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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코드 - 서화에 숨겨둔 조선 정치인의 속마음
이성현 지음 / 들녘 / 2016년 4월
평점 :
이성현의 《추사코드》를 추리소설 읽듯 읽어냈다.
잠깐 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내 삶의 경험이 《추사코드》라는 책을 읽게 된 맥락 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한문 선생님이 동아리 활동으로 서예반을 운영하고 계셨다. 선생님은 어릴 때 서당에서 공부하신 분이라고 했다. 정년이 다 돼가던 선생님은 대학진학에 영향력이 없던 한문을 가르치면서도 수업시간에 굉장히 열정적이셨다. 평소 한문을 좋아했던 나는 선생님의 열의에 끌려 서예반을 기웃거렸다. 첫날, 선생님이 내 성명을 한자로 적어보라고 하셨다. 내 성명에 들어있는 한자를 선생님이 한지에 붓으로 다시 쓰면서 말씀하셨다. “밝게 살라는 이름이구나. 항상 밝게 살도록 해.”살아오는 날들 동안, 이러저러한 일로 인상을 찡그리거나 화가 나서 일을 그르치고 나면 뒤늦게 선생님의 이 말씀을 떠올리며 ‘아, 내가 좋지 않은 마음을 먹었구나.’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 한문 선생님이 내 성명 석자에 들어 있는 뜻을 헤아리시듯 한자는 글자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서예 전시회나 서예교실에 가보면 남의 글을 베껴 쓰듯 글씨체에 그 방점이 찍혀있는 걸 보고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모름지기 문자라는 것은 그 속에 내용을 담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용보다 글자모양을 두고 ‘잘 썼네, 못 썼네’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지.
늘 추사체라는 추사글씨를 볼 때마다 참 특이하다고 여겼다. 이 책에서도 첫 번째로 다루고 있는 <계산무진 谿山無盡>부터 그랬다. ‘계산’은 가로로 쓰고 ‘무진’은 세로로 겹쳐서 썼다. 서예에 무지한 내 눈에는 글씨라기보다 그림으로 보였다. 금석학의 대가이고 주역뿐만 아니라 대단한 석학이라고 하는 추사, 그러나 긴 유배로 유폐된 학자가 글씨로 재주를 부리고자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렇지만 박지원이나 정약용처럼 남긴 특정 저서가 없으니 그의 생각을 알 수가 없다. 그런 나였기에 이 책을 보면서 계속 “맞어! 맞어!”혼잣말까지 하며 읽었다. 비록 내 눈에는 그림으로 보이는 글자들이 당시는 천자문으로 시작해서 사서삼경을 달달 욀 정도가 되어야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으니, 선비라면 몇 글자의 편액에서도 그 뜻을 충분히 유추해낼 수 있었으리라. 추사가 남긴 현판이나 편지글 등의 글자 하나하나에 함의가 있으리라 충분히 공감됐다. 출세 길을 접고 금석학을 연구하고, 한창 세상에 본인의 뜻을 펼칠 시기에 제주 유배를 9년간 했다면, 그의 글씨에 자신의 사상이나 의도를 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지성인이라면 ‘문사철文史哲’은 기본이라고 하는데, 당시는 ‘시서화詩書畵 삼절’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림과 글, 글씨에 자신의 생각을 담던 선비들이고, 그걸 보는 사람들 또한 사서삼경을 욀 정도의 학식 있는 사람들이었으니, 추사의 글씨 속의 감추어둔 뜻을 찾고자 했을 것이다. 이어서 다루고 있는 <산숭해심><유천희애><사서루><죽로지실><일로향실><무량수각> 등의 글자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신비하다. 그런데, 저자가 읽어내는 그 뜻을 보면 흥분이 되기까지 했다.
452쪽에 달하는 책은 3부로 구성돼 있다. 1부의 소제목은 ‘천재가 설계한 미로’, 2부는 ‘대밭에 묻힌 추사’, 3부는 ‘추사의 가면극’이다. 1부에 나오는 작품은 <모질도耄耋圖>라는 그림이다. 첫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천 마디 말보다 찰나의 눈빛이 진실에 가까운 법이다.”
이어서 저자는 쓰고 있다.
“사람의 말이란 뇌가 걸러낸 것이지만 눈빛은 반응인 까닭에 꾸밀 틈이 없기 때문이다…빼어난 예술작품은 많은 것을 암시할 뿐 친절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을 담고 있거나 설명할 수 없는 요인이 있기 때문이다…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독립된 인격체와 대화를 나누는 일이라 하겠다…위대한 예술작품은 당신의 눈길에 반응하고, 당신의 무뎌진 감각을 다듬어주며, 끝내 당신의 가슴을 벅차게 채워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에 명작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다만, 지금 당장은 끌림이 없다가도 어느 순간 가슴이 먹먹할 만큼 큰 울림과 함께 다가오는 것이 명작이므로, 함부로 당신의 몫의 감동을 타인의 지식과 바꾸는 것만을 피하시길 바란다…이것이 추사에 대해 연구하며 깨달은 제일 큰 소득이며, 저명한 추사 연구자들의 수많은 책에도 불구하고 다시 책을 엮게 된 이유다.”
이렇게 밝힌 후 저자는 <모질도>를 이야기한다. ‘모질도’라고 할 때, ‘모’와 ‘질’은 노인을 뜻하는 것으로, 보통 나비와 고양이를 그려 장수를 축원한다. 그런데 추사의 <모질도>에는 “나비도 없고, 늙은 고양이의 행색에서 안락한 노년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다. 그리고 김홍도의 <모질도>와 추사의 <모질도>를 비교해 보여준다. 조금 뒤에 신사임당과 겸재 정선의 수박을 파먹고 있는 쥐를 그린 두 작품 얘기를 하고 있다. 또 다시 최북과 심사정의 <서설홍청>, 순무를 갉아먹는 들쥐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면서
“수박을 훔쳐 먹는 쥐의 모습이든 순무를 갉아먹는 쥐의 모습이든 결국 쥐가 하고 있는 짓은 농작물을 훔쳐 먹고 있는 것이다. 그런 위의 모습이 귀엽거나 예뻐서 그렸을 리 만무하건만, 오랜 세월 동안 다수의 작가에 의해 그려졌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는가?”
하고 묻고 있다.
“예술이 비유체계를 사용하는 한 비유의 수준은 예술작품의 수준을 결정하는 주된 요인이 된다. 쥐의 형태를 통해 부패한 관리를 고발하는 신사임당과 겸재 정선의 비유법도 훌륭하지만, 수박은커녕 쥐 한 마리 그리지 않고도 부패한 관리를 몰아내겠다는 의중을 담아낸 추사의 <모질도>를 보고 있노라면, 그의 작품이 얼마나 고도로 정제된 비유체계 속에 완성된 것인지 실감하게 된다.”
책을 읽으며 밑줄을 치고, 형광 띠로 표시를 하다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쪽이 하나도 없다시피 해서 따로 표시하면서 읽는 일을 그만두었다. 책을 읽다가 한자의 변천에 대해서 자료 검색을 해보았다. 예를 들면 ‘비우(雨)’가‘갑골문→금석문→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로 바뀌는 동안 그 글자 모양이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왜 추사는 금석학을 연구하게 되었을까?”에 대한 저저의 생각이 어렴풋하게나마 동감이 되었다.
어젯밤에는 다 읽은 책을 처음부터 펼쳐서 한자 부분만 따라 써보다가 잠들었다.