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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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은 익히 들어 알지만, 직접 읽어보기는 처음인 히라노 게이치로 작가의 작품이다. 교토대 재학 중인 약관의 나이로 일본 문단에 충격을 안겨주며 데뷔한 놀라운 스토리부터 시작해서 소설가인데 의외로 저서 목록에 철학 관련 저서가 있어서 철학에 조예가 깊은 작가인가 했더니, 영화로도 제작된 <마티네의 끝에서>는 어른의 사랑을 로맨틱하게 그린 작품이어서 그 이채로운 이력에 언젠가는 꼭 만나보리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웃님이자 동료 번역가가 2019년 일본 서점대상 후보로 올랐던 이 작품 <한 남자>를 읽고 '첫사랑'을 만난 느낌이라고 하여 더욱 관심이 갔던 작품이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수작이었던 것 같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담론을 끝까지 책을 내려놓을 수 없는 흥미진진한 스토리 속에 녹여 독자에게 부드럽게 제시한다. 미스터리라고 불러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주인공 재일교포 3세 변호사 기도의 마음 속의 소리, 갈등들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공감의 정도를 높여 주었다.


8년 전, 이혼 소송을 담당했던 기도에게 다시 의뢰를 해 온 리에. 그 기구한 의뢰 내용에 호기심을 가진 기도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몰입하여 사건의 진상을 좇는다. 그 의뢰 내용이란, 임업 현장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은 리에의 남편이 알고 보니, 다른 사람의 이름을 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 그의 정체는 무엇이며, 왜 다른 사람의 이름을 썼는가, 를 조사해 달라는 것이다. 리에는 뇌종양으로 어린 아들을 잃고, 설상가상으로 50대의 젊은 친정 아버지를 잃고 고향으로 돌아와 소심하지만 더없이 선량해보이는 남자를 만나 간신히 행복을 손에 넣었나 했더니 그 남편은 3년만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것도 모자라 남편이 자기가 알던 그 이름의 사람이 아니라니, 자신이 딛고 있는 땅조차 믿을 수 없는 불안함을 느꼈을 것 같다. 기댈 이 하나 없는 리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진실하게 자신의 이혼 소송에 임해주었던 변호사 기도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의뢰한다.

처음에는 진척이 없었으나, 하나하나 실마리가 풀려가며 드러난 진실은 안타깝고 애절한 것이었다. 그러나 진실을 앎으로 인하여 리에는 남은 소중한 자녀들과 함께 남편의 사랑을 품고 인생을 향해 전진할 수 있기 되었고, 알 수 없는 동질감으로 인해 사건을 좇았던 기도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철학적 시간을 통해 견고한 자아를 얻었다.


우리의 출생. 태어남. 이 자체가 운명적이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에, 어느 국가에, 어느 인종으로, 어느 성별로, 장애 유무, 어느 장소에, 어느 부모 밑에서, 어느 환경에서, 어느 형제자매, 친척, 친지들 속에 태어날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종, 국적, 성별, 경제 수준 등 나도 모르게 붙어버린 수많은 꼬리표들이 과연 나를 대변하는 것일까? 나의 인격, 나의 성격, 나의 가치관과 상관없이 한 집단으로 묶여 판단되는 합리성과 편리성은 때로는 아니, 매우 자주 폭력이 된다.

"아이덴티티를 하나의 뭔가로 묶어놓고 그걸 타인이 쥐어 잡고 흔든다는 것은 정말 못 견딜 일이에요. (163쪽)"

특히, 안과 밖을 나누는 일본 사회에서 일본 국적을 가졌으면서 뿌리는 한국에 두고 있는 변호사 기도는 자신의 본래 이름을 버리고 타인의 삶을 살았던 리에의 남편에게 감정이입을 하여 필요 이상으로, 또 리에의 기대 이상으로 사건을 심층적으로 파고든다. 재일교포 3세였기에 한국, 북한 양쪽에도 그 어떤 동질성도 느끼지 못하고 단어 한마디 하지 못하며 일본에서 나고 자라고 교육을 받은 법조인임에도 그는 재일교포라는 하나의 카테고리 속에 포함되어 버린다. 반면, 그의 뿌리인 한국에서는 그는 그저 일본인일 뿐이다.

젊은 시절의 강상중 교수님의 내적 갈등이 엿보이는 듯하고, 재미교포 작가 이민진의 <파친코>의 재일교포 3, 4세들의 모습이 여실히 보이는 듯했다. 어떻게 이렇게 자기 안에서 분열되는 자아의 모습을 일본인인 히라노 게이치로는 섬세하게 그려낼 수 있었을까? 감탄하게 된다.

그럼,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에 의해 규정된 아이덴티티가 내가 아니라면 나는 무엇이고, 우리는 상대방의 무엇을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 이름일까? 현재 사랑하는 사람의 과거가 나의 상상을 배반하는 것이라면? 그 사랑은 성립할까?

"그렇게 되면 우리는 누군가를 좋아할 때, 과연 그 사람의 무엇을 사랑하는 걸까요. 처음 만나서 현재의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갖고, 그다음에는 과거까지 포함해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죠. 근데 그 과거가 생판 타인의 것이라는 걸 알았다면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323쪽)"


최근 읽은 두 권의 소설 요코야마 히데오의 <빛의 현관>, 그리고 이 책 <한 남자>가 묘하게 결을 같이 하며, 자아 탐구의 주제를 깊이 다루고 있어 소설을 읽으며 철학을 탐구하는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미학적, 철학적 깊이와 스토리의 짜임새가 남다른 두 권의 책이었다. 탄복할 수밖에 없다.

초반부에 스쳐 지나가는 사건처럼 나오지만 기도가 전차 안에서 모두가 외면하는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하는 독백이 저자의 메시지라는 것이 느껴졌다.

"딸인지 아들인지는 모르지만 어떻든 그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 이런 무수한 익명의 선의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는 것에 큰 위안을 느꼈다.(48쪽)"

그 선의로 기도는 돈이 되지 않는 리에의 사건을 맡아서 최선을 다해 진상을 규명하여 리에 가족에게 미래를 향한 빛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었으며, 리에의 선의가 평생이 외로웠던 남자의 마음에 따스한 빛이 깃들게 하여 비록 사고현장에서 일찍 죽었지만 인생의 가장 따사로운 한때를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토록 따사롭고 깊은 소설이 있을까?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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