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 우리시대의 논리 2
하종강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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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왕의 남자>를 보면서 왜 30년 전의 이 일이 생각났을까요? 줄 타는 광대는 손에 부채 하나만 달랑 들고 줄 위에 올라갑니다. 그런데 이 광대의 부채는 언제나 광대의 몸이 기울어지는 반대편으로만 펼쳐져야 합니다. '나는 이쪽저쪽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항상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중립을 유지할 거야'라고 똑똑한 척하며 부채를 가운데로만 펼쳤다가는 바로 줄에서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17쪽

우리 사회에 범람하는 양비론이 대부분 옳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양쪽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양비론은 공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했다는 만족감을 줄 뿐, 무책임할 때가 많습니다. 바늘 끝만큼이라도 옳은 편이 있다면 그 편을 들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쪽저쪽 그 어느 편도 들지 않는 것'이 점잖은 교양인이 갖춰야 할 '중용'의 미덕인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바늘 끝만큼이라도 옳은 편에 서되, 지나침이 없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 조상들이 가르친 중용의 미덕입니다.-17쪽

한 쪽은 막강한 자본과 권력으로 무장한 자본가들이고 다른 한 쪽은 맨몸뚱어리밖에 없는 노동자들인데 그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성실한 인품의 인사노무 관리자들이 회사 입장에서는 충신이지만 역사 앞에서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사회 전체가 경제에 '올인'하는 분위기에서, 다른 장관들이 모두 천편일률로 기업적 사고를 하는 나라에서 노동부장관조차 중립적 입장에 서겠다? 그것은 결국 강한 쪽을 편들겠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은 어느 쪽으로 펼쳐지는 부채인가?' 항상 그런 고민을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18쪽

우리 노사관계는 절대로 동등하지 않습니다. 정치인이 단식을 하면 기자들이 단체로 몰려가고, 전직 대통령까지 찾아가 "단식하면 죽는다"는 훌륭한 가르침을 주었다고 언론이 시시콜콜 보도합니다. 그러나 노동자가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가 100일 넘게 고독과 싸우며 농성하고, 10년이나 묵은 해고 때문에 노동자들이 굴뚝에 올라가 목숨을 건 농성을 두 달이나 하다가 그 굴뚝에서 새해를 맞아야 하는 일이 벌어져도 우리 언론은 별로 주목하지 않습니다.
-34쪽

"노사 대립으로 국가 경제가 위태롭다고 한탄하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책임 전가에만 급급한 한국적 현실" 따위의 표현은 노사가 평등할 때에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외국의 성공적인 노사 화합 사례를 소개하면서 "소유와 경영을 독점하려는 자본가나, 자기 권익만 찾는 노조에 새로운 영감을 던져 준다"고 함부로 결론 맺을 일이 아닙니다. 양비론은 대부분의 경우에 옳지 않습니다.-34쪽

강한 존재와 약한 존재가 대립하는 갈등 구조에서는 대개 약한 쪽의 권리가 강화되는 것이 사회정의에 부합할 때가 많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대립할 때처럼("인사. 경영권까지 간섭하는 대기업 노조가 약한 존재인가?" 라는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대부분 대기업 노조도 자본과 맞서는 관계에서는 약자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 소수의 노조가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 구조에서는 비정규직의 권리가 보호되는 것이 사회정의에 부합한다.-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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