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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신화 사이언스 - 사이러스
이정모 지음 / 휘슬러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아리스토텔레스가 신화에 관해서 말하길 그것은 학문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학문은 증명을 바탕으로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당시에는 철학과 과학이 뚜렷한 구분이 없다고 할 수 있기에 과학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신에 관한 이야기를 한 사람들은 전통적 가르침을 후세에 전해주었을 뿐, 그 증명은 전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신화는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다(형이상학, 3 4). 그렇기에 신화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참된 확신을 기대할 수 있는 증명을 바탕으로 해서 말하는 사람들을 대립시키며 이런 사람으로는 철학자들이 꼽힌다(서양철학사,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20p). 회의하고 증명하고 근거 짓는 방법적인 요인에 의해 철학과 신화를 구별하며 철학이란 신화에 비하자면 정말로 새로운 어떤 것이라 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여기서의 철학은 과학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고의 무비판적인 시대에 생겨난 신화의 문제제기들과 그 개념적인 직관들이, 아직도 철학적인 개념들 속에 계속해서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어 B.C. 6세기 들어 일종의 새로운 조직적인 신화가 트라키아 산으로부터 그리스로 내려오는데 이 핵심은 디오니소스 신이다. 니체 역시 디오니소스를 삶의 상징으로서 삶을 꼭대기부터 밑바닥까지 긍정하는 것의 상징으로 삼았다. 이처럼 신화적 전통이 언제까지나 올림푸스 산 위에서 인간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철학이나 삶에도 직접적으로 개입하게 되는 것이다. 철학은 그러므로 신화도 그 나름대로 철학한다고 말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근대에 들어서 계몽주의적으로 과학을 신앙하고 있는 자들만은 신화에서 벗어나려고 한다고 힐쉬베르거는 과학을 신화로부터 구분 짓고 있다.

그렇다면 과학은 신화가 증명 불가능한 것이기에 배격하고 인간 삶에의 철학의 과제로 남겨두는가? 여기에 대한 답은 그렇지 않다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많은 철학자들 역시 과학과 신화의 관계를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화를 낳은 사고, 즉 신화적 사고는 자신의 주위 세계에 대해서 항상 세밀한 관찰을 한다. 동물이나 식물의 생태나 분류에 대해 축적된 방대한 지식이 그 배후에는 숨어 있다. 생활에 유용한 영역의 자연에 대해서 신화는 현대의 과학자들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의 과학적 정신을 발휘한다(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21p).

 

신화의 역사는 3만 년이나 되었으며 어느 사회에서나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요소이다. 기껏해야 2500년 정도의 역사를 지닌 철학이나 그보다도 짧은 과학이 신화와 별개의 문제, 혹은 어느 한 쪽에 그 해석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레비 스트로스의 신화 논리나 미나카타 구마구스의 제비연석 연구에서 엿볼 수 있듯이 신화란 인류의 공통적인 자산이며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의 역사 연구와 같은 삶의 방식의 탄생에까지 관여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 철학적 연구에 있어서 과학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연석의 공통적 요소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지질학적으로 전에는 한 대륙에 있었다든가, 빙하기 때 맘모스의 이동을 따라 인간도 쫓아 갔기에 지금은 대륙이 다른 곳에서도 같은 신화적 요소가 발견된다든가 하는 과학적 뒷받침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된다. 또한 DNA연구를 통해 위의 다른 대륙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전에는 한 갈래에서 파생되었음을 증명하게 되었다.

 결국, 신화를 통해서 인류의 사고가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가, 그리고 그에 따른 삶의 모습은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는 비단 철학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과학이 함께 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오늘날 현대적인 시각에서 신화를 재조명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번에 읽은 그리스 로마 신화 사이언스 는 심지어 신화의 내용 하나하나까지도 과학적으로 접근과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사실, 신화에 등장하는 이야기와 인물들을 세세히 파헤치다 보면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존재로 치부하거나 아니면 그 상징적 의미만을 살펴보는데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레비 스트로스에 이르러 신화를 인류의 문제로 이끌어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물론 이 책에서 다룬 신화의 내용은 극히 일부분에 한정되며 다루고 있는 대상 역시 과학적인 implication이 존재하는 소재만 선택적으로 선정된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과학은 신화를 논리적으로 설명해낼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일지도 모른다. 또한 그리스 로마 신화를 과학으로 설명한다기보다 과학의 사실들을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도 발견하였다라고 말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될 만큼 한 에피소드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극히 일부분을 들어 과학적 사실들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과 해석 자체들이 논리를 갖고 과학적으로 접근하였다는 것 자체에 그 가치를 두어야 할 것이다. 가이아에서 우라노스, 크로노스 그리고 제우스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카오스와 코스모스, 유성생식, 공간과 시간의 탄생 등의 과학적 암시를 이끌어내는 과정은 철학의 뒷받침으로서가 아닌 과학만이 신화에 접근하는 방식을 극명하게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흥미로운 소재는 암브로시아와 넥타르이다. 인문학에서 이 황홀한 신들의 음식에 대해 해석하기를 먹고 마시는 음식이 갖는 사회적 기능과 그 상징성에 대해 이야기한다면(넥타르와 암브로시아, 클라우스 E.뮐러) 과학에서는 시트르산 회로라고 불리는 TCA회로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에너지 샘으로서의 기능을 이야기한다. 신들의 영생에 있어서도 한쪽 문화에서는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므로 우리의 유한한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다면 과학은 줄기세포를 이용하여 언젠가는 영생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던져준다.

 신화는 시나 문학에서만 인용되는 대상도 아니며 철학의 고찰의 대상만도 아니라 과학의 대상도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위에서 살펴보았으며 신화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두 문화간의 협력이 필요하고 또한 그 성과를 내오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지극히 과학적으로 신화에 접근하여 해석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그리스 로마 신화 사이언스를 통해 살펴보았다. 이 두 가지 방식의 차이는 그 자체로는 다를지 모르지만 널리 봐서 신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두 번째에서 살펴보았듯이 서로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으므로 결국 장려되어야 할 것이고 그 시도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레비 스트로스의 연구에 대해 현대 신화학에는 완전히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고 한다. 바로 과학성과 예술성의 결합이 가장 멋지게 실현되어 있음이 그의 업적 중 하나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두 문화간의 차이점이 엄연히 존재하는 바, 이러한 통섭의 시도 자체를 폄하하는 것 같다. 물론 모든 연구에 있어서 그 분야에서의 특수성보다 다른 학문과의 결합에 힘을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A라는 학문과 B라는 학문이 그 자체적으로 발전해나가고 있다면 누군가 그 둘을 결합시켜서 C라는 연구를 진행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A B만 존재하던 시절에 비하여 C가 더 생겼으니 그만큼 효용이 더 커진 것 아닌가? 여태껏 A B가 어느 한 쪽 문화에 속한 이들끼리의 결합으로 C를 낳았다면 지금은 한 쪽 문화의 A와 다른 한 쪽 문화의 B가 새로운 C를 낳을 수 있는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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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사이보그가 되었는가
케빈 워릭 지음, 정은영 옮김 / 김영사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사이보그가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나는 "네"라고 대답한다.

사이보그는 안드로이드와는 구별되며 로봇과는 더더욱 다르다.

사이보그는 무한한 인간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사이보그야말로 인간이 여태껏 경험한 어떤 변혁보다도 더 커다란

변혁을 가져올 것이다. 인간 생활의 모습과 가치관에 있어서 패러다임의 변화가 될 것이란 말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커다란...

아마도 인간이 스스로에 대해서 묻던 가치판단이 달라질 것이며 인간은 더이상 인간다운 삶에 대해서 동의하는 바가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어제의 약골은 내일의 일인자가 될 수 있다. 적어도 물리적인 인간의 능력은 100% 후천적으로 얻게 되는 기계적 형질에 달려 있게 될 것이다. 스마트 칩이 몸 속으로 들어옴에 따라 아마도 엄청난 속도의 서비스와 통신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인간은 말을 하지 않고도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자유로워 질 것이란 말이다. 또한 모든 신체적 결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므로 수명이 늘어나며 노인과 젊은이의 신체적 차이가 사라지게 되므로 상대적으로 경험과 지식이 더 쌓인 노인이 주 생산층이 될지도 모른다. 실버산업과 노후복지는 전부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교통수단을 비롯한 기존의 기계와 로봇은 전부 내 의지에 따라 자동으로 작동하게 될 것이고 이는 몸이 온갖 육체적 노동으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몸의 퇴화는 사이보그화를 통해 생물적인 요소가 점점 줄어들 것이므로 다이어트 산업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는 뇌에 칩을 이식하는 것만으로도 비만으로부터의 해방은 쉽게 이뤄지는 것의 연장선상일 것이다. 또한 수중생활이 가능해질 것이므로 인구포화 문제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구증가와 출산률감소의 문제에 대해서는 예상하기가 힘들다. 인구의 수명이 무한히 연장되지 않는다면 노년계층은 엄청난 경험과 지식이 쌓였지만 실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시한부인생이나 다름없기에 그들은 일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곧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귀중한 지적 재산이 될 것이다. 만일 육체의 사이보그화에 비용이 많이 든다면 출산률은 특별히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비용이 적다면 후대를 위한 지적재산의 생산에 힘을 쓰게 될 것이므로 출산률이 높아질 수 있다. 인간의 뇌에 이식된 언어팩키지에 따라 모든 생각은 언어가 다르더라도 무리없이 전달될 것이며 인간은 교육의 유무에 상관없이 전세계가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전 시대의 지적 산물들도 다운로드를 함으로써 간단히 기억되며 기억 능력의 대폭 확장으로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인간 간의 지적 능력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꾸준한 학습을 통해 얻어지는 심층적인 사고들, 즉 창의력, 종합력, 분석력 등과 같은 곳에 국한될 것이지만 이 차이는 절대 무시못할 것이다. 존재하는 수많은 정보를 어떻게 잘 효율적으로 이용할 것이냐는 여기에 속하는 문제이므로.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기던 인간적인 가치들, 그 중 인간의 기계화를 통해 파괴될 가치들에는 느림의 미학, 여유, 불합리성에서 오는 즐거움, 부조리 역시 삶의 일부분이라는 생각 등 무수히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이보그로 진화할 것을 원한다. 나는 미래가 궁금하다. 나는 미래를 보고 싶다. 미래를 살고 싶다. 인간 본연의 소중한 모습들에도 불구하고 난 새로운 진화의 패러다임으로써 사이보그화를 지지한다. 증폭된 인간의 새로운 능력이 가져올 수많은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물론 고찰과 조율이 필요할 것이지만 이를 두려워하여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은 장렬하게 최후를 맞아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과연 언젠가는 멸종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인가 아니면 한계를 벗어나 바다로 우주로 나아가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인가.

미래에는 인간도 지구상에 존재했던 순수한 지적생명체의 한 종에 불과할 것이다. 인간이 종으로서의 자연적인 개체수를 확장해 나갈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이 반드시 인간으로서의 진화를 고집할 이유 또한 없다. '호모사이보그'. 인류는 새롭게 진화해나갈 것이며 언젠가는 현생 인류와는 그 뿌리를 의심할 정도로 달라져 있을 지도 모른다. 지금의 우리 모습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어느 미래에서 과거의 우리의 모습을 공부하고 있을 수백만, 수천만년 후의 후세인류???를 위해서라도 옳지 않다. 생물은 필연적으로 진화해나가야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인류가 새롭게 진화해나갈 사이보그화는 당위적일 수 있는 것이다.

 

 

케빈 워릭은 나에게 이 생각들에 대한 직접적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의 실험결과들과 그의 호기심과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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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 천재가 된 맥스
제프 콕스·하워드 스티븐스 지음, 김영한·김형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배움과 실제의 괴리라고 하던가, Selling the wheel를 읽으면서 교재에 등장하는 수많은 전문용어들과 이론은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학습효과를 떠올려본다면 어떠할까? 현재까지 마케팅관리라는 책을 6장까지 배우면서 마케팅전략의 프로세스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회사에 취직하여 마케팅 부서에 들어간 뒤에 머리를 싸매고 대학 시절에 배운 교재의 원리들과 전문용어들을 이용하며 나와 비슷한 과정을 겪고 비슷한 이유로 그 자리에 와 있을 동료들과 함께 머리를 쥐어짜내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이 절대로 헛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면 오산이라고 말하고 싶다. 난 적어도 마케팅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수많은 abbreviation들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은 후에 내가 할 수 있게 된 일은 무엇일까? 줄거리에 치우치게 된다면 책에서는 맥스란 사람이 바퀴를 발명해내어 맥시멈이란 회사의 CEO가 되어 돈방석에 앉는 과정을 그려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모든 이들이 이 책을 오라클 오지로 삼아 창업을 한다면 다 맥스의 위치까지 갈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을 읽고 내가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자신하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상품의 도입과 발전 과정에서의 어떠한 논리적 사고를 할 것 인가였다. 현재 시장 상황과 고객을 제대로 파악할 수만 있다면 내가 어떻게 그에 맞추어 Logical한 행동과 전략을 필 수 있을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바퀴의 판매와 더불어 등장하는 4명의 인물은 사실 인간을 대변한다기보다는 어쩌면 전략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이 책은 관리자의 입장에 있는 이들에게 어떤 이를 써야 할 것인가, 인사에 대한 조언을 해준다고 볼 수 있었다. 시장 상황과 그 때 그 때 변하는 고객에게 적절한 판매기법과 마케팅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들을 활용하는가에 대한 좋은 메시지를 얻을 수 있었다.

 

 

책을 읽는 과정에 시종일관 바퀴와 함께 하던 상품은 Levis 청바지였다. 군대에 납품할 목적으로 만들었던 튼튼한 천 재료가 군의 납품 취소와 함께 한 순간에 창고에 쌓인 채 고민하고 있었을 리바이의 모습은 어딘가 맥스와 닮았다. 당시의 경쟁자라고 본다면 일반 면으로 만든 바지라든가 모직물 바지 정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고역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바지가 쉽게 해져버린다는 점을 파악한 뒤,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보라, 이 군대 천막용으로 쓰는 천으로 만든 바지를. 너희의 바지는 더 이상 해질 필요가 없다라고. 누구나 청바지라는 존재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튼튼한 바지에 대한 Need가 있었을 것이고 그들을 대상으로 팔았을 것이다. 노동을 마치고 집 안으로 돌아온 Jeen이라는 친구는 바지가 튼튼하다며 가족에게 자랑하고 직장에 가서는 동료들에게도 권했을 것이다. 점차 많은 사람들이 리바이에게 청바지를 사겠다며 달려왔을 것이고 결국 혼자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해낼 수 없게 되어 회사를 차리고 공장을 내어 청바지를 찍어내게 되었을 것이다. 아마 이 즈음에 청바지가 창출해 낸 시장이 고속으로 성장했을 것이고 리바이는 자신의 청바지에 주머니를 만들고 허리를 늘리거나 줄이거나 할 수 있도록 고무줄도 넣어봤을 것이고 좀 더 입기 편하도록 앞과 뒤를 끼지 않도록 한 디자인도 선보이는 등 기술을 이용해 청바지의 성능을 발전시켰을 것이다. 물론 리바이스의 특허인 주머니의 리벳 또한 주머니에 이것 저것 넣다가 주머니가 찢어지는 일이 횡행하다 보니 나온 개선책으로 이 때 등장했을 것이다. 패션 잡지나 신문 등을 이용하여 선전도 하여 Levi Strauss를 알리는 데 주력을 하다 보니 그만 경쟁업체도 무수히 생겨나고 리바이스보다 더 싼 가격에 제품을 공급하게 된 후발주자인 Wrangler나 Lee와 같은 회사들이 시장을 잠식해가자 리바이는 뒷주머니에 레드탭을 달고 독수리 모양의 박음질선도 추가하는 등 차별화를 시도하는 한 편, 고객들과 신뢰를 쌓기 위해 제작 공정에서의 표준화와 고객 만족 서비스 등을 무료로 제공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청바지는 일반적인 상품이 되어 누구나 하나 이상쯤은 소유하고 패션에 민감한 고객이 아닌 대다수의 고객들은 가격이 중요 변수가 되어 신속한 구매를 원하게 되었을 것이다. 리바이스는 이미 브랜드 가치도 상당하고 그들은 브랜드를 서서히 라인 확장시켜 501, 엔지니어드, Type 1 등 리바이스 만큼이나 강력한 청바지의 대명사로 등극하기까지 했지만 High End 측면에서의 패션의 감수성을 쫓아가지 못하고 Low End에서도 싼 경쟁업체들에게 밀리기 시작하자 결국 Wal Mart에 들어가면서 성숙한 시장에 맞게 고객이 쉽게 구매 결정을 내릴 수 있고 거대한 유통 체인을 통해 薄利多賣(박리다매)를 거두어 생존하는 전략을 폈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책에서 얻은 바를 통해 리바이스 회사에 유추해본 결과이다. 리바이스가 100년 이상 된 오랜 브랜드라는 점, 군수용 천막이 원료였다는 점, 후발업체가 Wrangler와 Lee였다는 점, 리바이스 하위 브랜드들의 이름, 그리고 High end 마켓을 내주고 Low end로 전향하여 월마트 체제로 돌아섰다는 점. 다섯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이만큼의 논리적 사고를 끌어낼 수 있었고 나는 이 책의 학습효과 덕분이라 생각한다. 아쉽게도 리바이스라는 회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인물들이 어느 때에 어떻게 적절한 인사 전략을 썼는지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만약 지금의 내가 어떤 사업을 장기적으로 구상하고 있다면 현재 시장과 고객에 대한 분석 후에 어떤 사람을 고용할 것이며 어떻게 전략을 이끌어나가고 평가할 지에 대한 판단이 분명히 선다는 것도 분명 자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좀 더 덧붙여서 얘기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아마도 책의 제목에 관한 일이다. 英題는 Selling the wheel이었지만 한글 제목은 마케팅 천재가 된 맥스였다. 책을 읽기 전에는 맥스가 마케팅 기법들을 섭렵하여 나가는 과정일 줄 알았지만 그는 오라클 오지의 도움을 받아 적시(適時)에 맞게 인재들을 고용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읽고 난 후, 그들이 전략을 의미한다고 봤을 때, 그리고 맥스가 이 책을 읽고 있는 You를 대표한다고 가정하자 제목에 대한 의문은 해결됐다. 한 해를 시작하며 처음 읽게 된 책에서 이론보다 더 실제에 적용가능하고 내 손에 잡히는 듯한 마케팅의 컨셉을 갖게 되어 무척 기쁘고 좋은 책을 소개해주신 분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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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문화
C.P. 스노우 지음, 오영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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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문화  - C.P. 스노우

 

-비판과 평가를 중심으로

작년, 한창 ‘인문학의 위기’와 한국의 정치적 리더쉽의 부재가 이슈가 되었을 때, 조선일보의 한 칼럼에서 본 기사에서는 놀라운 이야기가 있었다. 미국 실리콘벨리에 입성한 기업의 CEO 중 70%에 육박하는 숫자가 학부 시절 영문학을 비롯한 인문학 전공이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들 중 상당수는 첨단 기업답게 석,박사는 과학 관련 학위를 갖고 있었다. 또한 이와는 좀 다르게 최근 한국에서는 이공계 출신, MBA를 환영한다는 소식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었다. 이 두 가지에서 공통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점은 바로 과학과 인문학을 섭렵하는 ‘르네상스 칼러’가 새롭게 엘리트 계층으로 등장했다는 것과 이에 따른 양자 간의 교육의 필요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50년이나 이전에 정확하게 읽어낸 스노우의 안목에 깊이 감탄하는 바이다. 물론 그도 당시의 두 문화 사이의 간격이 갖는 문제점에 대한 논의는 그 전부터 있어왔다고 인정하고 있지만 그것을 쟁점 삼아 구체적으로 후대에까지 생각하게끔 공론화시켰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지적한 핵심 문제는 무엇인가?

스노우가 지적한 핵심은 결국 과학적 문화와 인문적 문화 사이의 대립과 단절을 전제로 이 두 문화 사이의 문제의 심화가 사회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좁게는 스노우의 표현대로 ‘풍부한 이해 능력이 저하되고 마침내는 자기 스스로를 무력하게 만든다.’에서 광의로는 화이트헤드가 지적하듯이 ‘세부적으로 편중된 진보는 통합하는 작용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그만큼 위험성이 증대된다. 무엇보다도 전체적으로 통합된 비전을 구현할 건전한 지혜는 균형을 유지하는 발달에서만 생겨난다’라고 말하는 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과 나아가서 전 인류의 공존을 위한 후진국에 대한 개발을 촉구하였다.

(과학기술의 전파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과 정치와의 연계성을 간과한 것에 대한 비판은 자신도 인정했고 뒤에서 다뤄지고 있으므로 생략, 글 전체에서 느껴지는 문학적 지성에 대한 반감 또한 생략할 것이다. 내가 느낀 비판점만 얘기할 것이다.)

문제를 양극화시키는 방법은 상당히 방법적인 측면에서 효율적이다. 쉽게, 학생들 간의 학업 성적을 가지고 평가하는 경우, 국어 성적이 30점 미만인 학생 그룹들만 가지고 비교 대상 없이 절대적으로 뒤쳐졌다고 평가하기보다 90점 이상인 학생 그룹들과 비교하여 설명한다면 그 격차가 더욱 커 보이는 것은 자명하며 특히 양쪽 그룹으로 양극화되었다고 설명한다면 문제의 심각성을 돋보이게 할 수 있다. 스노우는 이런 비판을 예상했었는지 2천과 둘의 문화를 운운하는 식의 논리를 경고하지만 결국에는 제3의 문화를 간과했었음에 대해 아쉬움을 나타내는 듯 하다. 두 문화의 긴밀한 협력과 서로를 통한 발전은 인류의 공존을 위하여 큰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스테판 콜리니의 해석대로 매우 자명하다. 하지만 그는 이를 4번째 chapter인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에서 교육과 개발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데 있어서 (데이터는 제시하지 않지만 꽤 정확해 보이는) 걸리는 시간 정도와 교육의 필요성 정도를 제시할 뿐 그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그는 사회적 변화의 속도가 크게 증가되어 공업화 달성에 갈수록 짧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이에 대한 서구인들의 몰이해를 비판하는데 이는 후발국들이 쫓아옴을 경고하는 이중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한편, 그는 아시아와 남미 아프리카 등 가난한 나라에 대한 연민을 피력하며 이들을 도와주어야 하며 이들의 성공여부는 서구지식인의 손에 달려있다라는 논리를 펴는데 이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모순되어 보이거나 가식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비판을 위한 비판의 입장에서 한 마디 던져보자면 입으로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흙투성이가 되며 알고 있는 것은 모조리 전해 주고, 올바른 기술적인 일을 한 다음에는 돌아가는…’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의중에는 다분히 아시아를 아시아의 입장에서 보지 않고 오리엔탈리즘으로 보는, 즉 철저히 서구중심적인 이분법적인 사고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대영제국을 표방하는 제국주의의 열기가 다 식지도 않았을 무렵에 이만큼의 우호적인 태도를 나타낸다는 것 자체가 고맙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판을 위한 비판의 목소리에서 해보는 말이다.

 분명히 스노우를 통해 다시 한 번 느꼈던 것은 과학혁명으로 말미암아 보다 나은 생활여건을 누리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으며 다시 한 번 이 사실에 감사를 드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 문화에 선 지식인들의 과학문화에 대한 비판을 볼 때, 에덴 동산 시절을 운운하는 러다이트와 다름 없는 논리를 펴는 것은 아닌가 판단해야 한다는 것.

 처음에 지적했듯이 그의 앞날을 정확히 예견하는 선견지명에 감탄했으며 요즘 들어 관심있게 지켜보던 ‘소통’의 문제를 바벨이나 크러쉬에서 다뤘던 미시적인 측면이 아닌 거시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것이 큰 수확이 아니었을까.

 

2.       문제 의식

 

-         Whitehead의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를 중심으로

 

(1) 전통 문화와 과학 문화가 분화되기 시작한 시점과 그 이유는 무엇일까?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A.N.Whitehead,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 오영환 역, 과학과 근대세계, 279-284쪽 참조)

<근대 과학의 시대를 이루고 있는 지난 3세기는 신의 관념, 정신의 관념, 물질의 관념, 그리고 물질의 단순 정위를 표현하는 특성을 지닌 공간 및 시간의 관념 등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철학은 대체로 정신에 역점을 두었고, 그 결과 나중 2세기 동안은 과학과의 접촉을 잃고 말았다…중략…특수한 사상 영역을 전공하면서 그 전공 영역 내의 지식을 점차적으로 증대시켜 가는 전문가의 양성 방법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지식의 전문화가 성공을 거둔 결과, 오늘날 과거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주목할 만한 점이 두 가지 나타났다. 첫째로, 진보의 속도가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평균 수명을 누리는 개인이 때때로 그가 과거에 접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곤 한다. 고정된 일에 고정된 사람이라는 사실이 과거의 사회에서는 신이 내려준 선물이었지만 미래의 사회에서는 공공연한 해악이 될 것이다. 둘째로 현대에 있어서 지식의 전문화는 지적 영역에 관한 한 역효과를 나타내고 있다>에서 볼 수 있듯이 두 문화가 나눠지기 시작한 것은 오래 안된 것으로 보인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란 수학, 천문, 병법, 역사에도 능했으며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경우만 생각해보아도 예전의 지식인이란 다방면에 걸쳐 탐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세계 최초의 대학인 볼로냐 대학에서는 졸업하기 위해서는 법학, 수학, 수사학, 철학, 천문학, 의학, 신학까지 섭렵해야 했다고 한다. 화이트헤드의 말대로 두 문화의 분화의 근본적인 이유는 첫째로 근대 과학의 시대 이후로 학문의 관념이 중점을 두기 시작한 방향이 달랐다는 점과 둘째로 그 지식의 전문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각 전문 분야는 진보해 가지만, 이는 그 자신의 틀 속에서의 진보일 뿐, 전체가 나아가야 할 비전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통합의 기능이 미약한 데서 오는 위험을 증대시킬 뿐이라며 위험성을 지적하며 그에 따른 해소 방안으로써 교육을 주장한다.

 

(2) 교육의 구체적인 방안

만약, 우리가 지혜란 균형을 갖춘 발달에서 생겨나는 법이라고 전제한다면 우리는 이런 균형을 갖춘 인물을 배출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전통적인 교육 방법에 대해 그것이 지나치게 지적 분석과 틀에 박힌 지식의 습득에만 몰두하고 있다면서 거기서 나타나는 가치들의 상호 작용 가운데에서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추상적인 공식만을 중요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를 예를 들어 표현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은 먼저 동물을 본 후 그것들에다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데, 전통적인 교육 체제에서는 아이들이 동물들을 보기도 전에 그 이름부터 배운다.” (화이트헤드, 과학과 근대세계: 286쪽 참조)라고.

그리하여 구체적인 방안으로 제시한 것을 정리해보면 첫째로 학생은 일정한 분야를 전공해야 하는데 이에 필요한 모든 실습과 이론의 이수를 포함하고 있어야 하며 전공 과목에는 몇 개의 보조 과목이 연결되야 한다고 말한다. 둘째로 예술과 미적인 교육의 중요성이다. 여기서의 예술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로 미적 파악의 습관을 기르기 위한 방법으로 보았다. 실재는 활동력과 그것이 개체화되어 나타나는 미적 가치들을 갖고 있으므로 예술이란 여러 구체적 사실에 의해 실현되는 하나하나의 가치에 주목하도록 하기 위해 그 사실들을 배열 조정하는 어떤 선택 활동이다. 예를 들면, 일몰의 경관을 바라보려고 몸이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도 하나의 간단한 예술적 선택 활동이다. (화이트헤드, 과학과 근대세계: 288쪽 참조)

셋째로 과학의 유물주의적 기반을 경고한다. 이는 가치에 대립되는 사물에만 주목하게끔 함으로써 물질적 사물과 자본이 사회 조직과 더불어 대두되었고 궁극적으로 여러 가치가 제외되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러한 가치들에다 정중하게 예의를 표하고 나서 그것들을 성직자에게 넘겨줌으로써 일요일에만 문안 인사를 하는 정도로 끝냈다”고 그는 말한다.

넷째로 변화와 이동을 강조한다. 인류는 숲에서 평원으로, 평원에서 해안으로, 한 기후에서 다른 기후로, 대륙에서 대륙으로, 한 생활 습관에서 다른 생활 습관으로 계속해서 이동해 왔다. 인간이 이동을 멈출 때, 인간의 삶에서 향상도 멈추게 될 것이다. (경제발전에 있어서의 migration의 중요성과도 맞닿은 표현이다.) 또한 신체의 이동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정신적 모험 – 사상의 모험, 열정의모험, 미적인 결합의 모험 – 의 힘은 더욱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3.       희망과 기대

 

야콥 브로노프스키의 과학과 인간가치의 1965년도 개정판에 첨부된 수판과 장미는 세 등장 인물을 내세운 대화 형식을 띄고 있다. 이는 스노우와 리비스로 대표되는 과학 문화의 지식인과 문학적 지식인, 그리고 기존체제를 대표하는 한 인물을 내새우고 있다. 현대판 르네상스인이라고 평가받는 브로노프스키 또한 스노우를 지지하고 있으며 과학의 업적에 대해서 찬양하고 있다. “20세기 후반 현재의 물리학적 세계에 대해 과학이 제시하는 통찰은 지적인 깊이나 인간적인 복합성에서 지금까지 인간 정신이 가졌던 것 중 가장 아름답고 놀라운 업적입니다.” (야콥 브로노프스키, 과학과 인간 가치: 우정원 역, 116쪽 참고)

브로노프스키는 포츠의 마지막 대사를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정리하고 있는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핑, 바로 당신이 삶을 작은 조각, 한 비평가가 다룰 수 있는 크기의 조각들로 나누는 사람이요. 그러나 창조적인 추진력, 만들고 발견하고자 하는 욕망, 창의성에 대한 소망, 이런 것들이 바로 한 시대의 목덜미를 쥐는 거요. 그리고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혼동하기도 하고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보편적이기도 하면서, 예술과 과학과 기술은 앞으로 곤두박으며 뒤죽박죽 나아가는 것이죠. 하핑, 당신도 알다시피 말로(C. Marlowe)는 문학 비평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오. 그는 배 타는 선원, 과학자, 모험가들과 같이 어울렸소. 갈릴레이의 아버지는 음악가였지만, 아들이 과학을 한다고 꾸짖지 않았소. 그 시대, 위대했던 그 시대에는 기술적인 복지와 예술과 과학은 모두 하나였소. 우리가 허용하면 오늘날도 그럴 수 있는 것이오. 분명히 오늘날에도 예술에 그만큼 창조적인 사람들이 있소. 그들이 숨을 쉴 세계로 열어 준다면, 그만큼 창조적일 수 있는 것이오……”

자기의 의무를 다하고 미래 지향적인 현대인에게서 그를 좌절시키고 질식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세계에서 가장 해충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러다이트적인 가치 전도나 과거의 몇 가지 탁월한 점만을 전적으로 주목하여 현대를 비판하려 드는, 즉 에덴 동산으로의 회귀를 운운하는 우를 범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위처럼 다양성에서 통일성을 만들어 내고, 이렇게 얻은 통일성이 바로 완전한 문화이며 삶을 하나로 지적인 삶의 총체로 인식할 때에 브로노프스키의 말처럼 오늘날에도 희망이 있는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지적한 대로 물질적인 힘은 맹목적으로, 완고하게, 또 이기적으로, 그리고 흔히 야만적인 악의를 수반하여 대개 행사되었지만 이에 불구하고 인류는 진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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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하는 즐거움
리처드 파인만 지음, 승영조 외 옮김 / 승산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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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물리학적 성과에 대해서는 크게 아는 바가 없다. 이 책은 그와 같은 그의 이론에 대해서 알려주는 점은 거의 없고, 짧은 소개로 이해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게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도 그의 말,

인간의 가장 가치있고 반드시 보장되어야 하는 가치는 의심하는 자유이다.

라는 말은 비로소 신의 영역까지 의심하라라고 말하는 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웠다. 한 천재의 사상..

20대 초중반에 세계의 석학들과 한 자리에서 거침없이 비판을 가할 수 있는 그 탁월한 능력과 자신감, 그리고 굽힐 수 없는 학문에의 자존심과 아집.

교육이란 모름지기 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닌 생각하는 과정을 제시해주는 것. 파인먼이란 몬스터는 아마도 역시 탐구와 관찰하는 어릴 때부터의 훈련이 그를 양자의 세계를 창조해내는데 큰 뿌리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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