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
김지윤 지음 / 팩토리나인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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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남동 골목길에 자리 잡은 빙굴빙굴 빨래방. 언제부턴가 빨래방에 온 손님들은 테이블에 놓인 연두색 다이어리를 통해 각자의 고임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는다.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모르는 사람들이 빨래방에서 만나 서로에게 위로를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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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 깔끔하면서도 정감 가는 글씨체가 박힌 간판이었다. 그 위에 노란 할로겐 등이 한 글자 한 글자를 아늑하게 비추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 것만 같아서 글을 적어 준 게 누구든 감사했다. 그동안 혼자만 듣는 메아리 같았던 자신의 목소리에 누군가가 반대편에서 '너의 목소리를 내가 듣고 있어.' 라고 말해준 것 같았다.

미라는 화분을 키워 식물이 자신을 가꾸는 듯한 경험을 해보라는 조언을 곰곰이 생각했다.

 

"돈이 뭐라고, 그게 참 사람을 힘들게 한다, 진돌아."

벤치에 앉아서도 계속 미라네 식구들 걱정을 하며 장 영감이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 진돌아."

빨래방에 남은 미라는 나희를 꼭 안았고 우철은 뒤놀아 눈물을 삼켰다. 자존심 때문인지 가장이라는 무게 때문인지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하준이 테이블에 앉아 연두색 다이어리를 펼쳤다. 자신이 써놓았던 고민 아래 '같이 걷자'를 불러보라고 적혀 있는 글을 보니 어젯밤에 보았던 여자가 떠올랐다.

 

묵직하고 투박하게 써 내려간 문장들로 하준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건조기가 종료되었다는 알림음이 울리고 자신의 빨래들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설레는 마음은 남겨 둔 채로.

 

빨래방에 발을 들이자 끓던 속이 차분해졌다.

이곳에 오면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 얼룩이 졌으면 어때. 내가 다 깨끗하게 지워 줄게.'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만큼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두 분 모두."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듣는 위로가 이렇게 큰 힘이 될 줄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 더 빨리 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의 다이어리를 펼쳤을 것이다. 그 위에 한 글자 한글 자 고민을 눌러썼을 것이다.

 

올 때와는 달라진 연우였다. 스스로 세탁기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새로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배신감과 쓸데없는 자책감이 달라붙어 있는 검정 원피스를 입은 채 축 쳐진 연우는 없었다.

 

"나가지 말라고 말씀드렸어요. 길 미끄러워요. 그 빨래방은 무슨 동네 사랑방이에요? 맨날 먹을 거 갖다 놓고 나눠 먹으면서 친목 도모하게. 사람들 참 시간도 많아, 또 그런 위험한 일에 휘말리면...'

 

"위험했지만 범인도 잡았고, 세웅이라는 총각은 그 길로 꿈도 찾아서 경찰 고시도 준비하고 있어, 세웅이라는 청년은 너한테 흉터 치료를 받은 뒤로 다시 거울도 보고 웃기도 하더구나. 이제야 비로소 사람답게 살고 있다고. 거기는 그냥 빨래만 하러 가는 데가 아니야."

 

발길이 멈춘 곳은 공원 길 끝자락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이었다. 따뜻했다. 아무도 없는 빨래방의 고요 속에 세탁기 한 대만 하얀 거품을 만들어내며 철썩 철썩 파도 소리를 내며 돌고 있었다. 커피 머신 옆에서는 장 영감이 새로 가져다 놓은 대추 쌍화탕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쌍화탕은 진한 갈색 빛을 띠었다. 병 너머로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것 같은 대추 냄새에 대주가 인상을 찡그렸다.

 

대주가 여러 사람이 매만져서 손때가 묻은 연두색 다이어리를 처음부터 펼쳤다. "배고프다." "지루하다." 같은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고민 밑에도 장 영감의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 진중한 글씨체에 눈물이 났다. 아버지는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고민을 함께 열심히 고민해 주고 있었다. 아버지는 여기에 올 거리를 만들기 위해 묵은 이불을 꺼내고, 쌍화탕을 만들고, 한파주의보에도 진돌이의 가슴 줄을 쥐고 그 얇아진 모습을 하고 이곳에 왔던 것이다. 아버지는 외로웠던 것이다.

 

철썩 철썩. 대주의 등 뒤에서 돌고 있는 세탁기가 파도 소리를 냈다. 멈추지 않는 파도 소리에 기대어 대주가 목 놓아 울었다.

 

"누구나 목 놓아 울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다가 필요하다. 연남동에는 하얀 거품 파도가 치는 눈물도 슬픔도 씻어가는 작은 바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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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하건대, 분명 좋아질 거예요
나태주 지음 / 더블북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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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시인이 급성 췌장염으로 입원해 사흘밖에 살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죽음의 문턱가지 갔다가 돌아와서야 시인은 삶은 살아지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시인은 침상에 누워 아버지의 말처럼 징글징글하도록 아름답고 빛나는 세상을 살아내겠다고 마음먹는다. 이 책은 시인의 병상 일기가 아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긍정의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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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무엇이 기쁜가? 무엇보다도 오늘 살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쁘다. 물 마실 수 있어서 기쁘고, 음식 삼킬 수 있어서 기쁘다. 새삼스레 한국말로 시를 쓰는 사람인 것이 기쁘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어둑한 터널,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그 길. 금방 빠져나오면 다행이지만, 그 터널이 길다고 좌절할 필요도 없다. 나는 그 터널 속에 갇혀서야 깨달았고, 이 책은 그 기록이다.

'나도 이렇게 아팠는데 일어났으니 당신도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다. '나 같은 사람도 이겨냈으니, 당신도 이겨낼 수 있다'는 말이다.

 

모든 첫 번째 것들은 마음속에 강력한 기억을 남긴다. 그래서 오래오래 잊히지 않는 그 무엇이 되고야 만다. 그것을 우리는 추억이라고도 말하고 상처라고도 말하겠지 싶다.

시인들에게 있어서 첫 번째 시집이 그런 존재다. 모든 시인들에게 있어 첫 번째 시집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첫 번째 낳은 아기와 같다.

 

의식이 있고 눈동자도 또렷한 사람이 어찌 그렇게 죽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 아들아이 생각이었다. 그건 무모한 신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무모한 신념이 끝내 나를 중환자실에서 나오게 해 주었고 또 내 생명을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나아지는 쪽으로 밀고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아이들아이가 한 일이지만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할것이다.

 

내가 병을 이겨내고 다시 밖으로 나섰을 때,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 어김없이 나에게 들려주는 인사말이 있다. '살아줘서 고맙습니다.'

전혀 의외의 인사말이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내심 놀라곤 한다. 내가 병이 나 주위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쳤고 신세를 졌고 염려하는 마음을 줬으니 이쪽에서 고맙고 미안하다고 해야 할 일인데 거꾸로 된 인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글쓰기는 나에게 있어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행위 그 연소 과정이기도 한 일이다. 정말로 글쓰기가 나를 쓰러뜨렸다 하더라도 글쓰기를 통해서 나는 다시금 나를 일으켜 세워야만 했다. 그것이 순리요, 바른 방법이었다.

글쓰기는 에너지의 방출 행위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새롭게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또 하나의 생명 행위였다.

 

평생을 두고 존경하며 따를 수 있는 어른이나 선배가 있다는 건 매우 행복한 일이다. 보람된 인생이다. 가족 구성원 가운데에서 그런 분이 있다는 건 더욱 행복한 일이고 보람된 인생이다. 그렇게 청춘을 바라보는 어른이 있을 때, 청춘은 비로소 어른을 바라볼 수 있다.

그때에서야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아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중요한 사실을 이제사 알게 되다니! 그러나 이제라도 알게 된 것은 이보다 더 늦게 안 것보다 나은 일이요. 아예 그 조차 모르고 세상을 뜨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겠는가. 그것은 역시 나름대로 소중한 깨달음의 한 계기가 되었다.

인간은 한시도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그런데 사랑하려면 가끔 뒤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을 뒤 늦게 알았다.

 

이 제 내 차례다. 내가 화답할 차례다. 나에게 주어진 소명은 이렇다. 기뻐하라, 사랑하라, 감사하고 찬미하라, '어른처럼'이 아니다.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라. 분별없이 기뻐하라. 내일은 걱정하지 말고 오늘에, 오직 오늘의 순간 순간의 삶에 열중하라. 그것은 나를 다시 살리신 신이 주시는 소명이요, 지상명령이다. 기쁨, 사랑, 감사, 찬미, 그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내 시와 인생의 주제였다.

이미 나는 사로잡힌 영혼이었는데 나만 그것을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이제라도 알게 되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노릇인가! 감사의 홍수, 그 강물이다.

 

책이란 또 이렇게 엉뚱한 곳에 가서 저 나름 뿌리내리고 나 대신 자생력을 얻어 살아가는 생명체 노릇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풀꽃>이란 시는 나에게 두 번씩이나 그것도 병원 생활 가운데 기쁜 소식을 전해준 시가 되었다. 어쩐지 그 일 하나만으로도 나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희망의 뿌리가 되었고 병상을 털고 일어날 것 같은 소생의 확신을 심어줬다.

 

빛깔로 친대도 기쁨은 환하고 따스한 빛깔이겠다. 알록달록 어여쁜 빛깔이다. 모양으로 바꾸어보아도 기쁨은 모난 것이 아니라 둥글고 부드러운 것이겠다. 우리들 인간은 슬프거나 괴로운 감정보다는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감정을 추구하는 존재다.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목숨 가진 것들은 기쁨을 원한다. 그건 동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식물들도 그럴 것이고 어쩌면 무생물까지도 그럴지 모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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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 위드 X 창비교육 성장소설 9
권여름 외 지음 / 창비교육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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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익숙한 장소이자 공포에 최적화된 그곳. ‘학교를 배경으로 한 괴담 모음집.

전교 1등이 올린 유튜브에 영상에 찍힌 기이한 형체, 복수심이 만들어 낸 절대 나갈 수 없는 카톡방, 보름들이 뜨는 밤 시작되는 특별한 수업, 매년 같은 한번을 받은 학생에게 내려지는 끔찍한 저주, 소중한 것을 바쳐야 소원을 들어주는 전설의 구덩이, 아이에게 잔인하기까지 한 소문 등 성장의 고통과 불안을 겪고 있는 청소년, 성인 독자들에게 은근한 몰입감과 쾌감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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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 위드미-이유리

대체 저것들은 왜 하필 수아한테 붙었을까

 

비록 친하진 않지만 내가 본 수아는 말수가 적고 차분한 성격에 지독히 공부 벌레였다. 빡솔의 말에 따르면 초등학교 때부터 선생님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애였다나. 수아는 일어날 사고도 미리 알아서 피해 갈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번째 이유가 훨씬 가능성이 높았다. 저주 말이다.

 

수아한테 원한을 가질 만한 애들이야 쌔고 쌨다.

 

아까부터 이 말을 꼭 해야 한다 싶었는데 그만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끝내 하지 못한 말을 나는 거울에 대고 중얼거렸다.

 

수아야, 너 늦둥이 동생이 하나 있다고 했지.

네 영상에 나온 귀신은 둘이었어.

 

카톡감옥-은치규

도상현이 만든 방은 차단하거나 초대 거부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이들은 계속 방을 나가려고 했고 인터넷에서 본 이런저런 방법을 공유하며 탈출을 시도했지만, 어김없이 초대되어 결국에는 다시 끌려오게 되었다.

 

정준우는 카톡 감옥을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지난 대화를 천천히 살펴봤다

 

그렇게 스크롤을 조금씩 올리다가 실수로 D가 봰 동영상 하나를 클릭하게 되었다.

 

동영상 속 천장에 메달린 시체는 강병세였다. 그 순간 강병세와 단둘이 남은 채팅방 속 메시지는 옆에 붙어 있던 마지막 숫자 1이 사라졌다. 그리고 ㅋㅋㅋㅋ 이어지는 웃음소리.

 

벗어나고 싶어서-은모든 

무엇보다 고욕인 것은 전학 간 학교에서 맞는 첫날이었다

낯선 교실의 공기, 뻣뻣한 교복, 어색한 인사, 무엇보다 맨 처음 맞는 점심시간

 

"너한테 폭언까지 하신 것까지 변호하지 않을 게. 어차피  지금쯤은 너도 그분들이 욱해서 한 말씀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윤재야, 그분들 꿈에 한 번 쯤은 얼굴을 비춰주는 게 좋을 거야. 이렇게 보름달이 뜰 때마다 꼬박꼬박 학교로 돌아올 여력이 있으면."

 

영고 1983-권여름

오래전이나 가능했던 잔인한 일이 지금도 어디에선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 소름 돋는 건 그런 게 아니겠어?

 

그들은 희준을 못 봤지만 희한하게 희준은 그들이 보였다. 그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영원히 1830이 될리 없다고 안심하는 녀석들에게, 그게 아니라고 알려주려던 것뿐이었다. 책상만 버리려던 거였어. 얘들아 . 믿어 주라. 그렇게 양희준이 말을 끝냈을 때 묵직한 것이 화단에 떨어져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런 애 - 조진주

"이 동그란 구멍 앞에 서 있으면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아. 막 두군거려." 솔희가 가리킨 것은 카메라 렌즈였다.

 

솔희의 말에 예나는 구멍에 얽힌 전선을 떠올렸다. 이 어둡고 좁은 곳에 갇혀 아이들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를. 그런데 왜 지금껏 아마도 그 여잘 꺼내 주려 하지 않았지? 왜 이런 곳에 가둬 두고 소원이나 빌고 있는 거지 

 

예나는 구멍에 갇힌 여자를 꺼내 주고 싶었다

예나가 잘게 찢은 종잇조각에 불을 붙여 그것을 구덩이 아래로 떨어뜨리자, 가만히 지켜보던 솔히도 곧 따라 했다.

 

하수구 아이-나 푸름 

그 애가 학교 후문 근처에 있는 하수구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그곳이 그 애의 집이라고 말했다.

 

말이 되지 않았고, 퍽 잔인하기까지 했지만, 아이들은 그 소문을 재밌어했다. 그리고 소문이 시들해질 정도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 애가 사라졌다.

 

그날 밤, 엄마는 한밤중에 잠든 나를 깨웠다. 그 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나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엄마는 내가 아는 사람의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다고 생각한 듯, 혼자서 장례식 장에 갔다. 그러나 내가 두려워한 것은 할머니의 죽음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장례식장에 갔다가 반 아이들이 우리 사이를 알게 될까 두려웠던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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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서울 2 - 선악의 충돌
김민우 지음 / 북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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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멸망했고 살아남은 인류는 전 세계에 열두 개의 도시를 재건했다. 한반도에는 신서울이라는 도시가 지어졌고 그곳에 세계 멸망의 해야 한 소녀가 태어난다. 그녀가 태어난 도시와 같은 이름을 가진 신서울양은 17세가 되었고, 인공지능의 통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신서울에서 태어난 그 소녀는 가녀린 몸에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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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사실을 감안해 보더라도 모든 생명체의 역사는 태초부터 여전히 '생존하는 것'에 가장 큰 의의를 둔 것, 과학의 잔재가 현역으로 살아 숨 쉬는 지금은 잠시 그 모습을 살며시 감췄을 뿐이지 기본적인 근본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어떤 위대한 과학자로부터 분리되어진 내가, 제법 풍부한 지식들을 비롯해 직접겪어봐야지만 채득할 수 있는 귀중한 세월의 경험을 가득히 갖추게 된 건 나름의 행운의 작용이 뒤따른 일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온갖 기이한 변화로 가득차게 된 현 세상의 흐름을 섣부른 예단을 불허하게 했다.

 

기준에 있어서 전환점을 맞고 있는 세대가 어떠한 바람을 이끌어낼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인간의 변화과정이 늘 긍정적인 변화를 보인 것만은 아니란 것을 지난 역사가 또렷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신서울의 진한 검은 눈동자가 무저갱이처럼 깊어졌다.

 

잠시 세계가 멈췄다.

서울은 자신의 구체적인 개입이 없이 이뤄지고, 심지어 변화까지 꾀하려는 기적의 능동적인 움직임에 스스로가 발현의 주제임에도 진한 생경함을 느꼈다.

 

어둠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던 나의 내면 공간에 새싹이 움터나는 따스한 봄이 찾아온다. 이어서 무더운 열기를 품은 엶이 찾아왔고, 천고마비의 신선한 가을을 지나 언젠가 꿈에서 목격했던 새하얀 겨울로... 네 개의 계절은 신서울의 말라비틀어진 토영을 바로잡으며..

 

필연적인 죽음에서 영영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신서울을 지배 중인 벨루가의 창립 권력자들의 가장 커다란 필생의 목적이고 영생이란 과실은 지성을 가진 이 세상 모든 생명체의 궁극적인 소망일 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관망만을 하는 행위는 너무나도 편하고 간단한 일이었다. 당연했던 나의 권리를 영영 찾지 못하게 되더라도, 혹환의 환경으로 변모한 바깥세상으로 내몰려 진짜 지옥 속을 나 뒹굴 바에야 차라리 조금 구차해도 따뜻한 도시 안에서 삶을 연명하는 편이더 나은 삶에 틀림이 없었다.

다른 선택지란 없다. 그것만이 나를 안전히 지켜낼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 세상은 참으로 경이롭다. 어떤 신비의 작용에 의해서인지 무수히 많은 서로 다른 생명체들을 한곳에다 조화시켜놓고, 각자의 상호작용을 통해 사건의 진행을 이루며 불확실한 미래를 써내려갔다.

 

우리의 삶이 영원했더라면 절대 알 수 없었을 소중한 긴 고통의 반복 끝에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겨우 찾아낸 가장 귀한 그것을 이리도 한심하게 잃고 싶지 않았다. 그것마저 잃어버리게 된다면 텅 빈 인형과 자신이 다를 바가 무에 있겠는가.

 

도시 신서우에서 인조생명체 신서울에게 주어진 역활은 처음부터 오직 그들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언제든 마음대로 소모해도 좋은 실험체의 배역이 전부.

 

신서울은 그러한 일관적인 모습을 대충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자신 또한 그간 반복되어져 왔던 수많은 기억을 반강제적으로 되찾게 됐음에도 크게 변함이 없는 이 시간의 신서울로서의 그대로의 존재를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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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서울 1 - 멸망한 세상
김민우 지음 / 북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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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멸망했고 살아남은 인류는 전 세계에 열두 개의 도시를 재건했다. 한반도에는 신서울이라는 도시가 지어졌고 그곳에 세계 멸망의 해야 한 소녀가 태어난다. 그녀가 태어난 도시와 같은 이름을 가진 신서울양은 17세가 되었고, 인공지능의 통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신서울에서 태어난 그 소녀는 가녀린 몸에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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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17세가 되는 소녀가 있다.

신서울 중심에서 태어난 처음이자 마지막 세대.

소녀를 탄생시킨 자는 소녀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지명과 같은 이름인 '서울'을 붙여줬다. 신씨의 성까지 더해 신서울.

 

...., 우울하고 우울하다. 요즘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로 시간을 보낸다. 눈이 닿는 곳 어디든 백색의 공간뿐이라 움직이고 싶다는 의욕부터가 완전히 상실된다. 무엇보다 지독한 '외로움'이 신서울양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신서울은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도 긍정적으로 몸의 통증을 받아들였다. 고통은 자신이 폐기 되지 않았다는 직접적인 증거, 생동감의 표현이자 가장 명확한 방식을 가진 현실의 표기방식이었다.

 

매일같이 되뇌이고, 되뇌인다. 나의 변화에는 정해진 한계가 없다. 생각을 좁히지 말자.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를 초월하자. 자신이얌날로 여태 만들어지고 보여줬던 이 세계의 중심이었다.

 

연약한 소녀의 강직한 마음을 이해하기에 안젤라의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부끄럽다. 새장 속에서 악의에 갇혀 지내야만 했던 어리고 나약한 저 아이조차 앞으로 이어질 삶의 방향성을 추구하고자 쓰러지지 않고 바로 섰다. 제 턱 끝까지 다가온 죽음을 비웃고서 살아남았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

신서울의 상태를 점검하던 군의관 박형태 대위는 그녀의 비밀을 고작 겉면으로나마 조금 파헤쳐보는 정도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시 속에서만 갇혀 지내던 '신서울 양'이 이제야 막 이해하기 시작한 인간의 감정은 이 세상, 아니 이 우주상 유일하게 무한이라는 단어가 허용이 가능한 만큼의 그 끝을 알 수 없는 신비의 집약 체였다.

 

그녀는 이들이 겪었다는 고된 삶과 역사를 머리로만 어느 정도 이해했을 뿐이지 자신이 직접 겪어보지는 못했다. 제아무리 관련 지식이 풍부하다고 해도 지옥의 수라장을 해쳐나온 사람들에게 그것을 겪어보지도 않은 자신이 옳고 그름을 멋대로 지정해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유'를 표방할수록 개인의 행동에 간섭할 이념의 다듬질이 미약해지거나, 한정적인 강렬함밖에는 보유할 수 없게끔 강제로 꾸며지는 것이다.

 

비상해진 머리로 상황의 해석을 마친 신서울의 얼굴 위로 짙은 수심이 어린다. 나로 인해 죽음을 택해야 하는 저 사람들의 상황이 너무나 가엽다. 심지어 난 당신들이 바라 마다치 는 구원자가 사실 아닌데, 대체 내가. 당신들이 품은 이념이 뭐라고...

 

단적인 예로 분명 모두의 희망책으로 시작했지만, 억압받는 최악의 도시로 전략하고만 도시 '신서울'이 그들이 직접 만들어 이룬 탐욕의 결과물 중 하나였다.

 

도시를 탈출하고부터 김교수가 보관 중에 있던 지식들을 불쑥 멋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진화를 거듭한 그녀는 도시에 있을 때처럼 인형의 무지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의 자존감을 확립한 상태였다.

그런데 남들과 똑같은 '인간'이라 여겼던 자신이 알고 보디 우리가 흔히 쓰는 제품들과 다를바가없는 신세였다니..

본인이 느낄 충격의 크기는 타인으로서는 절대로 헤아리기 힘든 공포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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