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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독서>를 읽으며

책은 끼니다..
끼니는 바빠서 대충 때우기도 하고 간혹 건너뛰긴 할지라도
매일 끼니를 굶고 살 순 없듯.
독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굶으면 약체가 되거나 결핍이 생길듯..
밥 먹듯 책을 읽으리..

10/20일
P239ㅡ
"책을 읽는 행위는 눈으로 글을 읽으면서
머리로는 영상을 만드는 작업이다."
...
상상력의 부재를 경험할 때마다 독서부재를 깨닫는 이유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을 먼저 읽는 이유다.

P255ㅡ
"책 읽기가 싫고
습관이 들지 않았다."

... 완전 공감.
내가 살면서 외롭지 않은 이유도 독서다. 독서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생활들을 소신 있게 살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습관 맞다. 책은 안 읽으면 진짜 외로우니까. 지성들과 차단된 기분, 지성들에게 왕따 되는 기분, 어쨌든 책을 읽는 순간 소통되는 기분을 느낀다. 그래서 습관처럼 맛집을 찾아 맛있는 음식을 먹듯 좋은 책을 골라 읽는다. 신체를 위해 건강식을 하고 시간과 돈을 들여 운동을 즐기듯, 내 마음과 지성과 영혼의 건강을 챙기듯 시간 돈 정성을 들여 좋은 책을 엄선해 독서한다. 그래서 내게 독서는 식사다.

...
아이들이 중학교 다닐때까진 .유럽의 교육. 같은 책을 읽어주면 아이가 잠들곤 했다. 조용해서 자나 싶어 잠자리를 살짝 빠져나오려고 하면, 안자 계속 읽어..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이젠 늦었으니 내일 읽자 라고 끊은 적도 있었으니..
그러던 아이들이 요즘은 엄마품에 안겨 책이야기를 듣는 대신 스마트폰을 안은채 잠잔다.
요즘 아이들이 외로움을 지적인 갈증으로 채우기보다 스마트폰이 주는 이미지와 다채로운 것들에서 대신하는 듯. 그러니 책이 싫고 습관이 되는 것은 물건너 가게 될지도 모른다. 나도 책 읽는 시간보다 스마트폰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고 있다. 자제하고 스마트폰 대신 책을 가까이 하리..

P400ㅡ
"다행이 아직 늦진 않았다."
서민 독서를 읽으며 다짐해본다. 책읽기를 이 핑계 저 핑계로 건너뛰고 미루고 게을리하는 걸 이젠 반복해선 안되겠다고 통렬히 각성한다. 일부러 매일 시간 내서 배 고플 때마다 잘 챙겨 읽고 심심할 때마다 군것질 해대듯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을 시시때때로 기억해야겠다. 운동,독서, 식사는 나를 존재하게 하는 기본 요소임을 각인하고.

즐겁고 유의미한 독서였다. 읽어야 할 책이 이렇게 많은데... 추천 책 중 제일 먼저 읽고 있는 책은 남경태 저서들이다. <서민 독서>를 재독하면서 여기 추천 도서들을 체크해나가면서 고전에도 재도전 해야겠다. 더 늙기 전에...
20일 금욜에 1회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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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불온한가]에서 김규항 선생님은 "예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하셨다. 예수는 무슨 꿈을 꾸셨으며 어떤 삶을 산  분이셨기에 믿으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걸까? 그러나 진작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에 관해선 대부분 역사를 통해 다듬어지고 정리된 예수상이다. 특히 기독교에서 강요하는 교리 안에 갇힌 예수 믿기란 때론 불편할 때가 많다. 그런데 [예수전]에서 기존 교회에서 얘기되는 예수님에 반해 예수님이 사셨던 시대적 배경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갈 수 있다. 아울러 예수님이 꿈꾸셨던 세상과 그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역사를 알게 되면서 지금 제국주의 미국을 등에 업고 전쟁을 일삼는 잔인한 전쟁국가 이스라엘에 대해 아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예수님이 바라는 새로운 세상이란?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지속적으로 하셨던 사회비판이란 그 시대 지배체제가 허용하고 수용 가능한 개혁의 차원이 아닌, 그 시대 인민들이 겪는 억압, 가난,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예컨대,  사회체제를 고치는 개혁이 아니라  체제 변혁을 뜻한다.   

2000년 전 예수님은 갈릴래아, 사마리아, 이스라엘의 지배체제가 인민들에게 가난과 억압과 고통을 지속적으로 강요하는 걸 변혁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사회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본주의의 극한치인 신자유주의체제가 갖는 근본적인 문제점은 예수님이 꿈꾸시던 사회주의의 변혁만이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열쇠라고 볼 수 있다.  1930년대 대공황과 1979년, 2009년 자본주의가 겪는 주기적인 공황을 본다면 자본주의는 인민들이 열심히 일할 수록 고통과 불안과 가난으로 신음하게 만들어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책에서 폭력, 비폭력에 대한 글을 옮겨 본다.
<< 예수는 오히려 폭력에 매우 익숙한 사람이었다.  

갈릴래아에선 크고 작은 봉기가 셀 수 없이 일어났다.
예수는 그런 현장을 외면할 수 있는 특권계급이 아니었다.
예수가 형 혹은 삼촌이라 부르던 사람들이 무수히 죽어 갔고 나중엔 친구와 동생들이 죽어 갔을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오늘 이스라엘로부터 압살당하는 팔레스타인 점령 지구의 청년들과 같다.

그들이 비폭력을 지향했던 건 분명하나, 폭력의 현장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폭력은 나쁜 거야’라고 설파하는 한심하고 염치없는 비폭력주의자들이 아니었다는 건 더욱 분명하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폭력주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싸움질을 벌여 파출소에 잡혀 온 동네 양아치도 자신은 싸우고 싶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끊임없는 침략전쟁을 벌이는 제국주의자들도 전쟁이 싫지만 ‘악의 세력에 저항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세상에 비폭력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없는데 온 세상이 폭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비폭력주의는 무엇인가?  

 

비폭력주의는 오로지 폭력의 현장에서만 주장될 수 있다.

제국의 미사일 공격에 제 새끼가 찢겨 죽은 어미가 죽음보다 더한 슬픔을 뚫고 ‘우리는 똑같은 폭력의 보복을 해선 안 된다’고 말할 때 우리는 누구도 그 말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폭력의 현장에서 멀찍이 떨어져 1년 내내 뺨 한번 맞을 일 없는 사람이 점잖은 얼굴로 ‘저항으로서 폭력도 폭력이다’라고 뇌까리는 건 참으로 몰염치한 짓이며 폭력의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폭력보다 더 끔찍한 폭력이 된다.  


비폭력주의의 목표는 ‘비폭력’이 아니라 ‘저항’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예수는 결코 안온한 예배당이나 연구실에서 비폭력론을 주장하지 않았다. 예수는 언제나 폭력의 현장에서 그 폭력을 몸으로 감당하며 비폭력으로 저항했다. ‘20세기 비폭력주의 운동의 대명사’라 일컬어지지만 일각에서는 인도 ‘민족’에 집착하여 인민들의 정당한 투쟁을 훼방한 사람으로 비판받기도 하는 간디조차 ‘무기력하고 비굴한 비폭력보다는 차라리 정당한 폭력이 낫다’고 말했다. 비폭력주의는 폭력적인 투쟁 방법을 넘어서는 투쟁 방법이지 폭력적인 투쟁 방법에도 못 미치는, 투쟁의 정당성은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유약한 인텔리들의 요사스러운 말장난이 아니다. 진정한 비폭력주의자들이 결국 폭력에 희생당하는 운명을 갖는 건, 지배체제가 그들에게서 무장투쟁을 선택한 운동가들보다 오히려 더 큰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다. 237,8,9쪽>>  

 

'성전 성화' 사건에서.. 

181,182쪽..<< 그러나 예수 당시의 성전이 단지 종교적 의미를 넘어 지배체제의 핵심이었다는 사실에서, 예수의 태도를 전 사회적 영역으로 확대해 보아야만 한다. 예수는 억압의 사회체제가 피억압자들의 비굴과 무기력에 힘입어 유지된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앞서 말했듯 인민들은 성전의 실상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저것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다.", " 하느님은 저곳에 거하시지 않는다"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침묵했다. 그리고 그 침묵엔 예의 순진함 외에 '세상이 다 그런 거지' 하는 비굴과 무기력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대개 어떤 불의한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힘이 전적으로 그 체제의 지배세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곤 한다. 이를테면 1970년대 한국의 군사 파시즘 체제를 유지하는 힘은 전적으로 박정희 패거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민은 다만 그 포악한 체제의 일방적 희생자로 묘사된다. '박정희 군사 파시즘에 신음하던 인민들.' 그러나 그 시절 대개의 인민들은 '신음'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이 다 그런 거지','사람이 하는 일인데 완벽할 수야 있나' 하며 제 식구들 챙기며 오순도순 살았을 뿐이다. 불의한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더 근본적인 힘은 바로 인민들의 비굴과 무기력이다. 사실 제아무리 포악하고 강한 사회체제라고 해도 대다수 인민들이 한꺼번에 거부의사를 표시하면 당장이라도 맥없이 무너지게 되어 있다. 

 

예수는 수많은 인민들 앞에서 그들의 비굴과 무기력을 일깨우는 것이다. 결국 예수의 '난동'은 침묵하는 억압의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는 장엄한 퍼포먼스였다. 지배자들은 그 퍼포먼스를 통해 하느님의 권위로 은폐된 그들의 썩은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인민들은 '인민들의 순진함'으로 가려진 제 비굴과 무기력을 비로소 되새기며 인간적 위엄을 회복할 채비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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