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한참을 들여다 보다 - 시인의 눈으로 본 그림 이야기
김형술 지음 / 사문난적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그림을 본다는 것, 대개는 이렇게 표현한다. 그림을 본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그림을 "들여다" 본다로 표현을 한다.

 

그림을 '들여다"보다니 뭔 뜻일까?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화가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피에트 몬드리안의 '잿빛 나무'는 줄기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뻐치는 그림이다.

대개는 이 그림을 "보고" 나무를 이렇게 '표현'했구나 하는 느낌을 갖는다.

 

그러나 저자는 이 그림을 이렇게 "들여다 본다"

 

"숲 속의 어느 나무도 이웃의 나무에게 기대어 자라지 않는다. 오직 홀로 바로 서 있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고독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아름답고 그래서 고귀하다.

그런 면에서 나무는 인간을 닮았다."

 

'그림 속의 나무은 아마도 숲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서 있는 나무인 듯하다.

숲에서 자라는 나무는 저렇게 자기 의지대로 마음껏, 함부로 가지를 펼치지는 못한다.

마치 세상이라는 틀 속에서 자제를 미덕으로 교육받은 사회적 인간들처럼

나무들도 숲이라는 공동체의 보이지 않는 약속을 어기지 않는 순한 생명체다.

 그러나 그림 속의 나무는 누구의 제약도 받지 않는 듯 혹은 받지 않으려는 듯 역동적인

몸짓으로 자신의 의지를 표출하는 듯하다. ..............

 

그러나 한 번 더 가만히 들여다보면 뒤엉킨 가지의 날카로운 표정들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선 자의 치열한, 고통스러운 내면의 표출처럼 보이기도 한다. "

 

"세상이라는 틀 속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 자유를 가진 대신에 상처와 치유를 홀로 감당해야 하는 자의

처절한 자의식 또한 홀로 선 자의 몫일 터이다."

 

그림 하나 두고 이렇게 까지 '해석"하면서 그림을 보아야 한다면 어떤 면에서는 하나의 '고통'일 수도

있겠다 싶어 괜히 주늑들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그렇게 '해석'하는게 아니라 '상상력'이라 한다.

 

책을 하나 읽어도, 영화하나를 보아도 그 책과 영화에 대하여 여러 감상을 갖게 되는데

하물며 온전히 한 인간의 아니 창조자의 영혼을 대하면서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하는

질문은 매우 온당하며 나아가 그 그림을 자꾸 "들여다" 보면서 나만의 상상력의 날개를

다는 것은 나와 또 다른 영혼과의 만남이고 그 만남으로 내 영혼의 풍요로운 즐거움을

느껴보라고 이야기 한다.

 

그림의 종류가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우리는 그런 그림을 대할 때마다 사람의 풍경이고 산이자 구름이며

인간의 마음이고 정신을 만나게 된다고 한다.

 

마치 책 한권을 읽고 나서 저자가 하는 말을 되새김질 하듯이 하나의 그림을 놓고 창조자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여다" 보는 즐거움은 마치 그림 하나가 책한권 아니 더 나아가 책 몇권의 이야기를 듣는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산책하듯, 연애하듯, 가끔은 모험하듯 그림 보러 가실래요? 하는 저자의 말에

한마디로 팍 끌려들어가게 된다.

 

앞으로 그림하나를 볼 때 마다 나의 상상력이 얼마나 늘어날까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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