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표준 금강경 바로 읽기 조계종 표준 금강경
지안 지음 / 조계종출판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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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용어정리부터.

 

아누다라삼먁삼보리 : 범어를 음사한 것으로 무상정각(無上正覺)이라 번역한다.

위없는 최상의 깨달음 곧 부처님을 부처님이 되게 한 깨달은 자체를 말한다. 지혜의 생명으로

영원무궁한 실상의 세계를 상징한다.

 

보리심 :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는 마음.

 

보리심을 내었다는 것은 가장 깊고 큰 마음을 내어 진리를 알고자 하는 최고의 의지를 가졌다는 말이다.

즉, 이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의 상태를 어떻게 하면 가장 이상적인 상태가 되도록 하느냐는 것이다.

 

이런 수행을 하기 위한 불교 특히 조계종에서는 금강경을 최고의 경전으로 높이고 있다.

금강경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약칭하여 부르는 말로 반야경이라고도 한다.

이 경전제목의 뜻을 풀이하면 ' 금강과 같이 견고한 지혜로 번뇌를 끊고 피안에 이르게 하는 진리의 말씀'

이라는 뜻이다.

 

그럼 그 진리의 말씀으로 들어가보자.

 

모든 보살에게 자아가 있다는 관념, 개아가 있다는 관념, 중생이 있다는 관념, 영혼이 있다는 관념이 있다면

보살이 아니다. 좀 더 어려운 말로 하면 아상(我相) ,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있다는

관념과 생각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여기서 아상은 나를 구성하는 다섯가지 요소인 색(물질적인 것), 수(외계의 사물을 대할 때의 감각)

상(감각에 따라 일어나는 각), 행(생각이 의지가 되어 움직이는 것), 식(최종적인 인식과 판단)이

실체가 없는 공한 것임에도 그것을 모르고 자아에 집착하여 이기적인 고집이 일어난다고 한다.

 

인상이란 인간 본위의 관념에서 생기는 고집이다. 생명이란 모든 것이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인간만이 최고라고 하여 모든 생명을 대립적으로 생각하는 상대주의적, 인간 우월에서 오는 반생명적인 행위등이

인상에 속한다.

 

중생상이란 동물계와 식물계를 대립시켜 생명의 의미를 동물의 범주안에서만 부여하는 것이다.

 

수자상이란 육체적 생존만이 생명이라고 고집하는 그릇된 생명관으로, 생사가 없는 열반의 경지를 모르고

몸이 살아 있을 때만 생명이고 삶이라고 고집하는 소견이다.

 

자아에 대한 고집, 인간에 대한 고집, 중생에 대한 고집, 수명에 대한 고집, 이른바 사상(四相)이라는

네 가지 고집이 없다면 그가 하는 모든 행위는 어디에도 붙들림이 없는 무애자재한 대행(大行)이 될것이고

이것이 바로 깨달음으로 통하는 묘행이다고 금강경은 말한다.

 

나아가 이러한 네 가지 깨달음이 있다는 그런 깨달음조차 인식하거나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부처가 되고자 하는 마음자체도 없어야 부처가 될수 있고 그렇게 되었다고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실로 어렵다. 하지만 남을 도와준다는 마음을 가질 때 그러한 도움의 마음자체도 없어야 비로서

남을 도와줄수 있다고 하는 설명에서 공(空)의 의미를 알게 된다.

 

이에 더하여 금강경은 위 깨달음의 가치가 얼마나 지고지대한지를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항하의 수가 한없이 많고(갠지스강의 셀수 없을 만큼 많다고 가정하여) 그러한 수 없는 항하의 모래알 만큼

많은 목숨과 재물과 보시도 이 금강경의 말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실로 '모든 것은 공한 것이며, 공한 것 또한 공하다고 하는 ' 말씀을 깨닫되 그러한 깨달음자체도 공하다고

하는 금강같은 말씀은 새길수록 새롭다.

 

이러한 깨달음을 몸소 수행하고 노력정진하는 스님들은 얼마나 그 공덕이 사해에 사무칠까 생각하면

옷깃을 여미게 된다.

 

그런데 금번 봉은사사태로 촉발된 불교계이야기를 접하다 보면 저 금강경의 말씀이 또 공하다고도 생각된다.

조계종총무원장이라 하면 수 많은 스님들과 불자들의 대표이며 깨닮음이 극에 달할것이라고 생각됨에도

정치권력에 줄을 대고 거기에 아부하여 선거활동을 앞장서고 그 정치권력의 압박에 굴종하는 모습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나같은 무지렁이 중생도 권력의 무상함에 대해 아는데 그 무상한 권력에 몸을 굽힌다는 것은

깨달음이 깊은 불자로서는 절대 해서는 안될 행위라고 보인다.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라는 말은

불경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웬만한 식견을 가진 사람은  다 아는 진리가 아닌가.

 

일체의 번뇌를 끊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교계의 번뇌를 앞장서서 만들어내는 고승이라.???

일체의 나도 없고 나도 없는 관념도 없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고승이 권력에 굽힌다?

아!! 수행의 덧없음이여!!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모든것은 비어있다. 그리고 비어 있다는 것마저 비어 있는 것이다. 모든것은 없다. 그리고

없다는 것마저 없는 것이다......조계종이라는 것마저 없는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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