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 권력을 만났을 때 - 서로 협력하거나 함께 타락하거나
제프 멀건 지음, 조민호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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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헤게모니는 종교, 이념, 과학의 순으로 이동했다. 종교 헤게모니가 세상을 장악하던 시절, 지동설과 진화론을 지지하는 과학자와 지식인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종교의 뒤를 이어, 공산주의 같은 이념 헤게모니가 세상을 주름잡던 시절, 과학자와 지식인이 정치인과 대중으로부터 어떤 푸대접을 받았는지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잠시 떠올려봐도 충분할 것이다.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삼체」에서 빅뱅설을 신봉하던 물리학자가 받은 수모와 죽음을 생각해보라. 과학이 이념에 종속되면 진실의 왜곡과 문화적 지체 현상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념의 뒤를 이어, 드디어 과학기술이 세상의 헤게모니를 움켜잡았다. 하지만 순수기초과학에 종사하는 이들은 그런 헤게모니의 혜택과 영광은 누리지도 못하고, 자본이 선점하기 쉬운 첨단기술의 종사자들은 인터넷, 스마트폰과 인공지능의 붐을 타고 자본 엘리트의 이익에 종속되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다. 정치와 과학이 상호의존적인 관계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하지만 과학기술 전문가가 정치권력이나 자본권력과 대체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올바른 것일지는 보다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유명한 사회혁신가 제프 멀건은 『과학이 권력을 만났을 때』(매일경제신문사, 2024)에서 과학과 권력의 현대적 딜레마를 지적하고 과학이 공익보다도 정부나 기업의 이익에 더 자주 이용되는 현실을 비판한다. 정치와 과학 모두 "경쟁과 협력의 혼합으로 지식과 행동을 촉진하고 언어에 크게 의존"하는 시스템에 기반한다. 일테면 과학은 학계, 실험실, 실험 방법론, 동료 심사 등의 시스템을 포함하고, 정치는 국가, 정당, 의회, 정책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과학과 정치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서로가 필요하다. 과학은 정치의 후원이 필요하고, 정치는 과학의 해결책이 필요하다. 가령 코로나19같은 신종 전염병이나 지구온난화 같은 기후 위기를 예로 들면, 정부가 공익의 차원에서 과학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관리와 통제의 기준과 가이드라인은 언제나 과학계의 조언에 기반해야 한다. 케케묵은 관료주의와 먹통 행정이 위기 대처의 심각한 방해물이 될 때도 있으니 말이다.

"…오늘날 대부분 문제는 과학적 결정과 정치적 결정을 동시에 요구한다. 외인성 질병 구제, 해양 유전 탐사, 향정신성 의약품 관리, 수질 생태계 보전, 가정 폭력 예방, 비만 관리, 청소년 문제, 자살 문제, 인구 고령화 문제, 유아 교육 우선순위 결정, 온실가스 감소 대책, 경제 성장과 지속 가능 환경 사이의 균형 방안 등 과학과 무관한 이슈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36쪽)

과학과 정치의 현대적 딜레마는 "통제불능의 과학계, 그리고 과학적 지식은커녕 그들을 통제할 역량조차 없는 정치계" 때문이다. 저자는 그런 역설의 변증법적 해법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정치학과 윤리학)에 기반해 '정치의 과학화'와 '과학의 정치화'를 제안한다. 정치의 과학화란 과학 활동의 삼대 요소인 '관찰'과 '해석'과 '실행'의 조합을 정치에도 적용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즉, "정치가 하는 일을 더 자세히 관찰하고, 정치의 패턴과 이익 및 위험을 더 잘 해석하고, 그 해석에 비추어 다양한 과학의 기술적 경로를 가속하거나 감속하거나 차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증거와 실험 그리고 데이터를 활용해 과학을 정치에 융합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편, 과학의 정치화란 과학의 민주화와 과학기술 거버넌스를 말한다. 과학은 스스로 한계를 명확히 하고 끊임없이 성찰하는 분야로 재탄생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저자는 각 도시와 국가를 대표하는 과학 전문가, 정치인, 대중이 한곳에 모인 '지식 공유지' 역할을 하는 '과학기술 협의체'를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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