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콜로케이션 사전 - 최적의 의미단위 영어학습법
Michihisa Tsukamoto 지음 / 다락원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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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조선은 식민지가 되었나?  그리고 왜 한국은 아직도 식민사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나?

왜 일본은 과거침략에 대한 반성을 안하고 있나? 에 대한 답은 여러가지 연구와 논문으로 대략적이나마 알 수 있다.


이에 저자는 해방후 일본에서 진행된 도쿄 전범재판의 전범 당사자 하나하나의 발자취를 통해서 그들이 어떻게 패전후 다시 일본 정계로 복기하였는지를 살핀다. 한며한명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지금의 일본우익의 뿌리는 바로 전쟁전범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 어떻게 전쟁에 대한 사과와 반성을 할 수 있나하고 고개를 흔들게 된다.


여기에 더하여 한국에서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기댄 사학자들이 강단사학을 움켜쥔채 역사를 장악하였고 정치경제적으로는 친일파들이 아직도 사회곳곳에서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기에 식민상태는 아직도 극복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어떻게 이를 극복해야 할까


그에 따른 연구 이전에 한국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사람들이 어떠한 사상을 토대로 하여 독립운동을 하였을까에 대한 고찰은 아직 미미한 실정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상적 연원은 독립운동과정에서나 후에 해방후 만들어지는 나라에 대한 밑그림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연구와 고찰이 뒷받침되지 않고 다만 독립'운동'에 대한 것만 고찰하게 되면 어떤 나라를 만들려 했고 그것이 어떻게 실패하였나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가 지금 현재에서 어떤 나라를 희망하고 있는가에 대한 미래를 그려볼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일본 극우파의 부상과 이에따른 동북아의 국제정세속에서 지금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지금 당시와 비슷한 100여년전의 과거를 특히 그중에서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던 사람들이 어떠한 생각으로 모든 재산과 목숨까지 버려가며 싸워왔는지 밝히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우당 이회영과 석주 이상룡의 사상적 기반이 무엇인지를 1차사료를 통해서 밝히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둘의 사상적 기반은 아나키즘이라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우당 이회영은 '가금시이작비'(覺今是以昨非) 즉, '지금 깨달으니 과거가 잘못되었다.'가 아니라는 우당의 직접적인 말을 전하고 있다. 우당은 과거 조선의 벌열가문이고 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아서 조선의 기득권층이었지만 그 과거가 잘못을 바로잡고자 아나키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회영은 이렇게 말한다.


"자유 평등의 사회적 원리에 따라서 국가와 민족 간에 민족 자결의 원칙이 섰으면 그 원칙 아래서 독립된 민족 자체의 내부에서도 이 자유 평등의 원칙이 그대로 실현되어야 할 것이니까 국민 상호 간에도 일체의 불평등, 부자유의 관계가 있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지금 현재에서도 매우 진보적인 생각을 하고 있고 또 이것을 실제로 실천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이 어떻게 나왔는가에 대하여 저자의 연구수고가 보인다. 저자는 우당과 석주의 이런 생각이 조선후기 양명학의 계보를 이었기 때문에 아나키즘의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왕양명의 저서 '전습록]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은 바로 위와 상통한다고 한다.


'무릇 성인(聖人)의 마음은 천지만물을 일체로 삼으니 천하 사람에 대해 안과 밖, 가깝고 먼 것이 없고, 무릇 혈기 있는 것은 모두 형제나 자식으로 여기어 그들을 안전하게 하고 가르치고 부양하여 만물일체의 생각을 이루고자 한다.'


성리학적 기득권층에 얽매이지 않는 양명학의 대동세상에 대한 것이 학문적 사상적 뿌리가 되었기 때문에 조선의 멸망에 대하여 일제에 타협하지 않고 왕조복권이 아닌 아나키즘적 평등세상을 추구하기 위하여 모든 재산과 명예를 버리고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우당과 석주의 독립운동은 양명학적 뿌리에 기반한 새로운 사조를 사상적 기초로 삼아서 새로운 나라의 모습을 그렸기에 패망한 왕조의 부활과는 전혀 관계없이 대동세상 평등세상에 대한 열망과 기대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막연히 나라를 잃어서 그것을 되찾고자 하는 노블레스오블리즈의 전형으로만 둘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추구하고 바라야할 미래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지금의 문제해결에 아무런 역할도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노를 잠재우고 차가운 이성으로 미래를 실천하는 우당과 석주의 혜안에 다시금 고개가 숙여진다.


저자의 노고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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