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 사회의 허구성 비판의 압축형이 바로 ㅡ수저론ㅡ이다.
그러나 이미 왜곡된 능력주의 사회 구조의 덫에 갇힌 개인으로선 사회에서 인정되는 더 많은 ㅡ능력ㅡ을 갖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게 현실이다.
미국에서 ㅡ명문대에 입학하는 길은 우편번호에 달렸다ㅡ는 말은 한국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우리 국민의 90%가 ㅡ특권 대물림 교육이 심각하다ㅡ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불공정한 학벌 전쟁은 사회적 자본을 축적한 기득권층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통해 사회ㆍ경제적 신분의 하락을 막으려 만들어놓은 방지 장치다. 불공정한 대학 입학 제도와 인맥ㆍ연줄이 중요한 인턴제도 같은 기득권층의 ㅡ기회 사재기ㅡ가 계층 이동을 막는 유리 바닥을 만들고 있다고 리처드 리브스는 ㅡ유리 바닥 ㅡ이란 개념을 제시한다.

ㅡ기회 사재기ㅡ는 ㅡ스펙 품앗이ㅡ다. 상위 20%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기들 간의 인맥을 최대한 활용해 자녀들의 스펙을 만들어주는 걸 말한다.
조국 사태 때 조국 지지자들은 ㅡ다들 조국처럼 살아왔는데 왜 조국만 때리냐ㅡ고 항변했다. 이게 바로 ㅡ1 대 99의 사회ㅡ라는 프레임의 함정이다. 상위 20% 밖의 사람들에겐 그렇게 할 기회조차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제적 불평등이라고 하면 신자유주의나 자본주의를 원흉으로 지목한다. 그러나 불평등의 해소나 완화를 목표로 삼는다면 오히려 정치적 불평등이라고 보는 게 진실에 가깝다. ㅡ조국 사태ㅡ는 그런 문제의식을 의제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정치권, 언론, 아니 일반국민들까지 ㅡ친조국이냐, 반조국이냐 ㅡ 하는 정파적 이전투구로 그 좋은 기회를 탕진하고 말았다.
진영 논리가 ㅡ개혁과 불평등 해소ㅡ를 죽인다. ㅡ부를 물려받지 못한 청년, ㅡ불평등ㅡ 수령에 빠지다ㅡ는 기사를 비롯해 좋은 시도가 있었지만, 대부분이 다 동의할 수 있는 개혁을 제쳐놓고 그걸 향해 가는 과정에서 이견 차이에 집착했다.

ㅡ진영 논리ㅡ를 깨지 않고선 그 어떤 개혁과 불평등 해소도 기대하기 어렵다. 진보 언론에서 노조를 비판하거나, 보수 언론에서 노조 탄압을 비판하는 기사를 볼 수 없듯이 진보는 ㅡ친노조ㅡ, 보수는 ㅡ반노조ㅡ라는 이분법은 완강하다.
386세대는 이미 기득권층임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헤게모니에 도전장을 내밀면 참지 못한다. 즉 젊은이들에게 짱돌을 던져라고 해놓고선 짱돌이 자신을 향해 날아올 때 참지 못한다.

진보 언론은 탈원전에 대해 무조건 찬성, 보수 언론은 무조건 반대를 한다. 보수가 내민 이유에 진보는 반박하지 않는다.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게 좋을 법한데도 말이다.

ㅡ공정으로서 정의ㅡ를 거부한 진보 진영은 이분법이 불가피할 때가 있더라도 개별 사건을 그 사건 자체로만 보지 않고 진영의 관점에서 재해석해 평가한다. 대국적 종합적 총체적 장기적 미래지향적 등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면서 강조하는 것은 반대 진영이 얼마나 어리석고 흉악한 집단인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진영 내부에서 아무리 옳은 지적을 하더라도 그것이 당장 반대 진영을 조금이라도 이롭게 하는 것이라면, 그 문제 제기자는 용납해선 안 될 ㅡ내부의 적ㅡ이 되고 만다.

이는 전혀 공정하지 않다. 공정이란 무엇인가? 존 롤스는 어떤 갈등 상황에서 무엇이 공정한지를 평가할 때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게 어렵거나 번거롭다면 아예 그 어떤 입장도 갖지 않는 ㅡ원초적 입장ㅡ이라는 가상의 세계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그런 원초적 입장을 갖는 데에 필요한 건 ㅡ무지의 장막ㅡ이다.

ㅡ무지의 장막ㅡ은 롤스가 자신의 입장이나 역할을 배제한 채 무엇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는지를 상상해보라는 의미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무지의 장막이 쳐진 상태에서 사람들은 누구도 상대의 능력, 재산, 신분, 성 등의 사회적 조건을 알 수 없다. 롤스는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떤 계층에 특별히 유리하거나 불리하지 않도록 조화로운 사회계약을 체결할 것이라며, 그렇게 합의되는 일련의 법칙이 정의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롤스는 정의를 고민하는 올바른 방법은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황에서 어떤 원칙에 동의하겠는지를 묻는 것이다. 롤스는 ㅡ정의가 무엇인가ㅡ라는 물음에 공정한 절차에 의해 합의된 것이면 정의로운 것이라는 순수한 절차적 정의관을 내세웠다고 본다.

조국 사태에서 김경율은 ㅡ조국이라는 이름을 지운다면 이런 상황에서 버틸 사람이 있었을까. 그런데도 시민단체, 집권 여당은 제대로 비판 한 줄 내지 않았다 ㅡ고 했다. 이름을 지우고 생각하는 게 바로 ㅡ무지의 장막ㅡ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조국에게 제기된 온갖 의혹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조국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다른 사람, 특히 반대편에 속하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넣었을 때에도 별 문제 없다고 생각했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진보는 ㅡ무지의 장막ㅡ을 거부하고 다른 이유들을 ㅡ조국이기 때문에ㅡ 수호해야 한다는 자세를 취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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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의 장막으로 진보의 문제점을 성실하게 납득할 수 있도록 얘기하고 있다.
오늘은 여기까지ㆍㆍㆍ

이 책은 우리가 더 늦기 전에 읽고 현명하고 합리적 이성으로 현실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하기때문에 꼭 일독이 필요하다.
그래서 진지하게 자기성찰을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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