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문화
C.P. 스노우 지음, 오영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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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문화  - C.P. 스노우

 

-비판과 평가를 중심으로

작년, 한창 ‘인문학의 위기’와 한국의 정치적 리더쉽의 부재가 이슈가 되었을 때, 조선일보의 한 칼럼에서 본 기사에서는 놀라운 이야기가 있었다. 미국 실리콘벨리에 입성한 기업의 CEO 중 70%에 육박하는 숫자가 학부 시절 영문학을 비롯한 인문학 전공이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들 중 상당수는 첨단 기업답게 석,박사는 과학 관련 학위를 갖고 있었다. 또한 이와는 좀 다르게 최근 한국에서는 이공계 출신, MBA를 환영한다는 소식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었다. 이 두 가지에서 공통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점은 바로 과학과 인문학을 섭렵하는 ‘르네상스 칼러’가 새롭게 엘리트 계층으로 등장했다는 것과 이에 따른 양자 간의 교육의 필요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50년이나 이전에 정확하게 읽어낸 스노우의 안목에 깊이 감탄하는 바이다. 물론 그도 당시의 두 문화 사이의 간격이 갖는 문제점에 대한 논의는 그 전부터 있어왔다고 인정하고 있지만 그것을 쟁점 삼아 구체적으로 후대에까지 생각하게끔 공론화시켰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지적한 핵심 문제는 무엇인가?

스노우가 지적한 핵심은 결국 과학적 문화와 인문적 문화 사이의 대립과 단절을 전제로 이 두 문화 사이의 문제의 심화가 사회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좁게는 스노우의 표현대로 ‘풍부한 이해 능력이 저하되고 마침내는 자기 스스로를 무력하게 만든다.’에서 광의로는 화이트헤드가 지적하듯이 ‘세부적으로 편중된 진보는 통합하는 작용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그만큼 위험성이 증대된다. 무엇보다도 전체적으로 통합된 비전을 구현할 건전한 지혜는 균형을 유지하는 발달에서만 생겨난다’라고 말하는 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과 나아가서 전 인류의 공존을 위한 후진국에 대한 개발을 촉구하였다.

(과학기술의 전파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과 정치와의 연계성을 간과한 것에 대한 비판은 자신도 인정했고 뒤에서 다뤄지고 있으므로 생략, 글 전체에서 느껴지는 문학적 지성에 대한 반감 또한 생략할 것이다. 내가 느낀 비판점만 얘기할 것이다.)

문제를 양극화시키는 방법은 상당히 방법적인 측면에서 효율적이다. 쉽게, 학생들 간의 학업 성적을 가지고 평가하는 경우, 국어 성적이 30점 미만인 학생 그룹들만 가지고 비교 대상 없이 절대적으로 뒤쳐졌다고 평가하기보다 90점 이상인 학생 그룹들과 비교하여 설명한다면 그 격차가 더욱 커 보이는 것은 자명하며 특히 양쪽 그룹으로 양극화되었다고 설명한다면 문제의 심각성을 돋보이게 할 수 있다. 스노우는 이런 비판을 예상했었는지 2천과 둘의 문화를 운운하는 식의 논리를 경고하지만 결국에는 제3의 문화를 간과했었음에 대해 아쉬움을 나타내는 듯 하다. 두 문화의 긴밀한 협력과 서로를 통한 발전은 인류의 공존을 위하여 큰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스테판 콜리니의 해석대로 매우 자명하다. 하지만 그는 이를 4번째 chapter인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에서 교육과 개발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데 있어서 (데이터는 제시하지 않지만 꽤 정확해 보이는) 걸리는 시간 정도와 교육의 필요성 정도를 제시할 뿐 그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그는 사회적 변화의 속도가 크게 증가되어 공업화 달성에 갈수록 짧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이에 대한 서구인들의 몰이해를 비판하는데 이는 후발국들이 쫓아옴을 경고하는 이중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한편, 그는 아시아와 남미 아프리카 등 가난한 나라에 대한 연민을 피력하며 이들을 도와주어야 하며 이들의 성공여부는 서구지식인의 손에 달려있다라는 논리를 펴는데 이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모순되어 보이거나 가식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비판을 위한 비판의 입장에서 한 마디 던져보자면 입으로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흙투성이가 되며 알고 있는 것은 모조리 전해 주고, 올바른 기술적인 일을 한 다음에는 돌아가는…’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의중에는 다분히 아시아를 아시아의 입장에서 보지 않고 오리엔탈리즘으로 보는, 즉 철저히 서구중심적인 이분법적인 사고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대영제국을 표방하는 제국주의의 열기가 다 식지도 않았을 무렵에 이만큼의 우호적인 태도를 나타낸다는 것 자체가 고맙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판을 위한 비판의 목소리에서 해보는 말이다.

 분명히 스노우를 통해 다시 한 번 느꼈던 것은 과학혁명으로 말미암아 보다 나은 생활여건을 누리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으며 다시 한 번 이 사실에 감사를 드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 문화에 선 지식인들의 과학문화에 대한 비판을 볼 때, 에덴 동산 시절을 운운하는 러다이트와 다름 없는 논리를 펴는 것은 아닌가 판단해야 한다는 것.

 처음에 지적했듯이 그의 앞날을 정확히 예견하는 선견지명에 감탄했으며 요즘 들어 관심있게 지켜보던 ‘소통’의 문제를 바벨이나 크러쉬에서 다뤘던 미시적인 측면이 아닌 거시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것이 큰 수확이 아니었을까.

 

2.       문제 의식

 

-         Whitehead의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를 중심으로

 

(1) 전통 문화와 과학 문화가 분화되기 시작한 시점과 그 이유는 무엇일까?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A.N.Whitehead,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 오영환 역, 과학과 근대세계, 279-284쪽 참조)

<근대 과학의 시대를 이루고 있는 지난 3세기는 신의 관념, 정신의 관념, 물질의 관념, 그리고 물질의 단순 정위를 표현하는 특성을 지닌 공간 및 시간의 관념 등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철학은 대체로 정신에 역점을 두었고, 그 결과 나중 2세기 동안은 과학과의 접촉을 잃고 말았다…중략…특수한 사상 영역을 전공하면서 그 전공 영역 내의 지식을 점차적으로 증대시켜 가는 전문가의 양성 방법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지식의 전문화가 성공을 거둔 결과, 오늘날 과거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주목할 만한 점이 두 가지 나타났다. 첫째로, 진보의 속도가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평균 수명을 누리는 개인이 때때로 그가 과거에 접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곤 한다. 고정된 일에 고정된 사람이라는 사실이 과거의 사회에서는 신이 내려준 선물이었지만 미래의 사회에서는 공공연한 해악이 될 것이다. 둘째로 현대에 있어서 지식의 전문화는 지적 영역에 관한 한 역효과를 나타내고 있다>에서 볼 수 있듯이 두 문화가 나눠지기 시작한 것은 오래 안된 것으로 보인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란 수학, 천문, 병법, 역사에도 능했으며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경우만 생각해보아도 예전의 지식인이란 다방면에 걸쳐 탐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세계 최초의 대학인 볼로냐 대학에서는 졸업하기 위해서는 법학, 수학, 수사학, 철학, 천문학, 의학, 신학까지 섭렵해야 했다고 한다. 화이트헤드의 말대로 두 문화의 분화의 근본적인 이유는 첫째로 근대 과학의 시대 이후로 학문의 관념이 중점을 두기 시작한 방향이 달랐다는 점과 둘째로 그 지식의 전문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각 전문 분야는 진보해 가지만, 이는 그 자신의 틀 속에서의 진보일 뿐, 전체가 나아가야 할 비전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통합의 기능이 미약한 데서 오는 위험을 증대시킬 뿐이라며 위험성을 지적하며 그에 따른 해소 방안으로써 교육을 주장한다.

 

(2) 교육의 구체적인 방안

만약, 우리가 지혜란 균형을 갖춘 발달에서 생겨나는 법이라고 전제한다면 우리는 이런 균형을 갖춘 인물을 배출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전통적인 교육 방법에 대해 그것이 지나치게 지적 분석과 틀에 박힌 지식의 습득에만 몰두하고 있다면서 거기서 나타나는 가치들의 상호 작용 가운데에서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추상적인 공식만을 중요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를 예를 들어 표현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은 먼저 동물을 본 후 그것들에다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데, 전통적인 교육 체제에서는 아이들이 동물들을 보기도 전에 그 이름부터 배운다.” (화이트헤드, 과학과 근대세계: 286쪽 참조)라고.

그리하여 구체적인 방안으로 제시한 것을 정리해보면 첫째로 학생은 일정한 분야를 전공해야 하는데 이에 필요한 모든 실습과 이론의 이수를 포함하고 있어야 하며 전공 과목에는 몇 개의 보조 과목이 연결되야 한다고 말한다. 둘째로 예술과 미적인 교육의 중요성이다. 여기서의 예술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로 미적 파악의 습관을 기르기 위한 방법으로 보았다. 실재는 활동력과 그것이 개체화되어 나타나는 미적 가치들을 갖고 있으므로 예술이란 여러 구체적 사실에 의해 실현되는 하나하나의 가치에 주목하도록 하기 위해 그 사실들을 배열 조정하는 어떤 선택 활동이다. 예를 들면, 일몰의 경관을 바라보려고 몸이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도 하나의 간단한 예술적 선택 활동이다. (화이트헤드, 과학과 근대세계: 288쪽 참조)

셋째로 과학의 유물주의적 기반을 경고한다. 이는 가치에 대립되는 사물에만 주목하게끔 함으로써 물질적 사물과 자본이 사회 조직과 더불어 대두되었고 궁극적으로 여러 가치가 제외되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러한 가치들에다 정중하게 예의를 표하고 나서 그것들을 성직자에게 넘겨줌으로써 일요일에만 문안 인사를 하는 정도로 끝냈다”고 그는 말한다.

넷째로 변화와 이동을 강조한다. 인류는 숲에서 평원으로, 평원에서 해안으로, 한 기후에서 다른 기후로, 대륙에서 대륙으로, 한 생활 습관에서 다른 생활 습관으로 계속해서 이동해 왔다. 인간이 이동을 멈출 때, 인간의 삶에서 향상도 멈추게 될 것이다. (경제발전에 있어서의 migration의 중요성과도 맞닿은 표현이다.) 또한 신체의 이동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정신적 모험 – 사상의 모험, 열정의모험, 미적인 결합의 모험 – 의 힘은 더욱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3.       희망과 기대

 

야콥 브로노프스키의 과학과 인간가치의 1965년도 개정판에 첨부된 수판과 장미는 세 등장 인물을 내세운 대화 형식을 띄고 있다. 이는 스노우와 리비스로 대표되는 과학 문화의 지식인과 문학적 지식인, 그리고 기존체제를 대표하는 한 인물을 내새우고 있다. 현대판 르네상스인이라고 평가받는 브로노프스키 또한 스노우를 지지하고 있으며 과학의 업적에 대해서 찬양하고 있다. “20세기 후반 현재의 물리학적 세계에 대해 과학이 제시하는 통찰은 지적인 깊이나 인간적인 복합성에서 지금까지 인간 정신이 가졌던 것 중 가장 아름답고 놀라운 업적입니다.” (야콥 브로노프스키, 과학과 인간 가치: 우정원 역, 116쪽 참고)

브로노프스키는 포츠의 마지막 대사를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정리하고 있는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핑, 바로 당신이 삶을 작은 조각, 한 비평가가 다룰 수 있는 크기의 조각들로 나누는 사람이요. 그러나 창조적인 추진력, 만들고 발견하고자 하는 욕망, 창의성에 대한 소망, 이런 것들이 바로 한 시대의 목덜미를 쥐는 거요. 그리고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혼동하기도 하고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보편적이기도 하면서, 예술과 과학과 기술은 앞으로 곤두박으며 뒤죽박죽 나아가는 것이죠. 하핑, 당신도 알다시피 말로(C. Marlowe)는 문학 비평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오. 그는 배 타는 선원, 과학자, 모험가들과 같이 어울렸소. 갈릴레이의 아버지는 음악가였지만, 아들이 과학을 한다고 꾸짖지 않았소. 그 시대, 위대했던 그 시대에는 기술적인 복지와 예술과 과학은 모두 하나였소. 우리가 허용하면 오늘날도 그럴 수 있는 것이오. 분명히 오늘날에도 예술에 그만큼 창조적인 사람들이 있소. 그들이 숨을 쉴 세계로 열어 준다면, 그만큼 창조적일 수 있는 것이오……”

자기의 의무를 다하고 미래 지향적인 현대인에게서 그를 좌절시키고 질식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세계에서 가장 해충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러다이트적인 가치 전도나 과거의 몇 가지 탁월한 점만을 전적으로 주목하여 현대를 비판하려 드는, 즉 에덴 동산으로의 회귀를 운운하는 우를 범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위처럼 다양성에서 통일성을 만들어 내고, 이렇게 얻은 통일성이 바로 완전한 문화이며 삶을 하나로 지적인 삶의 총체로 인식할 때에 브로노프스키의 말처럼 오늘날에도 희망이 있는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지적한 대로 물질적인 힘은 맹목적으로, 완고하게, 또 이기적으로, 그리고 흔히 야만적인 악의를 수반하여 대개 행사되었지만 이에 불구하고 인류는 진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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