사람들은 똑똑한 척하며 눈에 보이는 것만 손에 꼭 쥐고 놓으려 하지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지키는 수호자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선한 마음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노래로, 예술로 이런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악동뮤지션 같은 뮤지션들인지도 모르겠다.

대중문화와 거의 접하지 않고 살기에 이 책을 읽으며 처음 들어본 AKMU의 노래들이었는데 뭐랄까, 잘은 모르지만 영혼이 담겨 있다고 할까? 앞으로도 젊은 남매가 이 책에 나온 것처럼 입으로만 하는 예술이 아니라 "삶 자체가 예술"인 예술가들로 온 세상을 아름답게, 따뜻하게 지탱해 주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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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심는 꽃
황선미 지음, 이보름 그림 / 시공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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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한 편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본 듯 짧지만 마음이 촉촉해지는 이야기를 만났다. 나의 짧은 표현력으로 부족하기에 여러 가지 비유를 하고 싶다. 가령, 황순원의 <소나기> 같은 느낌도 나고, 어렸을 때 접했던 신지식 작가님의 <감이 익을 무렵>이라는 책도 생각이 날 만큼 풋풋하고 정겹다. 일러스트는 이와사키 치히로의 일러스트처럼 순수하고 맑고 투명한 수채화이다.

황선미 작가님의 고유한 창작물을 무언가에 빗댄다는 것이 송구스럽긴 하지만 그 작품들과 맥을 같이 할 만큼 내겐 순수의 시대, 유년시절의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작품이었다. 물론 유년시절이라고 해도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작중에 시골은 내 유년시절의 무대는 될 수 없지만 외갓댁이 있는 전라남도의 농촌을 떠올리게 했다. 신작로에서 하얀 길이라고 불렀던 길을 따라 기와집이었던 외할머니댁에 걸어갔었다. 툇마루에 앉아서 멀리 내다 보면 시골 교회가 보이던 전원 풍경이 어린 눈에는 무척 낭만적이었다.

시골마을의 다부진 여자아이 수현이를 둘러싼 농촌마을을 쇠락의 기미를 보이는 쓸쓸함이 감돈다. 농사는 지어 뭣하냐며 수현이 친구 가족도 하나둘 마을을 떠나 도시로 나가고 수현이의 마음의 친구인 외삼촌도 서울로 떠난다. 굳이 그 마을을 찾아온 도시 사람들이 있다. 인동 덩굴이 아름답게 우거져 인동집이라 부르는 빈집으로 창백한 피부의 소년과 엄마, 아빠이다. 수현이의 학교로 오지만 남자아이는 친구들과 어울리려 하지도 않고 늘 결석을 한다. 난치병에 걸린 아이 때문에 이 가족은 시골을 찾은 것이었다. 그리고 수현이는 실수로 농구공으로 아이를 맞히고 만다. 그게 맘에 못내 걸렸는데 남자아이의 가족은 병원비가 마련되어 수술을 받으러 다시 서울로 떠났다. 죄책감에 시달릴 수현이에게 편지를 남기고 농구를 할 수 있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 떠난다.

예전에도 어느 책에선가 인동꽃, 인동덩굴이 나왔었는데 이 책에 나오길래 한번 찾아봤다. 우리 아파트를 산책하며 어디선가 달콤한 냄새가 피어나서 냄새의 출처를 찾아 고개를 휘휘 젓다가 발견한 바로 그 꽃이었다. 흰색, 노란색, 자줏빛 꽃이 함께 무더기무더기로 피어 있던 곳이 인동꽃이었다. 사람에게도 그렇게 다디단 냄새로 코를 자극하니 당연하게도 벌들이나 온갖 벌레들이 모여들었다.

찾아보니, 꽃이 필 때는 흰색이다가 점점 노란색으로 변하여 금은화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한다. 이 인동덩굴이 무더기무더기 피어있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그 향기로 인해 몽환적일까? 인동꽃을 모티브로 만든 인동무늬라는 것이 기왓장이나 처마에 쓰인다고 하니 꽤 전통적인 꽃인 것 같은데 오히려 현대에 들어서 보기가 힘든 것 같기도 하다.

이와이 슌지의 <4월 이야기>라는 영화가 이제 뭔가 시작되려나 했는데 끝났던 것처럼 이 책 역시 여운을 남기고 끝난다. 앞으로의 수현이와 서울로 가서 수술을 받게 될 민우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을 상상의 세계로 이끈다. 유년시절의 한 페이지처럼 아련하게 남아있다. 수현이가 서른 살쯤 되어 이 시절을 어떻게 추억할까 궁금해진다.

아름다운 그림과 글씨의 향연이 미술관이라도 산책하고 난 기분이다. 세계적인 작가님의 첫 시작이 되었다는 책이 참 풋풋한 설렘이 느껴져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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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조사관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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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참신하고 유쾌하면서도 마음 속에 깊이 울림을 남기는 소설을 만났다. 한국 장르소설 작가는 <궁극의 아이>를 쓰신 장용민 작가 정도밖에 몰랐는데 장래가 촉망되며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하며 따라가고 싶은 작가님을 발견했다. 한국 문학을 많이 읽지 않아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과 민트색으로 깔끔하게 단장한 표지를 보고 신간인 줄 알았더니 2015년에 출간되어 최근에 3쇄를 찍은 책이었고 OCN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영 중인 작품이었다.



인권증진위원회라는 가상의 기구, 그러나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국을 모델로 삼아 정교하고 현실적으로 묘사된 기관의 4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성추행 사건의 헛점을 예리하게 발견하여 입지를 굳게 한, 그러나 신중한 나머지 우유부단하고 어찌 보면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조사관 한윤서, 머리보다는 가슴이 먼저 앞서 욱하며 정의감에 휩쓸려 오히려 불법에 근접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조사관 배홍태, 화끈하고 화통한 성격의, 아무도 몰랐으나 알고 보니 귀여운 딸을 둔 워킹맘 조사관 이달숙, 사법고시 출신의 고고한 이상을 가지고 인권증진위원회에 들어왔으나 무시 당하기 일쑤인 부지훈 사무관... 이렇게 네 사람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에서 자세히는 모를지라도 어디서 들어본 듯한 피부에 가까운 사건들과 자신과 자신의 집단을 비호하기 위해, 혹은 죄책감을 망각하기 위해 기억까지도 뒤집어버리는 인간의 본성이 다루어진다.



아무리 봐도 전형적인 피해자와 가해자의 행태라고 보기 힘든 성희롱 관련 허위 진정 사건의 진실, 경찰을 우롱해보려 했으나 자승자박으로 결국 꼬리가 잡힌 간교한 범죄자의 모습, 평범하고 선량하고 어쩌면 유능한 일반인들이 자신들의 죄책감의 무게로 인해 자기도 모르게 기억을 변조하고 조작하여 죄 없는 경찰을 나락으로 몰 뻔했던 연약함, 사법체계보다 한 수 위인 듯한 연쇄살인범의 비아냥거림과 조롱 앞에 느끼는 이가 갈리는 분노와 무력감, 그리고 약육강식의 세계의 최정점에 서 있는 사법기관의 권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울부짖고 물어뜯음으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승냥이의 역할을 조사관의 정체성을 이 네 사람과 다섯 개의 사건을 통해 이 책은 말한다.



인권증진위원회의 조사관들은 체포권은커녕 수사권도 없다. 그리고 그들에게 수사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단지 수사의 과정에서 인권 침해가 있었는지 여부만 보고서로 제출하면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건의 진위에 관한 호기심이 생기고 또 추리력을 발휘하면 진실에 근접할 수도 있다. 그러니 조사관들은 자연히 갈등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들의 권한도 임무도 아닌 일들에 오지랍을 넓혀야 할지 알면서도 눈을 감을지말이다. 각각 다른 성격의 조사관들의 모습에 모두 공감하게 된다. 아마도 내가 그들이었다면 한윤서에게 가장 가깝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주어진 역할과 권한이 있고 그에 최대한 충실히 하며 주어진 질서를 존중하지만 좌시할 수 없는 악행에 대해서는 나 나름대로의 행동을 취하지 않을까 싶다.



승냥이의 역할... 윤서가 절친인 여장 남자 세리 장에게 넋두리하듯 말했지만 그것은 비단 조사관들만의 역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호랑이와 사자들, 즉 권력 가진 사람들과 기관들이 시민으로부터 의뢰받은 권력으로 사리사욕을 취해 온 모습을 보며 그들은 신뢰를 잃었고 사람들은 분노를 학습했다. 우리 모두가 승냥이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발로 뛰는 믿음직한 조사관들처럼 녹을 받고 승냥이가 되지는 않을지라도 더 이상 권력의 횡포와 남용을 좌시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사회 각처에서 승냥이처럼 짖어야 하는 것이다.



작가의 말에 독자가 호응하면 열심히 써 보겠다고 하셨다. 무지 엄청 완전 호응합니다. 펜 쥔 자, 쓰는 재능 있는 자들의 힘 있는 글은 무기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많이 많이 써 주세요. 《라일락 붉게 피는 집》이 송시우 작가님의 이름을 알린 출세작 같은데 바로 이어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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