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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긋는 남자 - 양장본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난 책을 좋아해서 무지 아끼는 편이다. 그래서 책에 낙서는커녕 책을 쫙 펼쳐서 읽지도 못한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그 정도가 심하다. 그런데 책에 밑줄을 긋는 남자라니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도 안 되는 행동이다. 책에 낙서조차 겁을 내는 내가 이 책을 손에 들었다. 그 남자는 왜 책에 밑줄을 그어야만 했을까 싶어서였다.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콩스탕스는 서른한 권째로 생을 마감한 그의 책을 다 읽을까 봐 걱정된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책을 찾기 위해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게 되고 우연히 빌린 한 권의 책 76페이지 위쪽 여백에 연필로 쓴 "당신을 위해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글을 보게 된다. 철저한 검사 속에서 남아있는 한 줄의 낙서로 말미암아 그녀의 밑줄 긋는 남자 찾기 대작전이 시작된다.
그가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추천한 책인 도스또예프스끼의 <노름꾼>에는 그의 감정을 대신하는 글에 밑줄이 한가득 담겨 있다. 그녀는 누군가가 그녀에게 장난을 거는 것으로 생각하며 웃어넘기지만, 점점 상상 속의 그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도대체 누가 그녀에게 책에 밑줄을 그어 사랑을 속삭이는지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모두 다가 궁금할 것이다. 나도 그랬다. 그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왜 그녀 앞에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책에 밑줄로 사랑을 고백하는지 그가 빨리 나타나서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렇게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나타날 듯 말 듯한 그에게 사랑의 감정을 보냈다가도 너무 뜸을 들이며 나타나지 않는 그 때문에 그녀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포자기가 된 상태로 몇 달을 보낸다. 그리고 난 그런 그녀를 보면서 내가 꼭 그녀가 된 것처럼 나의 마음도 자포자기가 되어갔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그가 정말 그 밑줄 긋는 남자인지 궁금했고 그녀와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결말은 내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그녀를 따라 움직이고 싶었지만, 그녀는 나와 닮은 부분이 너무 많아서 이미 나는 그녀가 되어 책을 읽고 있었다.
얇은 책이지만,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은 알차고 재미있었다. 내가 읽어보지 못한 고전 소설들이 많이 나왔지만,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고 밑줄 그어진 책들을 나도 찾아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끝까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결말이지만, 그녀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으니 그거만으로도 행복했을 것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덮으면서 나도 도서관에 찾아가서 책에 낙서하면 안 되는 곳이지만, 밑줄 긋는 남자를 찾고 싶다. 그러면 나도 그녀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
나쁜 일이 생겨 이것저것 생각할 일이 많았었는데 이 한 권의 책으로 답답했던 나의 마음을 조금 풀어주어서 고마웠고 그녀의 알콩달콩한 사랑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