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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가 돌아왔다
김범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평점 :
정말 보통이 아닌 책을 만났다. 띠지에 "10초마다 빵빵 터지는데 왜 자꾸 눈물이 나지?"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런 책일수록 실망이 클 수 있어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정말 대단했다. 초판 발행이 2012년 7쇄까지 발행되었으니 요즘같은 출판 시장에서 쾌거였다. 이번에 새로이 단장하고 개정판이 나왔다. 인디언 핑크의 센스 넘치는 할매 일러스트를 입은 표지는 그야말로 취향저격이었다.
여느 미스터리물 이상의 흥미진진한 흡인력이 있을 뿐더러 시대를 조금 앞서 태어난 페미니즘 소설로 손색이 없다. 2016년 10월에 출간된 <82년생 김지영>을 통해 그간 조금씩 불씨를 지피던 페미니즘 문학의 불길이 확 치솟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로부터 3년 정도 전에 출간되었으니 시대를 앞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문학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은 없지만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정말 잘 설계된 것 같다. 어느 누구 하나 낭비된 캐릭터 없이 독특하고 고유한 캐릭터대로 자기가 있을 곳에서 자기 몫을 톡톡히 해낸다. 처음부터 60억의 진위에 대한 호기심으로 쭉쭉 빨려들어갔다가 결국에는 그에 해당하는 답은 주지 않고 끝낸 불친절(?ㅋㅋ)은 있었지만 그게 오히려 매력이었고 모든 것이 아름답게 정리된 후련함까지 주었으니 아름답고 완벽한 완결인 것이다.
이 책은 '찌질이' 최동석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된다. 정말 찌질하고 찌질하다. 세상 이렇게 비호감 캐릭터가 있을까 싶어 책을 덮고 싶어졌다. 그러나 곧 충격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할머니. 그 할머니의 등장에 따라 데면데면했던 친척들의 구도가 엎치락뒤치락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가문의 수치, 민족의 배신자로 떠났던 할머니가 60억을 들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돈 앞에서 민낯을 드러내는 각 사람들... 600억처럼 터무니없지도 않고 6억처럼 어딘가 아쉬운 금액도 아닌, 중산층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딱 그만한 금액 60억 앞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팔랑팔랑한다. 각자 자기 몫의 유산으로 뭘 할까, 공상 혹은 망상의 나래를 맘껏 펼친다.
장손이라는 이유로 1억 정도를 미리 얻어낼 기회를 얻은 동석은 PC방을 하겠다고 설레발치고 있고 이혼한 여동생 동주는 그 틈을 타 한몫 잡아보려고 온갖 머리를 굴린다.
동석의 엄마, 고모, 여동생으로 이루어진 여성탐정단(?)은 정끝순 할머니의 과거에 관한 조사를 펼치고, 정치자금이 늘 부족한 이상만 높은 한물 간 진보 정치인인 아버지는 어떻게 한몫 얻어볼까 눈치작전 및 연기를 펼치고 평생 고상했던 할아버지는 있는 욕 없는 욕 입에 담으며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식구들을 당황케 한다.
이야기는 60억을 둘러싼 유산 상속 소동과 함께 동석이 사랑했던 여인, 사회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낙오자로 거의 확정되자, 그를 배신하고 잘나가는 친구 상우와 결혼해버린 현애를 못 잊고 연연하는 동석의 개인사가 날실과 씨실처럼 이루어진다.
모두들 자기 이익에 눈에 불을 켠다. 물론 동석 역시 그렇긴 하지만 할머니와 우연히 같은 방을 쓰게 되며 할머니와 정이 들고 연민을 갖게 된다. 그리고 동석이 우연히 발견했던 종이접기의 재능이 할머니에게로부터 온 것을 알게 되어 둘은 평온하게 종이를 접고 또 접으며 마음이 연결되는 유대의 시간을 갖게 된다.
이윽고 할머니의 과거가 할머니 자신의 입으로 밝혀진다. 그녀는 그 누구도 배신하지 않았었다. 자신을 믿지 않은 남편으로부터 버림 받았고 시대가 그랬기 때문에 시대의 희생자가 되었던 어리고 연약한 여성이었다. 울며 떠나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기고 억세게 살았고 이렇게 강인한 여성이 되어 나타났다.
이 책을 읽으며 얼마 전 스스로 생을 마감한 설리 씨가 생각났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TV를 보지도 않고 연예인에는 관심도 없어 그 핫한 BTS가 몇 명인지도 모르는 나지만 눈에 띄는 언행으로 인터넷에 뜨고 인구에 회자되는 아름다운 20대 연예인 설리 씨는 우연히 자주 접했고 볼 때마다 예쁘다고 생각했다. 남들과는 다를지 모르지만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악플이 많다고 들었는데 왠지 그런 거 개의치 말고 억세게 살아보라고 마음 속으로 응원했었다. 갑자기 들려온 비보에 울고 싶었다. 채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가 톡 꺾여버린 듯한 분함조차 들었다. 정끝순 여사, 억세게 살아온 일명 제니 할머니를 보며 왜 그녀를 떠올렸을까? 아무리 더럽고 거칠어도 살아보지 그랬냐고, 정끝순 할머니처럼 모든 게 풀리고 좋은 날도 오지 않았겠냐고 외치고 싶었다.
그리고 정끝순 여사의 인생 역정 못지 않게 동석의 고모, 엄마, 여동생의 인생도 서럽고 억세고 찬란하다. 그들의 인생을 무한 응원하고 눈물겹게 그들이 애틋하고 자랑스러웠다. 세대를 달리 하는 그들은 각자의 삶 속에서 분투하며 명분과 체면만을 내세우는 남자들로 인해 똥밭에 구르며 가정의 경제를 책임져왔다.
정끝순 여사와 최씨 가문의 강해서 아름다운 여성들을 끝까지 응원한다. 그리고 인과응보랄까, 찌질이 동석을 둘러싼 관계들도 최선의 방향으로 끝맺어진다. 찌질이 동석의 눈물은 가치있는 것이었다.
앞으로 챙겨서 볼 국내 작가가 생겨서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