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
김지윤 지음 / 팩토리나인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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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남동 골목길에 자리 잡은 빙굴빙굴 빨래방. 언제부턴가 빨래방에 온 손님들은 테이블에 놓인 연두색 다이어리를 통해 각자의 고임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는다.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모르는 사람들이 빨래방에서 만나 서로에게 위로를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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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 깔끔하면서도 정감 가는 글씨체가 박힌 간판이었다. 그 위에 노란 할로겐 등이 한 글자 한 글자를 아늑하게 비추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 것만 같아서 글을 적어 준 게 누구든 감사했다. 그동안 혼자만 듣는 메아리 같았던 자신의 목소리에 누군가가 반대편에서 '너의 목소리를 내가 듣고 있어.' 라고 말해준 것 같았다.

미라는 화분을 키워 식물이 자신을 가꾸는 듯한 경험을 해보라는 조언을 곰곰이 생각했다.

 

"돈이 뭐라고, 그게 참 사람을 힘들게 한다, 진돌아."

벤치에 앉아서도 계속 미라네 식구들 걱정을 하며 장 영감이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 진돌아."

빨래방에 남은 미라는 나희를 꼭 안았고 우철은 뒤놀아 눈물을 삼켰다. 자존심 때문인지 가장이라는 무게 때문인지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하준이 테이블에 앉아 연두색 다이어리를 펼쳤다. 자신이 써놓았던 고민 아래 '같이 걷자'를 불러보라고 적혀 있는 글을 보니 어젯밤에 보았던 여자가 떠올랐다.

 

묵직하고 투박하게 써 내려간 문장들로 하준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건조기가 종료되었다는 알림음이 울리고 자신의 빨래들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설레는 마음은 남겨 둔 채로.

 

빨래방에 발을 들이자 끓던 속이 차분해졌다.

이곳에 오면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 얼룩이 졌으면 어때. 내가 다 깨끗하게 지워 줄게.'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만큼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두 분 모두."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듣는 위로가 이렇게 큰 힘이 될 줄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 더 빨리 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의 다이어리를 펼쳤을 것이다. 그 위에 한 글자 한글 자 고민을 눌러썼을 것이다.

 

올 때와는 달라진 연우였다. 스스로 세탁기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새로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배신감과 쓸데없는 자책감이 달라붙어 있는 검정 원피스를 입은 채 축 쳐진 연우는 없었다.

 

"나가지 말라고 말씀드렸어요. 길 미끄러워요. 그 빨래방은 무슨 동네 사랑방이에요? 맨날 먹을 거 갖다 놓고 나눠 먹으면서 친목 도모하게. 사람들 참 시간도 많아, 또 그런 위험한 일에 휘말리면...'

 

"위험했지만 범인도 잡았고, 세웅이라는 총각은 그 길로 꿈도 찾아서 경찰 고시도 준비하고 있어, 세웅이라는 청년은 너한테 흉터 치료를 받은 뒤로 다시 거울도 보고 웃기도 하더구나. 이제야 비로소 사람답게 살고 있다고. 거기는 그냥 빨래만 하러 가는 데가 아니야."

 

발길이 멈춘 곳은 공원 길 끝자락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이었다. 따뜻했다. 아무도 없는 빨래방의 고요 속에 세탁기 한 대만 하얀 거품을 만들어내며 철썩 철썩 파도 소리를 내며 돌고 있었다. 커피 머신 옆에서는 장 영감이 새로 가져다 놓은 대추 쌍화탕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쌍화탕은 진한 갈색 빛을 띠었다. 병 너머로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것 같은 대추 냄새에 대주가 인상을 찡그렸다.

 

대주가 여러 사람이 매만져서 손때가 묻은 연두색 다이어리를 처음부터 펼쳤다. "배고프다." "지루하다." 같은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고민 밑에도 장 영감의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 진중한 글씨체에 눈물이 났다. 아버지는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고민을 함께 열심히 고민해 주고 있었다. 아버지는 여기에 올 거리를 만들기 위해 묵은 이불을 꺼내고, 쌍화탕을 만들고, 한파주의보에도 진돌이의 가슴 줄을 쥐고 그 얇아진 모습을 하고 이곳에 왔던 것이다. 아버지는 외로웠던 것이다.

 

철썩 철썩. 대주의 등 뒤에서 돌고 있는 세탁기가 파도 소리를 냈다. 멈추지 않는 파도 소리에 기대어 대주가 목 놓아 울었다.

 

"누구나 목 놓아 울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다가 필요하다. 연남동에는 하얀 거품 파도가 치는 눈물도 슬픔도 씻어가는 작은 바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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