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현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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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월 일본 서점대상 후보작 10편이 발표된다. 아마도 일어 원서 좀 읽는다는 분들, 번역/출판 종사자들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시기일 것이다. 나도 다르지 않아서 가장 기다리는 시기이다. 올해 초 발표된 작품들 중 단연 이 작품이 눈에 띄었다. 미스터리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어서 대상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꽤 높은 순위를 차지할 것으로 기대했다. 일본 독자들의 평은 대부분 대단히 우호적이었지만, 반면 어렵다는 등의 반응도 있어서 더욱 궁금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소설은 시종 화사하고 따사로운 남향의 빛과는 달리, 원제인 북향의 빛(North light)와 같이 냉기를 잃지 않지만 부드럽고 은은한 겨울 햇살 같은 느낌을 준다. 저자의 다른 대표작인 <64>가 대단한 호평을 얻은 반면, 장광설이 견디기 힘들었다는 평도 적지 않았다. 나 역시 후자였다. 그러나 <64>로 저자의 성향을 파악하는 '예방접종'을 했기에 이 책을 접할 때는 숨막히게 전개되는 미스터리보다는 저자의 호흡에 맞춰 산책하는 기분으로 읽었다.


거품 경제기의 화려한 날을 보내고 터져버린 풍선처럼 삶의 의욕을 잃고 아내와도 이혼한 건축사 아오세에게 운명의 계시처럼 찾아온 의뢰인의 말. "당신이 살고 싶은 집을 지어주세요." 예전의 열정과 영감을 발휘하여 북향의 빛을 최대한 살려 지은 Y 주택. Y 주택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것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아 헤매듯이 의뢰인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역시 Y 주택은 빈집이었다. 그리고 2층에 빛이 드는 창문 앞에 덩그라니 놓인 세월의 흔적이 담긴 낡았으나 풍격 있는 목제 의자 하나.

아오세의 동료이자 현재 일하는 건축사무소의 대표인 오카지마는 그 의자를 본 적이 있다며 근대 건축의 거장이자 일본에서 수년간 살았던 적이 있는 브루노 타우트가 일본에 거주할 때 만든 의자 같다는 것이다. 이 의자가 실마리가 되어 의자의 근원을 찾으며 의뢰인을 추적함과 동시에 브루노 타우트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오카지마가 혼신의 힘을 다해 따낸 미술관 공모전의 이야기, 아오세의 원가족의 삶과 얽힌 과거 이야기, 마음 속에 아직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아내와 딸에 얽힌 현재 이야기 등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진행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64>에서 그랬듯이 아오세의 내면의 독백이다.


집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 살아야 하는가?

대학 시절, 친하게 지냈던 언니는 고위직 외교관인 아버지를 두어 일본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소녀 시절을 보내고 그외에도 수많은 나라를 거쳐 대학을 한국에서 다녔다. 언니는 그랬다. 자기는 고향이 '부모님 계신 곳'이라고 생각한다고. 유년시절, 댐 건설의 중요한 인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 떠돌았던 아오세는 집이라는 것에 누구보다 큰 의미를 두었던 것 같다. 그런 그에게 당신이 살고 싶은 집을 지으라는 해괴한 의뢰인의 요청사항. Y 주택은 아오세의 분신, 아오세가 자신의 자아와 동일시하는 존재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있을 곳은 아직 애정이 남아 있는 아내와 딸이 있는 곳이었으며 그의 아내 역시 그 사실을 깨닫는다. 콘크리트든, 목조든 어찌 보면 물질에 불과한 것이 집이다. 우리가 있을 곳은 애정이 머무는 곳이 아닐까? 우리가 있을 곳이 어디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건축과 미술, 그 아름다움

이 책의 원서를 읽은 지인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책 뒤의 참고도서를 보면 저자의 집필 기간 7년도 짧게 느껴질 정도이다. 두 달에 한 권씩 찍어나오는 책들도 있는데 그야말로 정성이 깃든 장인의 걸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는 브루노 타우트에 관해 찾아봤는데 유리 파빌리온(Glass Pavillion)으로 유명한 근대 건축가이자 도시계획자였다고 한다. 그는 애인과 일본으로 망명와 있는 동안은 건축 활동보다는 공예 등에 주력했으며 일본의 전통문화에 심취했던 것 같다. 브루노 타우트의 의자라는 중요한 실마리를 통해 이 책의 예술성을 높이 끌어올렸던 것 같다. 그리고 나카지마 히데토시 주연으로 영화로 제작된다고 하는데 Y 주택의 모습을 어떻게 구현해냈을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어떻게 채광창을 냈을지, 북향의 빛을 어떻게 끌어들였을지 궁금하다.

속죄와 용서, 회복과 재생의 이야기

아무리 분위기가 좋아도 서사가 맥이 빠진다면, 재미가 없다면 소용이 없었을 텐데 역시 스토리텔링의 대가이다. 의뢰인이 그런 의뢰를 할 수밖에 없었던 아오세의 과거의 이야기, 속죄와 용서가 일어난다. 그러면서 Y 주택을 매개로 아오세는 자신의 현재와 화해하고 가족을 회복하고 재생하려는 시도한다. 다시금 잃어버린 열정과 자신감을 되찾는다. 그것은 허황되고 텅 빈 껍데기 같았던 거품 경제기의 것과는 다른 영글고 단단한 것이었다. 부드럽고 은은하게 들어오는 북향의 빛처럼 그의 인생에도 빛이 서서히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동료였던 오카지마의 죽음은 마음이 몹시도 아팠지만 그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그의 설계도면을 가지고 오카지마의 필생의 꿈이었던 공모에 그대로 진출하기로 한다.


이 책의 편집자 후기도 읽어봤는데 역시 하나하나 꼼꼼히 작업했다고 한다. 읽으면서 느꼈다. 모든 과정에 정성이 깃들어 있음이. 벌써 2쇄를 찍었다고 하니 정말 축하할 만한 일이다.


이 책은 시각적 이미지가 무척 중요하기 때문에 영화가 나오면 영화를 보고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 7년간 썼는데 한번 휙 읽고 놔두긴 너무 아깝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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