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도시 SG컬렉션 1
정명섭 지음 / Storehouse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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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없음)

헌병수사관을 거쳐 현재는 탐정사무소를 운영하는 강민규는 개성공단에서 공장을 가동하고 있는 외삼촌 원종대로부터 사건 의뢰를 받는다. 공장의 재고가 맞지 않으니 그 진상을 규명해 달라는 것이다. 과장이라는 위장 신분으로 접경 지역을 지나 개성 공단으로 들어간다. 강민규를 적대시하는 대한민국 측 직원들과 경직된 태도로 대하는 북측 직원들 사이에서 강민규는 차분히 조사에 임한다. 그리고 비단 외삼촌의 공장뿐만 아니라 다른 공장들까지 같이 엮여 있는 대규모의 자재 유출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된다. 남북 간의 관계가 경색될 수 있는 정치 문제로까지 번질 수 있는 심각한 상황임을 알아챈다.

그러던 중, 강민규를 국정원 직원이라고 헛소문을 퍼뜨린 법인장이 자기 방에서 아무 저항 없이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그리고 강민규가 살인 누명을 썼다. 북한 측 호위총국 오재민 소좌가 그를 감시 겸 조력자 역을 맡는다. 강민규는 예리한 추리로 자신의 혐의를 어느 정도 벗지만 진범을 찾지 않으면 진정 사건의 해결을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재민 소좌는 강민규에게 사흘의 유예를 허락한다. 사흘 후에는 강민규는 추방이다. 첨단 수사기법이 발달한 우리나라에서는 CCTV 몇 대만 돌려보면 진상을 파악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첨단 기기라고는 없는 예스러운 조사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셜록 홈즈 같은 고전 추리소설의 잔상도 느껴졌다.


남북한 관계를 소재로 한 문화 예술 작품들은 호기심에 끌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소비되어도 되는가? 제1, 2차 세계대전은 영미 역사문학(historic fiction)의 끊임없는 소재가 되지만 그건 이미 끝나고 결론이 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은 남북 간의 대치 상황, 전 세계에서 유일한 휴전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어떤 시점으로 상상력을 입힐지, 그것이 진정한 현실 인식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기우가 들기 때문이다.

이 책은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면서도 선을 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꽤 탄탄하게 짜여진 고전적인 추리로 재미도 선사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의 취재와 자료 조사에 박수하고 싶다. 작가 나름대로 민감한 주제를 건드리는 것에 마음의 부담이 없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자세하게 동향과 내막을 조사했는지 궁금하다.

스토어하우스 장르 소설 SG 컬렉션의 첫 번째 책인데, 몇 권의 책이 곧 출간될 예정이다. 이 책을 필두로 향후, 한국 장르 소설들이 기대된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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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 - 흑선의 내항으로 개항을 시작하여 근대적 개혁을 이루기까지!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다나카 아키라 지음, 김정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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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 있어 유명 고전들에 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잘 모르는' 상태이듯이 근대사의 주요 사건들에 관해서도 한 줄, 혹은 한 단어로밖에 설명하지 못하는 수준에 머무는 것이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지식 수준일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국사, 세계사 시간에는 근대사는 수박 겉 핥기 식으로 훑고 넘어가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일본 근대화의 상징 메이지 유신을 살펴보며 그네들의 근대화 경험을 통해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관해 생각해보고 싶었다. 일본 역시 흥선대원군을 위시한 우리나라의 지도층과 마찬가지로 쇄국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이는 거대한 서구 제국주의의 물결이 극동 아시아에까지 이르러 힘의 외교에 의해 일본은 문호를 열게 된 것이다.



통상의 이익을 얻기 위한 구미의 제국주의와 기독교의 선교 정신의 오월동주로 중국, 일본은 세계자본주의의 체계 속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일본은 쓴맛을 보며 개항하게 된 그 경험을 살려 중국대륙에 붙어 있는 더 폐쇄적인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조선에 강압적으로 개항을 요구한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바깥 정세에는 아둔하고 중앙집권적인 권력만을 탐했던 흥선대원군의 조선은 일찌감치 서구의 압도적인 우위에 백기를 들었던 일본과는 달리, 더욱 쇄국의 고삐를 당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위로는 중국, 옆으로는 일본의 쉴 새 없는 공격을 당해온 조선으로서는 밖으로 눈을 돌리기보다는 강한 내부적 결속을 꾀한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 바도 아니다.

그 당시에는 국가든, 개인이든 처음부터 정해진 아이덴티티가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태평양에 면한 섬나라로서 이전부터 네덜란드 등과 완전 개방적인 모습은 아니더라도 경제적 교류가 있었고 서구 자본주의의 맛을 조금은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쇄국을 기치로 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지만 서구 열강이 개항을 요구했을 때는 저항할 수 없다는 분위기 정도는 파악하고 자신들의 정책을 바꾸는 것이 사방이 막혀 있었던 조선보다는 쉬웠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인터넷을 통한 초연결시대인 현대는 그때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클릭 하나로 전 세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뿐더러 우리의 생각을 전 세계로 발신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행동의 폭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스스로 우리 자신을 한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국력의 미약함은 여전히 느껴지는 부분이지만 전후 기적을 일으킨 저력이 우리에겐 있다.

메이지 유신에서 또 의미가 깊었던 것은 비록 외세의 힘에 의한 개방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준비된 리더십이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윤리적이고 정당한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다만 하나의 국가로서 존립하며 성장하기 위하여 헌법 체제를 구축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알기에 교육칙어로 국민들을 천황과 국가에 종속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오늘의 상황을 보더라도 우리나라 내부에서는 끊임없는 갈등과 반목이 사라지지 않고 이념적 대립이 정치가들의 무기인 것 같다. 이것에 깨어있지 않으면 또 다른 형태로 외세에 치욕적으로 국익을 빼앗기는 일이 생기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경각심이 들었다. 지도자들뿐 아니라 개개인의 국민이 깨어있고 늘 국내외 정세를 주시하고 있어야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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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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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은 익히 들어 알지만, 직접 읽어보기는 처음인 히라노 게이치로 작가의 작품이다. 교토대 재학 중인 약관의 나이로 일본 문단에 충격을 안겨주며 데뷔한 놀라운 스토리부터 시작해서 소설가인데 의외로 저서 목록에 철학 관련 저서가 있어서 철학에 조예가 깊은 작가인가 했더니, 영화로도 제작된 <마티네의 끝에서>는 어른의 사랑을 로맨틱하게 그린 작품이어서 그 이채로운 이력에 언젠가는 꼭 만나보리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웃님이자 동료 번역가가 2019년 일본 서점대상 후보로 올랐던 이 작품 <한 남자>를 읽고 '첫사랑'을 만난 느낌이라고 하여 더욱 관심이 갔던 작품이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수작이었던 것 같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담론을 끝까지 책을 내려놓을 수 없는 흥미진진한 스토리 속에 녹여 독자에게 부드럽게 제시한다. 미스터리라고 불러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주인공 재일교포 3세 변호사 기도의 마음 속의 소리, 갈등들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공감의 정도를 높여 주었다.


8년 전, 이혼 소송을 담당했던 기도에게 다시 의뢰를 해 온 리에. 그 기구한 의뢰 내용에 호기심을 가진 기도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몰입하여 사건의 진상을 좇는다. 그 의뢰 내용이란, 임업 현장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은 리에의 남편이 알고 보니, 다른 사람의 이름을 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 그의 정체는 무엇이며, 왜 다른 사람의 이름을 썼는가, 를 조사해 달라는 것이다. 리에는 뇌종양으로 어린 아들을 잃고, 설상가상으로 50대의 젊은 친정 아버지를 잃고 고향으로 돌아와 소심하지만 더없이 선량해보이는 남자를 만나 간신히 행복을 손에 넣었나 했더니 그 남편은 3년만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것도 모자라 남편이 자기가 알던 그 이름의 사람이 아니라니, 자신이 딛고 있는 땅조차 믿을 수 없는 불안함을 느꼈을 것 같다. 기댈 이 하나 없는 리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진실하게 자신의 이혼 소송에 임해주었던 변호사 기도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의뢰한다.

처음에는 진척이 없었으나, 하나하나 실마리가 풀려가며 드러난 진실은 안타깝고 애절한 것이었다. 그러나 진실을 앎으로 인하여 리에는 남은 소중한 자녀들과 함께 남편의 사랑을 품고 인생을 향해 전진할 수 있기 되었고, 알 수 없는 동질감으로 인해 사건을 좇았던 기도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철학적 시간을 통해 견고한 자아를 얻었다.


우리의 출생. 태어남. 이 자체가 운명적이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에, 어느 국가에, 어느 인종으로, 어느 성별로, 장애 유무, 어느 장소에, 어느 부모 밑에서, 어느 환경에서, 어느 형제자매, 친척, 친지들 속에 태어날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종, 국적, 성별, 경제 수준 등 나도 모르게 붙어버린 수많은 꼬리표들이 과연 나를 대변하는 것일까? 나의 인격, 나의 성격, 나의 가치관과 상관없이 한 집단으로 묶여 판단되는 합리성과 편리성은 때로는 아니, 매우 자주 폭력이 된다.

"아이덴티티를 하나의 뭔가로 묶어놓고 그걸 타인이 쥐어 잡고 흔든다는 것은 정말 못 견딜 일이에요. (163쪽)"

특히, 안과 밖을 나누는 일본 사회에서 일본 국적을 가졌으면서 뿌리는 한국에 두고 있는 변호사 기도는 자신의 본래 이름을 버리고 타인의 삶을 살았던 리에의 남편에게 감정이입을 하여 필요 이상으로, 또 리에의 기대 이상으로 사건을 심층적으로 파고든다. 재일교포 3세였기에 한국, 북한 양쪽에도 그 어떤 동질성도 느끼지 못하고 단어 한마디 하지 못하며 일본에서 나고 자라고 교육을 받은 법조인임에도 그는 재일교포라는 하나의 카테고리 속에 포함되어 버린다. 반면, 그의 뿌리인 한국에서는 그는 그저 일본인일 뿐이다.

젊은 시절의 강상중 교수님의 내적 갈등이 엿보이는 듯하고, 재미교포 작가 이민진의 <파친코>의 재일교포 3, 4세들의 모습이 여실히 보이는 듯했다. 어떻게 이렇게 자기 안에서 분열되는 자아의 모습을 일본인인 히라노 게이치로는 섬세하게 그려낼 수 있었을까? 감탄하게 된다.

그럼,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에 의해 규정된 아이덴티티가 내가 아니라면 나는 무엇이고, 우리는 상대방의 무엇을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 이름일까? 현재 사랑하는 사람의 과거가 나의 상상을 배반하는 것이라면? 그 사랑은 성립할까?

"그렇게 되면 우리는 누군가를 좋아할 때, 과연 그 사람의 무엇을 사랑하는 걸까요. 처음 만나서 현재의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갖고, 그다음에는 과거까지 포함해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죠. 근데 그 과거가 생판 타인의 것이라는 걸 알았다면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323쪽)"


최근 읽은 두 권의 소설 요코야마 히데오의 <빛의 현관>, 그리고 이 책 <한 남자>가 묘하게 결을 같이 하며, 자아 탐구의 주제를 깊이 다루고 있어 소설을 읽으며 철학을 탐구하는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미학적, 철학적 깊이와 스토리의 짜임새가 남다른 두 권의 책이었다. 탄복할 수밖에 없다.

초반부에 스쳐 지나가는 사건처럼 나오지만 기도가 전차 안에서 모두가 외면하는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하는 독백이 저자의 메시지라는 것이 느껴졌다.

"딸인지 아들인지는 모르지만 어떻든 그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 이런 무수한 익명의 선의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는 것에 큰 위안을 느꼈다.(48쪽)"

그 선의로 기도는 돈이 되지 않는 리에의 사건을 맡아서 최선을 다해 진상을 규명하여 리에 가족에게 미래를 향한 빛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었으며, 리에의 선의가 평생이 외로웠던 남자의 마음에 따스한 빛이 깃들게 하여 비록 사고현장에서 일찍 죽었지만 인생의 가장 따사로운 한때를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토록 따사롭고 깊은 소설이 있을까?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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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현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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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월 일본 서점대상 후보작 10편이 발표된다. 아마도 일어 원서 좀 읽는다는 분들, 번역/출판 종사자들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시기일 것이다. 나도 다르지 않아서 가장 기다리는 시기이다. 올해 초 발표된 작품들 중 단연 이 작품이 눈에 띄었다. 미스터리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어서 대상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꽤 높은 순위를 차지할 것으로 기대했다. 일본 독자들의 평은 대부분 대단히 우호적이었지만, 반면 어렵다는 등의 반응도 있어서 더욱 궁금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소설은 시종 화사하고 따사로운 남향의 빛과는 달리, 원제인 북향의 빛(North light)와 같이 냉기를 잃지 않지만 부드럽고 은은한 겨울 햇살 같은 느낌을 준다. 저자의 다른 대표작인 <64>가 대단한 호평을 얻은 반면, 장광설이 견디기 힘들었다는 평도 적지 않았다. 나 역시 후자였다. 그러나 <64>로 저자의 성향을 파악하는 '예방접종'을 했기에 이 책을 접할 때는 숨막히게 전개되는 미스터리보다는 저자의 호흡에 맞춰 산책하는 기분으로 읽었다.


거품 경제기의 화려한 날을 보내고 터져버린 풍선처럼 삶의 의욕을 잃고 아내와도 이혼한 건축사 아오세에게 운명의 계시처럼 찾아온 의뢰인의 말. "당신이 살고 싶은 집을 지어주세요." 예전의 열정과 영감을 발휘하여 북향의 빛을 최대한 살려 지은 Y 주택. Y 주택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것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아 헤매듯이 의뢰인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역시 Y 주택은 빈집이었다. 그리고 2층에 빛이 드는 창문 앞에 덩그라니 놓인 세월의 흔적이 담긴 낡았으나 풍격 있는 목제 의자 하나.

아오세의 동료이자 현재 일하는 건축사무소의 대표인 오카지마는 그 의자를 본 적이 있다며 근대 건축의 거장이자 일본에서 수년간 살았던 적이 있는 브루노 타우트가 일본에 거주할 때 만든 의자 같다는 것이다. 이 의자가 실마리가 되어 의자의 근원을 찾으며 의뢰인을 추적함과 동시에 브루노 타우트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오카지마가 혼신의 힘을 다해 따낸 미술관 공모전의 이야기, 아오세의 원가족의 삶과 얽힌 과거 이야기, 마음 속에 아직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아내와 딸에 얽힌 현재 이야기 등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진행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64>에서 그랬듯이 아오세의 내면의 독백이다.


집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 살아야 하는가?

대학 시절, 친하게 지냈던 언니는 고위직 외교관인 아버지를 두어 일본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소녀 시절을 보내고 그외에도 수많은 나라를 거쳐 대학을 한국에서 다녔다. 언니는 그랬다. 자기는 고향이 '부모님 계신 곳'이라고 생각한다고. 유년시절, 댐 건설의 중요한 인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 떠돌았던 아오세는 집이라는 것에 누구보다 큰 의미를 두었던 것 같다. 그런 그에게 당신이 살고 싶은 집을 지으라는 해괴한 의뢰인의 요청사항. Y 주택은 아오세의 분신, 아오세가 자신의 자아와 동일시하는 존재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있을 곳은 아직 애정이 남아 있는 아내와 딸이 있는 곳이었으며 그의 아내 역시 그 사실을 깨닫는다. 콘크리트든, 목조든 어찌 보면 물질에 불과한 것이 집이다. 우리가 있을 곳은 애정이 머무는 곳이 아닐까? 우리가 있을 곳이 어디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건축과 미술, 그 아름다움

이 책의 원서를 읽은 지인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책 뒤의 참고도서를 보면 저자의 집필 기간 7년도 짧게 느껴질 정도이다. 두 달에 한 권씩 찍어나오는 책들도 있는데 그야말로 정성이 깃든 장인의 걸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는 브루노 타우트에 관해 찾아봤는데 유리 파빌리온(Glass Pavillion)으로 유명한 근대 건축가이자 도시계획자였다고 한다. 그는 애인과 일본으로 망명와 있는 동안은 건축 활동보다는 공예 등에 주력했으며 일본의 전통문화에 심취했던 것 같다. 브루노 타우트의 의자라는 중요한 실마리를 통해 이 책의 예술성을 높이 끌어올렸던 것 같다. 그리고 나카지마 히데토시 주연으로 영화로 제작된다고 하는데 Y 주택의 모습을 어떻게 구현해냈을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어떻게 채광창을 냈을지, 북향의 빛을 어떻게 끌어들였을지 궁금하다.

속죄와 용서, 회복과 재생의 이야기

아무리 분위기가 좋아도 서사가 맥이 빠진다면, 재미가 없다면 소용이 없었을 텐데 역시 스토리텔링의 대가이다. 의뢰인이 그런 의뢰를 할 수밖에 없었던 아오세의 과거의 이야기, 속죄와 용서가 일어난다. 그러면서 Y 주택을 매개로 아오세는 자신의 현재와 화해하고 가족을 회복하고 재생하려는 시도한다. 다시금 잃어버린 열정과 자신감을 되찾는다. 그것은 허황되고 텅 빈 껍데기 같았던 거품 경제기의 것과는 다른 영글고 단단한 것이었다. 부드럽고 은은하게 들어오는 북향의 빛처럼 그의 인생에도 빛이 서서히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동료였던 오카지마의 죽음은 마음이 몹시도 아팠지만 그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그의 설계도면을 가지고 오카지마의 필생의 꿈이었던 공모에 그대로 진출하기로 한다.


이 책의 편집자 후기도 읽어봤는데 역시 하나하나 꼼꼼히 작업했다고 한다. 읽으면서 느꼈다. 모든 과정에 정성이 깃들어 있음이. 벌써 2쇄를 찍었다고 하니 정말 축하할 만한 일이다.


이 책은 시각적 이미지가 무척 중요하기 때문에 영화가 나오면 영화를 보고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 7년간 썼는데 한번 휙 읽고 놔두긴 너무 아깝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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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 나이프 - 왼팔과 사랑에 빠진 남자
하야시 고지 지음, 김현화 옮김 / 오렌지디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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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인 오늘날에도 사람의 뇌는

인류에게 남겨진 유일한 미지의 영역이다.

50억 년에 걸친 진화의 산물이자 신경세포 1천 억 개가 모인,

우주가 만들어낸 가장 복잡한 창조물.

(6쪽)

아름답고 공들여 만든 느낌이 전해지는 양장본의 책이 얼마나 맘에 드는지 계속 손에 붙들고 있었다. 의료 소설에 관한 관심이 많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및 일본 배우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배우인 아마미 유키의 오랜만의 드라마 컴백을 기대했던 작품의 원작이어서 기대가 무척 컸다. (이 작품 원서 출간이 2019년 12월, 드라마 시작이 2020년 1월이었다.) 바빠서 드라마는 보지 못했지만, 캐스팅된 배우들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여 네 명의 천재 신경외과 의사들의 모습이 책을 읽어가며 머릿속에 3차원 입체 영상으로 재생되었다.


☆워크 라이프 밸런스에 실패한 돌싱 50세 여의사 미야마.

- 일을 놓을 수 없어 딸의 손을 놓아버렸지만, 십대 소녀가 된 딸과의 시간을 보내며 내면의 모성을 발견하지만 딸을 위한 최선이라고 생각하여 전남편의 가정으로 딸을 보낸다.

☆일본 최초 '톱나이프' 칭호를 받은 화려한 싱글 53세 구로이와.

- 어려서 가정 학대를 받는 외로웠던 소년이 아직 그 속에 살아 있다. 어느 날 눈앞에 나타난 친자라는 다섯 살짜리 남자아이 다모쓰와의 일주일을 통해 어린 날의 자신과 화해한다.

☆재능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젊은 천재 34세 니시고오리.

- 엘리트 의사 집안에서 끊임없이 폭주 기관자처럼 자신을 다그쳐 젊은 천재라는 명성을 얻었지만 늘 경직되어 있고 관계 맺기에 서툰 덜 큰 어른이다. 서번트 증후군에 걸린 환자와의 교감을 통해 조금은 마음의 긴장을 내려놓는다.

☆평생 1등만 했지만 공감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신출내기 26세 여의사 고즈쿠에.

- 사랑해 본 적이 있느냐, 라는 사람 좋은 외과 부장의 말 한 마디에 피리부는 사나이를 따라 갔던 아이들처럼 신경외과로 왔지만, 실수투성이로 하루도 무사히 넘어가는 날이 없다. 그러나, 자신의 왼팔과 사랑에 빠진 70대 남성 환자와 그의 아내를 보며 조금은 '사람의 마음'에 다가간다.


천재 신경외과 의사들의 삶 속의 아픔, 트라우마와 함께 이들이 만나는 환자들과의 공명이 가슴 찡하게 그려진다.

'왼팔과 사랑에 빠진 남자'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 왼손잡이 천재 신경외과 의사 이야기가 나오나 보다 했는데, 읽고 나니 신경외과 의사이자 작가인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와 같은 맥락의 뇌 질환에서 비롯된 망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뇌의 이상으로 나타나는 미스터리한 증상들이 무척 흥미로웠다. 한쪽 반을 인식하지 못한다거나 자신의 엄마를 외계인으로 인식하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음악 전체를 머릿속에 재현해내는 서번트 증후군을 앓기도 하고, 자신의 왼팔을 사랑하기도 하는 등 매우 신비로운 증상으로 인해 미지의 영역인 뇌에 관한 호기심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다. 그야말로 0.1밀리리터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으며 지금도 전신을 지탱하는 뇌가 고맙다고 해야 하나, 조물주의 능력에 경외심을 품게 된다고 해야 하나?

천재지만 밉상인 구로이와가 친자인 줄 알았던 다섯 살짜리 꼬마 다모쓰와 보낸 자상한 시간, 그리고 구로이와를 지켜주기 위해 자신이 아끼던 열 개의 장난감을 구로이와의 집 곳곳에 남겨두고 떠난 다모쓰의 모습에 눈물이 왈칵했다.

흥미로운 뇌의 이야기, 게다가 캐릭터가 살아 있고 에피소드 하나하나에 깊은 감동이 있어서 읽으며 행복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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