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기조는 이스라엘은 남한이고 팔레스타인은 북한이라는 식의 대비를 전제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해법을 풀어가는 데 있었다. 평화를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의 테러 분자들이 위협하기 때문에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할 때에만 중동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네타냐후의 지론에 젊은 정치학자도 맞장구쳤다.그러나 오늘처럼 악화 일로를 걷는 사태는 바로 그와 같은 생각이 빚어낸 것이다. 힘에만 의존하면 상대방과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17쪽
유대인으로서 프랑스에서 활동하다가 얼마 전에 사망한 철학자 레비나스(E. Levinas)는 "나는 타자의 인질이다"라는 윤리의 원칙만이 타자가 자신을 제약하는 것으로만 보는 정치를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해결, 또 이제 막 화해의 장이 펼쳐지는 한반도의 평화정책과 통일도 타자가 나와 관계없는 존재-영.독.불어에서는 이 말을 자주 쓰지만(That's none of my business: Es geht mich nichts an; ll n'est 갸두 pour moi)-가 아니라, 상생(相生)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과 철학이 자리잡지 않고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18쪽
어릴 때부터 미국이나 일본 지향적인 교육만 받아온 데다 문화적인 자기 정체성에 대해 별로 고민하지 않고 성장한 탓에 제3세계라는 말만 들어도 '야만', '무지', '가난' 같은 표상만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한국 유학생들이 그렇게 반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 서구와 같은 '타자'는 내가 지향하고 동일화할 대상이지만, 제3세계는 그야말로 '악한 야만'이기에 배척받아야 할 대상으로서 '지배의 환영(幻影)'속에서만 그 모습이 드러날 뿐이다.-19쪽
북에서는 항상 '남.남 협조'-제3세계만의 상호 협조-를 강조하는 데 비해, 남은 이보다는 선진국 대열에 동참하고 이들 나라와 관계를 개선하는 문제를 경제와 외교, 사회와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제일차적 과제로 보고 있다. 가난한 나라와 장사해 보아야 별로 생길 것이 없다고 여겨서 그런지 모르나, 그런 자세로 매사에 임하다 보니 너무 많은 문제가 나타나는 것 같다. 비근한 예로 동남아 출신 노동자들이 당하는 설움과 분노의 기록을 볼 때마다 나는 얼굴이 달아오른다. 이렇게 '타자'에 대한 이해 없이 세계로 나아가 보아야 느는 것은 갈등과 충돌뿐이다.-19쪽
얼마 전 뉴욕에서 강연이 있어 한국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업을 하고 있는 맨해튼 34번가에 들러 한국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는데, 식당 앞에서 노조원들이 구호판을 앞세우고 전단을 뿌리면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동행했던 사람에게 물으니, 동포 업주들이 라틴계 불법체류자들을 채용한 뒤 최저 임금마저 주지 않고 부려먹기 때문에 노조의 공격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20쪽
남북 정상회담 이후 화해의 분위기가 높아가고 있다. 그러나 남북 주민이 어울려 살 때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지금부터라도 '타자'와 공존하는 삶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헤겔이 '타자'를, 이 '타자'가 지니는 '차이'를 '인정(anerkennung)'하는 원칙으로 내세운 '연대적 직접성으로서의 간주관성(間主觀性)'을 떠올리게 된다. 나와 '타자'가 연대하기 위해서 관점의 차이를 바꾸어 볼 수 있는 관용 없이는 '타자'는 정복과 파괴의 대상으로만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20쪽
문화의 통일성과 다양성 사이의 긴장
문화가 "한 민족의 모든 삶의 표현에서 나타나는 예술적 양식의 총체성"이라는 니체의 정의는 분명 문화가 지니는 통일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문화 자체의 기능도 분화했을 뿐 아니라 역사적인 정황에 따라, 또 여러 문화 간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인해 다원화 되고 있다. 영미권에서는 주로 통용되는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문화의 통일성과 다양성 사이에 놓여 있는 긴장이 최초로 하나의 종합을 이룬 상태는 이른바 '고대 문명'-이집트, 그리스, 중국 등- 이라고 볼 수 있으나, 그러한 종합도 산업화와 더불어 새로운 긴장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221쪽
여러 민족성원이 이주해서 함께 살고 있는 미국, 오랫동안 식민지를 지배한 경험 때문에 타민족과의 공존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영국이나 프랑스, 이들에 비해 타민족과의 공존을 경험한 시간이 아주 짧거나 굴절된 독일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만 보아도 문화의 통일성과 다양성이 안고 있는 긴장에서 파생하는 문제의 심각성은 분명하며, 이에 따라 '문명충돌'까지 야기되는 상황이다. 최근까지도 독일에서는 '주도문화(主導文化, Leitkultur)'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수많은 논쟁이 야기되었다. -221쪽
이는 독일에 이주한 외국인 노동자들-특히 이슬람 문화권에서 온-도 독일의 주류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시리아 출신 정치학자 티비(B. TiBi)의 주장에 보수적인 기민당(CDU)이 적극 호응해서 이를 당의 외국인 정책의 근간으로 삼으려는 데서 파생한 논쟁이었다. 문화의 다양성을 내세우는 '다문화주의'에 대하여 문화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이러한 입장은 영미의 문화적 맥락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민족 이해에서 특히 혈연적. 문화적 동질성을 강조해 왔고, 한 민족의 가치를 그들의 유일무이한 특성에서 찾는 역사주의적. 낭만주의적 전통이 강한 독일에서는 아직까지도 당연시하고 있다. -222쪽
단일민족임을 항상 강조해 온 우리의 문화 이해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문화가 지니는 다양한 속성에 대한 이해에 상당한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동남아 출신 노동자, 심지어 같은 민족성원이라는 조선족에 대한 비인간적인 태도가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222쪽
'타자'에 대한 이러한 무지와 경멸이 '우리 안의 파시즘'의 한 모습을 드러내주는 것임은 틀림없으나, '타자'라고 하더라도 가령 미국이나 서구 또는 일본은 대부분의 경우 분명히 달리 대접받고 있다. 이들은 멸시해야 할 '타자'가 아니라 무조건 따라 배워야 할 선망의 대상인 '타자'인 것이다. 따라서 '타자'에 대한 무지와 자기 중심적인 문화가 낳은 '우리 안의 파시즘'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비화와 자기 상실을 끝없이 재생산해 온 '우리 안의 사대주의'도 진정한 의미에서 '타자'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며,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도피이기는 마찬가지다. -222쪽
루소(J. J. Rousseau)는 언어의 기원과 관련하여 "인간을 연구하려면 자신의 주위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만약 인간 자체를 연구하려면 시야를 먼 곳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며, 자신과의 '분리(detachment)'가 인류학의 진정한 출발임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분리' 속에서 등장하는 '타자'는 구별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내 속에 완전히 용해된 것도 아니고, 구별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나와 완전히 격리된 것도 아닌, 상호 연계된 긴장의 구조 속에 있다고 메를로 퐁티(Merleau-Ponty)는 보았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같음[同]'은 '다름[異]'이 있어야 드러나고 다름은 같음이 있을 때 드러난다는 원효(元曉)의 <금강삼매경론>의 사상과 맥을 같이한다. -223쪽
민족문화의 통일성과 다원성 사이에 긴장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같음 속에 다름이 있고 다름 속에 같음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긴장 없이는 우리가 종종 보편적이라고 느끼는 문화나 예술-대개 뉴욕이나 파리, 도쿄에서 시작된-을 그대로 재생할 수 있다고 믿거나, 이와는 정반대로 그러한 문화나 예술을 애당초 우리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 애써 폄하하려는 태도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223쪽
그러한 긴장을 예술이라는 범주 속에서 가장 분명하게 전달한 사람으로 우리는 먼저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라는 이름을 떠올리게 된다. -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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